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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개울이 강이 되어 바다 향해 도도히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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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개울이 강이 되어 바다 향해 도도히 흐르고…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3장 天道가 무너진 땅 <11>

김굉필을 태운 소달구지가 곡성을 지난 강가에서 잠시 동안 멈추었다.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의 명을 받아 귀양지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졸들이 달려들어 삐그덕거리는 바퀴를 손보자 소달구지는 다시 움직였다.
긴급체포하여 압송해 가는 것이 아니라 유배지를 바꾸는 이배였으므로 김굉필의 목에는 무거운 칼이 걸리지 않았다. 대역죄인처럼 상투를 풀어헤친 봉두난발도 아니었다. 호송하는 나졸들의 태도도 자못 너그러워 김굉필은 경관이 빼어난 곳에서는 소달구지에서 내려와 잠시 쉬어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안도 희천에서부터 소달구지 판자 위에서 시달린 그의 몰골은 곧 쓰러질 듯한 중환자 같았다. 김굉필은 제자가 되고자 남원에서부터 따라온 남원향교 교생 최충성에게 힘없이 말했다.
"순천이 아직도 멀었소."
"한훤당 어르신, 저 높은 고개만 넘으면 순천 땅이 보일 것이옵니다."
소달구지의 바퀴가 다시 빠질 듯 삐걱거렸다. 나졸들이 달려들어 손을 보지만 이번에는 간단치 않았다. 김굉필이 달구지에서 내리자 바퀴 한 짝이 기어이 빠져버렸다. 달구지를 끄는 황소도 지쳤는지 입가에 게거품 같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수레가 멈춘 산길 아래로는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오후의 강렬한 햇살을 받아 고기비늘처럼 반짝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저 아름다운 강 이름이 무언가."
"모후산에서 발원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보성강이라 하옵니다."
김굉필로서는 전라도 땅으로 내려와 처음 보는 보성강이었다. 김굉필은 최충성의 대답 중에서 섬진강이라는 말에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명치끝에서 솟아오름을 느꼈다. 섬진강과 지리산 부근에 도학을 공부하는 동지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출생한 김굉필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리 없이 불러보았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내려왔을 때 그의 문하에서 도학을 공부하던 제자들이었다.
-함경도로 유배 간 정여창(鄭汝昌), 무오사화 때 죽은 김일손(金馹孫), 하동에서 살다가 능주로 은거해 버린 정여해(鄭汝諧), 그는 정여창의 권유로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는데, 정여창과는 사종 형제간이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고인이 돼버렸거나 고초를 겪는 동지들을 생각하는 김굉필의 눈가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천도(天道)가 사라지고 살육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땅에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었다. 자신에게 할 일이 있다면 도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유배지에서라도 스스로 공부하여 수신하는 것뿐이었다.
▲ 해망서원 사우(숭의사). ⓒ프레시안

