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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반갑고도 슬픈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3장 天道가 무너진 땅 <12>

순천을 코앞에 두고 주막 앞에서 나졸들은 다시 휴식을 취했다. 김굉필도 소달구지에서 내려와 천변에 쭈그려 앉았다. 나졸들은 주막에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하거나 바가지로 물을 떠서 등에 끼얹었다. 순천 관아가 가까워졌으므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몸을 씻고 있는 중이었다. 김굉필은 표주박으로 찬물을 떠온 최충성에게 물었다.
"순천에 귀양 온 선비가 있는가."
"매계(梅溪; 조위의 호) 선생이 계십니다."
"매계가 의주에서 고생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순천에 있었군. 매계는 나와 동갑이지. 7세에 시를 지을 정도로 시문이 뛰어난 수재지. 그대는 매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좋겠어. 내가 추천해 주겠네."
"무슨 일인지 제자를 받지 않습니다. 저도 남원에서 몇 차례 내려와 간청했지만 그때마다 선생께서는 술이나 마시고 시 한 수 짓는 것이 세상을 잘사는 법이라며 물리치셨습니다."
"시를 워낙 좋아해서 그랬을 거네. 매계는 서울에서도 시와 술을 벗 삼아 사셨던 분이네. 하늘이 내린 시선(詩仙)이지. 난 말이네."
김굉필이 하던 말을 끊고 침묵하자 최충성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말씀하시지요."
"매계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 우리 점필재 선생님의 시고(詩稿)를 수찬했다 해서 무오년의 사화를 입은 선비거든.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냔 말이네. 다만 점필재 선생님과 친교가 있다는 것만으로 형을 받은 거지."
김굉필은 최충성이 떠온 찬물을 천천히 들이키고는 다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아 일어섰다. 몇 걸음 움직이니 마비는 곧 사라졌다. 소달구지에서 시달린 다리 살의 근육통이었다. 김굉필은 또 물었다.
"이곳에서 능주는 얼마나 먼가."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하루면 충분하게 오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제야 김굉필은 소매 속에서 두루마리 서신을 꺼내 읽었다. 서신은 희천을 막 떠나려 할 무렵에 능주에서 온, 정여해가 가노(家奴) 편에 보낸 것이었다. 이배 중에 펼쳐서 두어 번을 보기는 했지만 편안하게 읽을 수 없었던 서신이었다. 이배를 떠나는 긴장과 두려움에 마음이 편치 못했고, 무엇보다 나졸들에게 압수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극도로 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졸들과 농담도 할 정도여서 압수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희천에서 순천까지 오는 동안 이배의 고독을 덜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여해의 서신이었다. 김굉필이 먼저 서신을 보냈던 것인데, 뒤늦게 온 답신이었다.
▲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내신마을 뒤편 언덕에 위치한 해망서원은 중종 3년(l508) 돈재 정여해가 그와 사우관계가 되는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l5O4년)로 인하여 참형 당하게 되자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건립된 서원이다. ⓒ프레시안

<작년의 회신을 늦게야 비로소 배독(拜讀)하니 세상일을 분개하고 도를 걱정하는 정성이 비록 가의(賈誼)가 지은 복조부(鵩鳥賦) 글 속에서도 더욱 간절한 정성이 그만 그치지 못할 것이 있는데,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으면서 법대로 행하고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뜻이 은연중 그 속에 아울러 나타나 있으니, 평생 동안 책을 읽어 수양이 완전하고 힘을 얻을 것을 이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무리들의 빛이 되지 않겠습니까.>

김굉필은 자신보다 4살 위이지만 도가 깊어져 겸손함이 지극한 정여해의 서신를 읽는 순간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김종직 문하의 제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가 빛이 되고 있다니 김굉필은 부끄럽기조차 하였다. 김굉필은 다시 서신을 펼쳐들었다.

