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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지릭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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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지릭 가는 길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44〉

7월 16일(월), 일찍 잤기 때문에 5시 반쯤 일어났다. 오늘은 텐트 걷는 일이 없으니 일찍 떠날 예정이다. 7시에 모두 기상시켰다. 아침밥 먹을 때 나온 특별한 차가 오늘을 향기롭게 한다. 어제 이리나가 들판에서 뜯은 '꾸릴스키 차이'를 끓여 내놓은 것이다. 꽃과 잎이 마르지 않아 약간 풀냄새가 나지만 맛이 담백하고 향기가 좋다.

악따쉬에서 비행기 좌석 컨펌 때문에 전화 거느라고 다시 30분을 소비했다. 혹시라도 자리가 확인 안 되어 취소하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 때문이다. 전화국 전화박스에 전화기가 두 대 있는데 전화기에는 버튼이 없다. 직원에게 전화할 곳을 일러주고 연결이 되면 전화박스에서 통화를 하는 식이라 통화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은 영원한 시베리아의 친구 시비르체프 교수에게 부탁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일찍 떠난다고 했는데 오늘도 9시 반이 되어 버렸다.

빠지릭 가는 길은 지금까지 달려온 길과는 다르게 상당히 기름지다. 추야스텝, 꾸라이스텝은 모두 추야산맥과 꾸라이산맥 사이에 형성된 평원이다. 그런데 오늘 가는 길은 그 꾸라이산맥을 넘어 더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악따쉬를 거쳐 추야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치빗(Chibit)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낯익은 잣나무, 전나무가 가득 찬 아름다운 계곡에 작은 폭포들까지 보이니 그야말로 그림이다.

조금 더 가면 마치 바위를 凹자꼴로 파내 물이 흐르게 한 것처럼 좁은 바위길이 나오는데 바로'붉은 문'이라는 곳이다. 바위 색깔이 붉은 빛을 띠었다고 해서 붉은 문이라고 부르는 이 협곡은 꾸라이산맥이 끝나고 아이굴락(Aigulak)산맥이 시작되는 사이에 생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지나지 않으면 우리가 오늘 목표로 하고 있는 울라간(Ulagan)스텝으로 갈 수가 없다.
▲ (좌)그림 같은 붉은문 (우)죽음의 호수 쳬이벡꾤(Chyeibekkёl). ⓒ프레시안

붉은 문에서 몇 ㎞만 더 가면 작지만 아름다운 쳬이벡꾤(Chyeibekkёl)호수를 지난다. 이 호수는 너비가 200~300m, 길이가 2km인데 깊이가 무려 170m나 된다. 파아란 하늘, 쪽빛 호수, 그리고 짙은 초록의 주변 경관이 어울려 정말 선경을 이룬다. 차가 구불구불한 호수가 길을, 그것도 제법 오랜 시간을 지나기 때문에 한동안 모든 속세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유명한 음악가, 화가, 작가들이 이 호수를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예프리예모프라는 음악가가 이 호수에 대해 작사, 작곡을 한 음악이 유명하고, 특히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초로스-구르낀(Grigory Ivanovich Choros-Gurikin)의 '산신령의 호수'라는 작품은 유명하다.

지리학자 일행이 까뚠강에서 조사를 하다가 이 호수 근방에서 살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구르낀을 방문하였다. 그의 그림을 감상하던 조사단장이 '산신령의 호수'라는 작품이 맘에 들어 사고 싶다고 했다.

"지금 당신에게 팔 수 없습니다. 나중에 팔겠습니다."