연산군.
그의 이름은 융이며, 성종의 원자(元子)요, 폐비 윤씨가 낳은 자식이었다. 인자하고 늠름하던 성종이 38세로 갑자기 승하하자, 세자인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김종직에 이르러 막 꿈틀거리던 도학의 기세는 멈춰 버렸다. 융은 성종의 인산(因山)이 끝나기기를 기다렸다가 대행왕(大行王)에서 조선의 10대 왕으로 즉위했다. 대행왕이란 아직 즉위식을 치르지 않은 임시 왕을 말했다.
즉위식이 치러지는 1495년 1월 29일, 날씨는 연산군의 복잡한 성격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삭풍이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듯 거칠게 불다가도 미풍으로 변해 잠잠해지는가 하면 어느새 잿빛으로 돌변한 하늘에서는 우박이 언 땅을 두들기며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즉위식이 끝나갈 무렵, 연산군은 성종이 기르던 사향사슴 한 마리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어정거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왕이 되어 흡족해 하던 그의 얼굴에는 문득 표독스런 살기가 돌았다. 이윽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연산군이 추위에 떨고 있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을 불러 말했다. 전 왕조 때도 영의정이었던 신승선은 사임을 요청했으나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영상, 내 활을 가져오게 하시오."
"전하, 이 경사스러운 날에 활을 무엇에 쓰려고 하시옵니까."
"승지더러 어서 활을 가져오게 하시오."
"활을 어디에 쓰려고 하옵나이까."
"지난 날 저 사슴 때문에 아바마마께 꾸중 들은 것을 장인어른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억이 나시지 않습니까."
"네, 전하.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신승선의 벼슬은 그 무렵에도 영의정이었다. 성종과 사돈간, 즉 연산군이 13살 때 그의 딸이 동궁빈(東宮嬪)으로 간택된 후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던 것이다. 신승선은 칼바람이 부는 차가운 날씨 탓이기도 했지만 그때의 살풍경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떨면서 움츠렸다.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일찍이 성종이 사향사슴 한 마리를 애지중지 길렀는데 그 사향사슴은 성종을 두려워하지 않고 겅중겅중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성종은 영의정 신승선, 형조판서 김종직을 비롯하여 십수 명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정전(正殿)으로 가는 길에 연산군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불렀다. 그때였다. 그날도 성종을 졸졸 따르던 사향사슴은 연산군을 무서워하지 않고 맑은 눈망울 굴리며 혀를 내밀어 연산군의 손을 핥았다.
순간, 연산군은 벌레를 씹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풀이 하듯 사슴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놀란 사람은 성종을 가까이 따르던 신승선이나 김종직뿐만이 아니었다. 야릇한 미소를 띤 유자광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한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성종은 '짐승이 사람을 따르는데 어찌 그리 잔인스러우냐!'고 한 마디 하고는 신하들 보기도 민망하여 황망히 그 자리를 떠나버렸던 것이다.
연산군은 도승지에게 활과 화살을 받아 쥐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사향사슴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사슴은 겁을 내지 않고 구부러진 낙락장송 사이를 어정거릴 뿐이었다. 연산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구든 나를 능멸한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저 사슴처럼 죽이고 말리라. 과인의 화살이 누구라도 심장을 겨눌 것이니라.'
신승선은 그 순간 또 다시 사위인 연산군에 대한 정이 떨어져 영의정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왕의 장인이라 하여 하사한 토지도 받지 않기로 하고 거창으로 낙향할 것을 생각했다. 이때 낙향한 사람은 신승선 말고도 과거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된 박영(朴英)도 마찬가지였다. 즉위식 다음 날 박영도 병을 핑계하고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사슴의 목을 적중하여 사슴은 붉은 피를 흘리며 힘없이 몇 걸음 비틀거리다 쓰려져 버렸다. 즉위식에 도열한 문무의 신하들은 성종이 아끼던 사슴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탄식을 삼키느라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임사홍(任士洪)만은 예외였다. 그는 머리를 땅에 닿을 듯이 깊숙이 처박고는 대담하게 아첨의 말을 했다.
"전하, 천하의 명궁이시옵니다. 경사스런 날에 사슴을 하늘에 바치시었으니 하늘은 기필코 감동하여 전하의 전도(前途)를 보살펴줄 것이옵니다. 다시 한번 신(臣) 임사홍은 영명하신 전하께 마음을 다해 감축드리옵니다."
"고맙소. 허나 과인은 저 사슴으로 하여 아바마마께 질책을 들었던 바 원수를 갚고자 화살을 쏘았을 뿐이오. 앞으로도 과인은 대소신료 누구를 막론하고 원수 보기를 저놈과 같이 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알겠는가."
"네에."
문무의 신하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떨었다. 세자 시절부터 연산군의 잔혹한 성품을 익히 보아 알고 있었으나 권좌에 오른 그의 모습은 굶주린 맹수와도 같았다.
▲ 해망서원 현판. ⓒ프레시안

김굉필은 소달구지 안에서 눈을 감고 이미 작고한 스승 김종직을 떠올렸다. 김종직이 성종 승하 전에 밀양으로 내려가 버린 까닭도 사실은 훗날 무도한 연산군의 등극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달구지의 바퀴가 돌멩이에 부딪칠 때마다 몸이 심하게 좌우로 흔들렸지만 김굉필은 스승이 앞에서 지켜보는 듯 자신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나졸은 순천이 가까워질수록 채찍을 높이 들어 황소 엉덩이를 후려치면서 '이랴, 이랴앗!' 하고 달구지를 끌었다.