<아아, 희천이 어느 곳인가. 심은후(沈隱候; 남조 양나라 沈約)의 이른바 '꿈속에서도 길을 알지 못한다'는 곳이니 무엇으로 서로 사모함을 위로하겠사오며, 불안하게 맺힌 회포의 실마리를 어떻게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비바람 치는 긴긴 밤도 하늘에 있는 금닭이 새벽을 알리거늘, 아득히 그 날이 없으니 다만 '아침에 도를 들어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夕可)는 네 글자를 멀리 보내어 깨우쳐주는 의견으로써 격려할 뿐입니다.
여해(汝諧)는 평소에 같이 상종하여 학문을 갈고 닦으면서, 친형제와 같이 지내던 정의로 생각한다면 마땅히 즉시 달려가서 위문을 해야 할 터이나 오늘날 우리 무리들이 자주 왕래하는 것이 혹시 사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실제의 화를 도발해 얻게 될는지가 두렵습니다. 더구나 저의 병은 겨울철을 당하여 더욱 더해져서 문을 닫고 신음하면서 찾아오는 손님마저 사절하고 뜰 안에 걸음을 옮기는 일까지도 스스로 그만 둔 지가 또한 오래 되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산과 강이 가리어 아득한데 서신으로 안부를 묻는 일도 또한 매우 드물 듯 하오니 붓대를 손에 쥐매 슬픔만 더해질 뿐입니다.>

사연이 길지 않은 서신이었다. 건강이 허락지 않으므로 길게 쓰지 못하고 있었다. 글씨는 힘이 다하고 눈이 어두운 늙은이의 것처럼 삐뚤삐뚤 그려져 있었다. 정여해의 서신에 담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조문석가(朝聞夕可)였다. 조문석가란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의 준말인데 '아침에 도를 들어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이었다.
정여해가 문밖을 출입하기도 힘들 정도의 중풍을 앓고 있기 때문에 김굉필이 먼저 건강을 염려하는 안부 서신을 보냈던 것인데, 정여해의 답신은 도학자로서 맑은 정신세계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김굉필은 서신 가운데 가슴을 절절하게 하는 구절을 마치 정여해와 맹세하듯 중얼거렸다.