구르낀은 점잖게 거절하면서 그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들었고, 그 그림을 그리다가 병까지 얻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 수 없이 그 지리학자는 그림을 사지 못하고 떠났다. 2년 뒤 그 지리학자는 우편을 통해서 그 그림을 받았고, 그 학자는 바로 "아, 그 화가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지리학자의 예상대로 구르낀은 1937년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림을 받은 학자는 기쁨보다는 슬픔 때문에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 편의 그림을 받은 학자는 그림의 재료를 보고 구르낀이 왜 병고에 시달렸는지 알게 되었다. 구르낀은 수은을 가지고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수은은 보통 온도에서 유일하게 액체로 있는 은빛 쇠붙이인데 다른 금속과 함께 합성이 잘 되어 금에 수은을 섞어 아말감을 만들기도 하고 그림의 물감을 만들 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은은 독성이 있어 수은으로 오래 작업을 하면 수은중독에 걸리게 되고, 중독이 되면 염통과 핏줄의 마비, 신경장애, 위염, 궤양성 대장염, 구강염, 신장염 따위에 걸리게 된다. 이 지질학자는 나중에 구르낀이 작업했던 곳 근처에서 구리광산을 발견했다. 결국 구르낀은 죽으면서 구리광산이 있는 곳까지 전문가에게 알리는 작업을 한 것이다. 자신의 혼이 실린 작품을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사랑하다, 죽을 때 자기 그림을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보낸, 아름다운 사연이다.

쳬이벡꾤(Chyeibekkёl)호수는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과 사연을 가진 사실과는 달리 물고기가 전혀 살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바다라고 불린다고 한다. 호수에서 사진 몇 장 찍고 우리는 계속 달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길이 좋고 주변경관 또한 각종 나무와 꽃으로 뒤덮여 지금까지 다닌 꼬쉬-아가치 지역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너무도 아름답고 다양한 경치에 우리는 그간의 피로를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이번 답사에서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빠지릭 가는 길'을 꼽을 것이다.

우리 차는 부드럽고 완만한 툰드라 평원을 지나간다. 그 곳에는 딸두껠(Taldukel), 쏠룰루껠(Solulukel), 우준껠(Uzunkel) 같은 호수들이 이어지는데 쳬이백꾤호수와는 달리 모두 물고기들이 살수 있는 호수라고 한다. 주변 풍경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꾸릴라이 차이'다. 짙은 초록 잎과 샛노란 꽃이 너무 잘 어울리는 꾸릴라이 차이가 마치 수천 평, 수만 평 밭처럼 밀집해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차밭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한 풍경이다. 더구나 이 차가 도시에서는 비싸게 팔린다니 정말 인공으로 재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 꾸릴라이 차나무는 빠지릭시대 사람이 죽으면 주검의 아래 위에 깔고 덮는 데 사용했다고 하니 당시도 이 차나무를 최고로 쳤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차가 천천히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점점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서 높은 산을 넘는다. 힘들게 올라가는 도중에도 환상적인 경치는 계속된다. 특히 거의 고개마루에 다다르기 전 오른쪽에 있는 차가껠(Chagakel)호수에서 멀리 바라보는 눈 덮인 봉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가장 가까운 근경에 노랗게 핀 꾸릴라이 차이, 그 다음 가까이에 푸른 호수, 멀리 원경으로 설봉을 그린 그림을 한 번 상상해 보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가장 높은 울라간 고개마루(해발 2080m)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려고 했는데 어디서 몰려 온 것인지 갑자기 안개가 고개를 메우고 햇빛조차 가려버렸다. 마치 신비스런 동화의 나라를 지나가는 것 같았다. 오늘은 할 수 없고 돌아올 때 반드시 이곳을 쉬어가면서 주변을 감상하기로 하였다.

고개를 넘어서는 계속 내려가는데 고개를 넘자마자 발맄뚜껠(Balyktukel)호수를 비롯해서 여러 개의 호수들이 왼쪽 길에 늘어서 있다. 울라간 고개는 큰 분수령이다. 고개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치빗강으로 흘러 까뚠강으로 들어가고, 북동쪽으로 떨어진 물방울은 바쉬카우스(Bashkaus)로 흘러 뗄레츠꼬예 호수로 들어가는 츌릐쉬만(Chulyshman)과 합류한다.
▲ (좌)차가껠(Chagakel)호수 경치(1) (우)차가껠(Chagakel)호수 경치(2).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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