1489년 성종 20년 이른 봄.
형조판서 김종직은 5년 후의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 세자 연산군의 행태로 보아 조정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종직은 판서직을 사임하고 어릴 때 수학했던 밀양으로 내려갈 참이었다. 김종직이 밀양으로 내려가기 전날이었다. 남대문 밖, 버들가지가 휘늘어진 개울가의 한 정자에서는 송별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대문 밖의 정자는 한강 나루터 가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벼슬아치들의 송별연이 자주 열리곤 했는데, 서거정(徐居正)도 친구와 이별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조린 적이 있었다.

친구는 날 이별하여 멀리 떠나며 노래하네
무엇으로 보낼 것인가 은술병이 한 쌍일세
성문 앞 버들가지 꺾기는 어려워라
한 맺힌 꽃다운 풀 어느 때나 잊을손가
올해도 지난해도 늘 두고 어긋나니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별엔 애가 타네
이별가 세 곡조를 더 노래하고 나니
동편 구름 아득하고 북쪽 나무 망망하다.

故人別我歌遠遊 何以送之雙銀甌
都門楊柳不堪折 芳草有恨何時休
去年今年長參商 富別貧別皆斷腸
陽關三疊歌旣闋 東雲北樹俱茫茫

정자마루 안쪽 중앙에는 서울을 떠나는 김종직이 사림의 영수 자격으로 앉아 있고, 그의 좌우로는 제자들이 나이나 벼슬과 상관없이 오는 순서에 따라 앉았다. 스승 앞에서는 모두가 제자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남효온, 정여창, 김굉필, 정붕(鄭鵬), 조위(曺偉), 정희량(鄭希良), 김일손, 권경유(權景裕), 권오복(權五福), 이목, 홍유손(洪裕孫), 이총(李摠) 등이었다.
김종직은 낙향하는 이유로 칭병을 들었다.
"병든 몸으로 판서직을 더 이상 수행하기 힘들어 사임했다네. 더 늙기 전에 밀양으로 내려가 아직도 이루지 못한 도학에 매진하려고 하네."
"유림의 거목이신 선생님이 계시기에 저희들은 선생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생기는 모든 의혹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하온데 이제 의문이 생겨도 누구에게 묻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걸어갈 힘이라도 있을 때 낙향하려는 것이 이 늙은이의 마음일세. 그러니 너무들 나를 몰아세우지 말게나.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남아 있는 여생이라도 이루지 못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게나."
김굉필은 만류하지 않고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히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라고 종용해 왔던 제자가 김굉필이었던 것이다. 김굉필은 스승인 김종직이 왜 낙향하려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자인 연산군이 부왕 성종 앞에서 부왕이 애지중지하던 사향사슴을 발로 걷어차는 불경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김종직으로서는 미구에 불어 닥칠 재앙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김종직은 자신의 처소를 찾아온 김굉필에게 '앞으로 조정에는 천도(天道)가 무너질 것이다'라고 장탄식했던 것이다.
그런데 송별연장에 유자광(柳子光)이 느닷없이 나타남으로 해서 숙연한 가운데서도 정이 넘치는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유자광은 예종 때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무령군에 봉해진, 도학자들이 가장 경멸하는 소인배였던 것이다. 무령은 영광의 옛 이름으로 유자광의 선대가 살던 본향(本鄕)이었다.
김종직의 제자들 대부분이 돌아앉거나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래도 뱃심 좋은 유자광은 넉살좋게 정자 댓돌 밑에서 고개를 직각으로 숙였다.
"대감, 낙향하신다는 소문이 있어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조정에서 정사를 돌보셔야 할 대감께서 낙향하신다니 참으로 섭섭합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무령군 대감께서 걱정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설 때와 물러 설 때를 아는 것이 선비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늙어가니 병든 몸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조정에 경륜 있는 선비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것도 크나큰 문젭니다. 경험이 일천한 젊은 사람들이 의욕만 앞세워 일을 그르치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대감께서 중심을 바로잡아 주셔야 조정이 원만하게 굴러갈 것입니다."
▲ 김굉필 친필. ⓒ프레시안