'아침에 도를 들어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김굉필은 미소를 지었다. 한 스승 밑에서 동학한 제자로서 비록 자신은 유배중이고, 정여해는 중풍을 심하게 앓고 있는 처지이지만 서로가 도(道)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맹세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정여해가 사장(詞章; 시문)보다는 절의를 중시하는 김종직의 문하에 입문한 것은 족형(族兄)인 정여창의 권면이 컸다. 일찍이 15살의 정여창이, 동갑이지만 생일이 늦은 정여해에게 김종직의 제자가 될 것을 서신으로 권유하자, 그때 정여해는 대학자인 김종직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갑신년(1524년) 3월 13일 하남(河南; 능주)에 사는 동자(童子) 정여해는 삼가 재계를 하여 하룻밤을 지낸 후 두 번 절하면서 점필재 노선생의 자리 아래에 글월을 올립니다. 가만히 삼가 듣자옵건대 옛 사람의 말에 '학문은 인(仁)에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소자는 이 구절을 욀 때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뜻을 나타냄이 지극히 친절하고, 간단명료해서 천만대의 도에 뜻을 두고 도를 구하는 사람의 철칙이요 목표가 된다는 데 탄복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인을 가까이 하면 이전의 어둡고 흐리던 사람은 밝고 환해질 것이요, 이전에 갈팡질팡하게 걷던 사람은 넓고 편편한 곳의 걸음이 될 것이요, 성질이 비꼬인 사람은 온화 편안해질 것이요, 자만한 사람은 순직하고 진실해질 것이요, 위태로운 사람은 순조롭게 될 것이요, 옹졸한 사람은 도량이 넓어져서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운 후에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게 될 것이요, 평범한 사람도 요순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그 편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한 점 태양의 기운을 가까이 하면 그 볕을 쬘 수 있고,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 하면 찬 기운이 발생하여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찬 기운이 발생하여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면 비록 열 겹의 옷을 입고 백 겹의 이불을 덮더라도 마침내는 추워서 그 몸을 떨고 그 살갗이 얼어터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가까이하고 멀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소자는 지금 나이가 15세입니다. 7세부터 <소학>을 가정에서 배워서 쇄소(灑掃; 청소)와 진퇴의 예절을 대략 익혔고, 12세에 <논어>를 가끔 읽어서 '학문을 널리 배워 사리를 구명하고 행동은 예의로써 하여 지조를 지키며, 사욕을 극복하고 예절을 회복하는 과정을 대강 연구하여, 비로소 과거(科擧)를 위한 학문 이외에도 절실히 자기 몸을 수양하는 공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궁벽한 고을에 자라나서 선각자의 본보기를 만나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는 어근버근하여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면서 세월만 끌어온 바 근거를 두고 일을 시작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에 족형(族兄)인 여창이 멀리 편지를 보내와서 스승을 구하는 이득과 도덕을 지닌 분에게 나아가서 시비를 질정하는 방법을 간절히 권장하고는 이내 선생님의 유덕하심을 소개하였습니다.
'학문은 바른 계통을 계승하셨고, 도덕은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문호를 널리 열어 영민한 인재를 교육하여, 큰 재간을 지낸 사람은 크게 만들고, 작은 재간을 가진 사람은 작은 대로 만들어, 마치 봄바람이 한번 불어오면 소태나무와 가래나무와 같은 좋은 재목이거나,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와 같은 쓸모없는 재목이거나를 불문하고 모두 꽃을 피우고 무성해지는 덕택을 입는다.'
비록 소자와 같이 자질이 우둔하고 학문이 천박한 사람이라도 오히려 굳게 지킨 상도(常道)가 없어지지 않는 마음은 있어, 족형의 편지를 받고는 문득 뭉게구름처럼 일어나는 느낌과 분발하여 일어나는 뜻을 금할 수 없었사오니 이것이 바로 인(仁)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옵니다. (인을) 가까이하면 학문하는 데 이보다 편리한 것이 없을 터인데 무엇이 괴로워서 가까이하는 방법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는 인품을 사모하고 선한 분을 바라보는 정성이 날로 더욱 심하여 문하에 용감하게 나아가서 큰 화로나 풀무와 같은 교화를 받고자 하였사오나, 돌이켜 보아서 궐당동자(闕黨童子)의 속성(速成) 병폐를 경계한 일을 생각하고, 이지(夷之)가 서벽(徐辟)을 통하여 맹자를 찾아 뵌 옛 일을 본받아 감히 짤막한 글월을 엮어서 여창이 가는 걸음에 먼저 변변치 못한 저의 사정을 아뢰옵고, 삼가 진퇴, 가부의 명령을 기다리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물리치지 않으시어 폐백을 가지고 절하고 뵙는 날에 한 구석 자리를 허락해 주신다면, 선생님의 덕을 우러러 뵙고 선생님의 인에 가까이 하여 친히 가르침을 받는다면, 하늘의 신령과 같은 힘을 입어 우둔한 불초의 자질을 변화시키기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오니 선생님의 은혜가 어찌 깊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삼가 선생님의 살펴 주심을 바라옵니다.>

문하에 입문을 허락해 달라는 소년 정여해의 서신은 김종직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비록 대학자가 없는 능주에서 독학한 15세의 정여해라고는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학문의 태도나 목적은 김종직을 매우 흡족하게 했던 것이다. 김종직은 여러 제자들에게 강의할 때마다 곧잘 '여창과 여해는 도학으로써 정문(鄭門)을 빛낼 것이다'라고 격려하곤 했던 바, 그것은 학문하는 목적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仁)에 가까워지기 위한 것이라는 소년 정여해의 생각이 김종직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정여해.
할아버지 유주(由周)는 창덕궁 참봉이었고, 아버지 지영(之英)은 흥양(현 고흥) 현감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오형제가 모두 같은 해에 과거 급제해 능주 이곡에 훗날 오고정(五鼓亭)이란 정자가 세워지게 된 명문 자손으로 12세 때 벌써 도학의 싹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할아버지 정유주와 친분이 있던 고을 원이 수재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배우고 때대로 익혀서 기뻐하니
이에 성인의 공부를 엿볼 것이네
글들을 잘 음미하나니
도의 근원이 우리나라에 있다네.
學而時習悅
見此聖人功
字字能詳味
淵源道在東