"그렇지 않습니다. 이 늙은이가 없어도 명재상들이 많으니 조정은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무령군 대감께서 이 쓸모없는 늙은이를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대감이 없다면 전하께서는 더욱 쓸쓸해하실 것이 뻔합니다. 대감만큼 전하의 총애를 받은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대감께서는 조선 제일의 도덕이고 문장이시지 않습니까."
김종직은 유자광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 마셨다. 일찍이 함양군수 시절 학사루(學士樓)에 걸린, 경상도관찰사였던 유자광이 쓴 시판(詩板)을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어낸 일도 있었으므로 문득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과거에 얽혔던 사감을 털어버리고자 김종직은 흔쾌하게 술잔을 거푸 비웠다.
"칭병을 하시니 더 만류를 못하겠습니다만 건강해지시거든 다시 복직해주셔야 합니다. 대감이야말로 전하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당대 제일의 명류재상(名流宰相)이시니까요. 여러 선비님들, 아니 그렇습니까."
유자광은 좌중에서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자, 한강 나루터 쪽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종직이 정말로 형조판서를 사임하고 낙향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말을 타고 달려왔는데, 조정에 퍼진 소문이 사실인 것이었다. 유자광은 마음속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호)여, 나를 능멸한 그대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느니라. 뼛속 깊이 박힌 학사루의 수모를 내 어찌 잊을 것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유자광이 중얼거린 수모란 학사루에 걸린 자신의 시판을 함양의 백성들 앞에서 김종직이 떼어낸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유자광은 비로소 때가 온 것 같아 마음속으로 반기었다. 김종직이 권력으로부터 멀어져야 만 자신이 그 권력으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유자광의 두 눈은 출세의 욕망으로 붉게 충혈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지난 과거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스쳤다. 서자로 태어나 가출하여 경복궁의 건춘문 문지기가 되었다가 한명회(韓明澮)를 도와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권부에 한 발 더 다가섰고, 이시애의 반란이 나자 자원해서 남이 장군과 함께 전공을 세워 병조정랑이 되고 마침내 별시문과에도 장원급제를 하여 오늘의 그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정여창, 김굉필 등의 시선은 싸늘했다. 실제로 성격이 꼬장꼬장한 김일손의 입에서는 마시던 술을 뱉어내는 듯 퉤- 하는 소리가 났다. 문무가 출중하기는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남의 공을 가로채 짓밟는 권모술수에 능하고, 더구나 등 뒤에서 화살을 당기듯 고변(告變)을 일삼는 소인배인 것이었다.
유자광은 싸늘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먼저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
"볼 일이 있어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대신 술과 안주를 보낼 터이니 이 유자광이를 욕하지 마소서."
"퉤에-."
"유씨 가문에 똥칠할 놈일세 그려."
유자광이 말을 타고 사라진 쪽을 향해 김일손과 이목, 그리고 홍유손이 침을 뱉었다. 그중에서도 20대로서 나이가 가장 어린 이목의 조소는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이번뿐만 아니라 일전에도 그는 가뭄이 들었을 때 대비의 뜻을 좇아 성종에게 불교를 권하던 윤필상(尹弼商)을 두고 '윤필상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리게 되리라'고 독설을 뱉어냈던 것이다. 말없이 앉아 있던 남효온과 정여창도 씁쓸한지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 김굉필 위패. ⓒ프레시안