이후 소년 정여해는 <논어>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만을 품지 않는다(人不知不慍)'를 세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며 학문의 대의를 깨달았다. 소년 정여해는 친지를 만날 때마다 '학문하는 근본 강령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였고, 과거를 권하는 어른들에게 '몸을 다스린 후에라야 남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능히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벼슬을 바라는 마음은 더욱 어린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릴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소년 정여해는 사종형(四從兄)인 정여창의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서신을 받고나서 김종직의 문하로 입문했던 것이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어릴 때부터 정도(正道)로 교육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라 했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옥돌도 갈지 않으면 쓸모 있는 그릇이 되지 않는다' 하였으니 어찌 궁벽한 시골에 파묻혀 스승과 친구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가.>
▲ 조선 연산군(1494∼1506) 때 무오사화(1498)로 귀양살이를 하던 김굉필이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임청대'라는 이름을 지었다. ⓒ프레시안

마침내 정여해는 김종직에게 나아가 <중용(中庸)>을 배우면서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등과 강의를 듣고 토론하며 경서의 뜻을 깨달아 밝힌 바가 많았다. 이전의 학문에 근거가 생기고 새로운 지식에 도움이 되어,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풀렸고, 칼로 끊듯이 이치를 분별하여 더 발전하고 개척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여해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능주로 돌아와 공부를 잠시 접고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살았으며, 2년 후 다시 아버지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했다. 그러니까 정여해는 연달아 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상식(上食)을 마련했고, 찬 이슬과 눈보라를 맞으며 묘를 맑게 청소하는 성소(省掃)를 게으르게 하지 않았다. 풍찬노숙과 다름없는 데다 먹는 것도 어버이를 여읜 불효자라 하여 염채(鹽菜; 소금과 채소)를 6년 동안 금하니 살색이 누렇게 변하고 맥이 풀려 이미 몸 안에 중풍의 기운이 돌 정도였다.
부모의 상(喪)을 모두 마치고 스승인 김종직에게 문안 인사차 갔을 때, 가천정사(伽川精舍)에는 여전히 김굉필, 정여창 등이 있었고, 새로운 동지 원개(元槩), 곽승화(郭承華), 이승언(李承彦) 등이 있었다.
그때 김종직은 정여해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어긋남 없이 상례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는 여러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격려를 했다.
"정생(鄭生)은 부모상을 당하고 있을 때의 예절을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예절을 다하면서도 그 형식에만 빠지지 않고 애통을 다하면서도 그 몸을 손상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우리들 가운데 주자가례의 제일인(第一人)이다."
이 해에 정여해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다'는 이조(吏曹)의 추천을 받아 성종 15년에 삭주교수(朔州敎授)로 임명되었다. 3년 후에는 품계를 뛰어넘어 사헌부 지평을 제수 받았으나 정여해는 가까운 지인에게 거절의 이유를 밝혔다.
"나는 일찍이 벼슬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과거(진사시)를 거쳐서 헛되이 명예를 날린 것을 매우 부끄러워한다. 다만 요순 때와 같은 문명의 시대를 만나서 스승님과 벗들인 여러 현인들이 경연에 나아가는 일을, 변변치 못한 내가 감사하게 여기고 또한 달려가서 편달을 받고 싶은 소망이 없지는 않으나, 거기에는 재주가 미치지 못하고 힘이 미치지 못하는 데에야 어찌 하겠는가."
정여해는 거절의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단 한 가지였다. 김굉필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주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도학자로서의 겸사일 뿐이고, 부모상 때 받은 시묘살이의 후유증인 중풍의 기운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서울로 가 벼슬을 하는 것보다는 병이 깊어진 몸을 추스르는 것이 급했던 것이다.

소달구지는 맑은 물이 콸콸 소리치며 흐르는 옥천에서 멈추었다. 문득 김굉필은 순천에서 능주가 가깝다는 말을 들은 뒤였으므로 도학의 동지 정여해가 더욱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러나 순천에 당도하여 김굉필을 먼저 맞이한 사람은 조위였다. 그도 역시 유배를 와 있으나 행동거지가 자유로운 듯 감시하는 포졸 없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조위도 힘든 유배 생활에 지쳐 가는지 병색이 완연했으나 목소리만은 밝았다.
"한훤당, 이곳의 부사(府使)가 일러 주어 기다리고 있었소."
"매계(조위의 호), 살아 있으니 이렇게 다시 반갑게 만나는구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버리니 마음은 편해지더이다."
"몸은 고단하더라도 마음은 편안해야 합니다. 명군(明君)이 나타나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셔야 합니다."
"한훤당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구먼."
"아니, 매계답지 않게 그 무슨 말씀이오."
"부사가 보내준 술을 마시다 보면 낮이 지나가지요. 술에 취해 시 한 수 짓다 보면 밤도 지나가지요. 밤도 말입니다. 허허헛."
"술로 하루를 보낸단 말입니까."
"술 없이 세월을 보내는 방법이 있다면 나에게 가르쳐주시오."
조위의 눈에서 곧 눈물이 주르르 흐를 것만 같아 김굉필은 잡았던 조위의 두 손을 놓았다. 김굉필이 이배를 온 것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난언(亂言) 죄를 범했다 하여 형을 살고 있는 것이지만 조위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연산군의 눈 밖에 난 까닭은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했다는 죄목인데, 그것은 말 그대로 괘씸죄일 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감정이 풍부하여 시를 잘 짓는 조위의 품성으로 보아 그는 화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법도 했다. 스스로 위로하는 술도 하루 이틀이지 몇 해가 지나면 그것도 심신을 망가뜨리는 독이 될 뿐이었다.
김굉필은 눈을 돌려 조위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조위가 주먹으로 눈물을 닦더니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한훤당, 여기서 숨겨둔 내 벗이 무엇인지 맞혀보시겠소. 헛헛."
"매계의 숨겨둔 벗이라... 그것도 역시 술과 시가 아닙니까."
"술과 시, 맞습니다. 허지만 여기에서 술과 시란 놈은 내 정신을 흐리게 하더이다. 그래서 또 다른 벗을 사귀고 있지요."
"그렇다면 혼자만 사귈 것이 아니라 내게도 소개를 해주시오."
"발밑에 있으니 잘 살펴보시오."
김굉필은 발밑을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이오."
"허허헛. 맑은 옥천 물이 흐르고 있지 않소이까. 맑음을 가까이 하려는 임청(臨淸)이 내 벗이라오."
"옥천 맑은 물을 벗 삼는 매계는 역시 시선이라니까. 안 그렇습니까."

김굉필은 조위를 만나 반갑고도 슬픈 묘한 감정을 느끼며 적소로 들어갔다. 적소는 순천부사의 배려로 생각보다 큰, 대청마루가 딸린 초가로 마련되어 있었다. 김굉필은 마당가에 붉게 핀 꽃의 이름이 궁금하여 최충성에게 물었다.
"붉은 팥알이 뭉쳐 있는 것처럼 생긴 저 꽃 이름이 무엇인가."
"박태기나무 꽃이라 하옵니다."
"박태기라..."
"밥태기 같이 생겼다 해서 붙인 이름이옵니다. 이 지방에서는 밥알을 밥태기라 하온데, 부모의 무덤가에 심기도 하는 꽃나무이옵니다."
"왜 그런가."
"돌아가신 뒤에는 꽃을 밥 삼아서 굶지 말라고 박태기나무를 심는다고 하옵니다."
"오늘은 보고 듣는 얘기마다 마음이 심란해지니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 할 것 같네. 물러가 있다가 날이 밝으면 들르시게."
"네, 한훤당 어르신."

김굉필은 석양빛이 은은한 적소의 방에 들어 바르게 앉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야 일어나서 서울에 계신 어머니를 향해 큰절을 했다. 무사히 이배 온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자, 스승 김종직의 신위(神位)가 있는 영남을 향해서도 큰 절을 올렸다. 그런 다음에야 능주에 있는 정여해에게 중얼거렸다.
"중화(仲和; 정여해의 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운명인가 보구려. 순천에서 능주가 지척이라고 하니 더욱 보고 싶구려. 그동안 병환은 어떠했는지 걱정도 앞서지만 반드시 재회할 수 있도록 쾌차하시구려."
이와 같이 김굉필은 앞으로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순천의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김굉필이 적소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석양은 지고 없었다. 불길이 치솟아 번지듯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만 보였다. 잠시 후 나타난 새떼는 핏빛 노을 속에서 저무는 하루가 아쉬운 듯 급하게 날았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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