김종직의 예감은 적중했다. 연산군은 즉위식 날 잔인하게 사슴을 살생하더니 차츰 여자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했다. 일찍이 13살에 여자를 안 그는 왕이 된 20살에는 술과 사냥과 황음에 빠졌다. 승려들을 몰아낸 원각사는 황음의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 궁중놀이를 전담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설치하여 3000명의 기생을 두었는데, 후에 장악원은 계방원(繼芳院)으로 고쳐 부르게 했으며 임사홍 등을 채홍사로 삼아 팔도 고을의 반반한 여자들을 뽑아서 불러들이게 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선왕의 궁녀까지 음행하고 외명부의 예쁜 여자들까지 잔치에 끌어들여 간통하였다. 부끄러움이 없는 부인들은 궁중에 남아 있기를 원했고, 그 남편들은 부인들이 원하는 대로 벼슬을 승진시켜주었다.
윤순(尹珣)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미모가 빼어난 윤순의 아내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궁중을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윤순은 과거에 급제한 지 5년 만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던 것이다. 훗날 중종 때 사간원의 간원이 윤순을 두고 중종에게 다음과 같이 통박한 일이 있었다.
'윤순이 연산군에게 사랑을 입어 과거에 오른 지 5년 만에 자헌대부로 승진하였으며, 그 아내도 또한 연산군의 사랑을 입어 대궐에 드나들어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었으니 그때 사람들은 윤순이 자헌대부로 승진한 것은 계집을 판값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벼슬이 그대로이고 그 아내도 전처럼 대우하고 있으니 뭇 사람의 평판이 비루하게 여겨 비웃고 있습니다.'
조광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문정왕후를 책봉할 때 정언(正言)의 직책으로 '음탕하고 더러운 물건이 혹시 대례(大禮)에 참예될까 염려되니 성 밖으로 내쫓아버리고 성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고 진언하니 중종이 허락했던 것이다. 음탕하고 더러운 물건이란 윤순의 부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연산군의 음탕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백부인 월산대군의 후실인 박씨(박원종의 누이)를, 세자를 보호하라는 명목으로 궁중에 불러들여 강간하고는 비빈(妃嬪)과 같이 관(冠)과 의복을 주었는데, 궁 밖으로 나온 박씨는 부끄러워하며 자살해버렸고, 박원종은 자다가도 벌떡 이러나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것이다.
생원 황윤헌(黃允獻)의 최보비(崔寶非)라는 첩도 절세가인으로 소문이 났는데, 채홍사 구수영(具壽永)이 빼앗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그런데 그녀는 성질이 사납고 괴팍하여 말하고 웃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연산군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했다. 연산군은 남편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황윤헌을 붙잡아 죽여 버렸다. 영남에서 잡혀온 옥지화(玉池花)라는 유부녀의 남편도 황윤헌처럼 목숨을 잃었다. 연산군에게 별 생각 없이 순진하게 '간밤에 남편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는데, 며칠 뒤 연산군은 그 남편의 목을 소반 위에 올려놓고 '네가 이 얼굴을 보고 싶어 꿈을 꾸었을 게야' 하고 큰 소리로 웃어젖혀 옥지화는 그 자리에서 실성해 버렸음이었다.
채홍사들은 한 여자를 두고 다투어 빼앗아 연산군에게 올리기도 했다. 가야금을 잘 타는 최유회(崔有淮)의 딸이 그랬다. 정승 한치형이 끌어다 비(婢)를 만들고 그녀와 관계했다. 뒤에 여자를 뽑아 올릴 적에 채홍사 임숭재와 신항이 다투어 이 여자를 추천했는데, 이때 구수영이 가로채 궁중에 바치니 연산군이 매우 사랑하여 숙의(淑儀)로 봉하였던 것이다. 연산군은 기생이나 아녀자만 상대하여 황음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비구니를 상대로 음행을 저지른 일도 있었다. 그가 자하문 밖으로 산행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비구니 도량인 정업원(淨業院)에 들러 정진중인 비구니들을 모두 홀랑 벗겨놓고 온갖 패란(悖亂)을 저질렀던바, 이 비극은 요부 장녹수가 연산군의 침전(寢殿)을 차지하면서 궁중을 어지럽히기 이전의 일이었다.

김굉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인륜(人倫)의 절멸(絶滅)이로다. 이 일을 어이 할꼬. 아, 천도가 무너진 이 땅에서 내 할 일이 무엇인고.'
김굉필은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워 곧 무너져버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단전 아래에 힘이 남아 있음이 느껴졌다. 문득 소달구지를 타고 내려오면서 보았던 수려한 전라도 산하가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실개울은 천(川)이 되고 수십 줄기의 천은 강이 되어 바다를 향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산 또한 수십 개의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어우러져 부드러운 산맥을 이루면서 마침내는 사람 사는 저잣거리로 달려오고 있음이었다.
'그렇다. 내 할 일이란 비록 유배지이긴 하지만 제자를 기르는 것이다. 도학이 내를 이루고 천을 이루고 강을 이루게 하여 드넓은 땅을 적시며 바다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늘의 도가 넘쳐나는 군자의 나라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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