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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알타이 사람'을 만나다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37〉

유스띄트 발굴터 답사

9시 아침 해가 뜨니 온도가 바로 31℃로 올라간다. 그러나 겨울에 입은 셔츠, 바지, 양말을 그대로 신고 탐사를 계속한다. 바람이 선선해서 큰 더위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밥을 먹고 9시 20분 출발, 우리는 먼저 어제 저녁 잠시 들렀던 카자흐인의 유르타에 가서 양털 깎는 장면을 구경했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작업을 하고 있는데 말이 깎는 것이지 거의 한 껍데기를 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털 깎는 것을 처음 보아서인지 양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들은 아주 능숙하게 그리고 즐겁게 일하고 있다.

유르타 옆에는 여름 내내 온 힘을 다해 모은 '키작'이라는'쇠똥 장작'이 쌓여 있다. 유르타가 차지한 면적보다 몇 배 큰 땅에 납작하게 말린 가축의 똥을 모아 놓는데 그 양이 엄청나게 많다. 이렇게 만든 키작은 여름이 지나고 유르타을 철수할 때 집으로 가지고 가 겨울을 보내게 된다고 한다. 이 집에서 모은 키작은 한두 집에서 쓰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쇠똥 장작'은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을에 가지고 가면 1㎏에 15루블(0.5$)이라니 이것도 사업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유르타를 떠나 꾸바레프 박사가 발굴한 꾸르간(2176m, N49°47'708", E89°19'976")으로 갔다. 오늘 오전에는 어제 산에서 조감해서 바라본 꾸르간 가운데 꾸바레프 박사가 직접 발굴한 곳을 몇 군데 직접 찾아가 확인하고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첫 번째 찾아간 곳은 앞에서 본 4지역 꾸르간(유스띄트-Ⅰ 무덤떼)으로 유스띄트 평원에서 가장 먼저 발굴한 꾸르간이다. 빠지릭시대의 꾸르간인데 발굴해보니 이미 도굴 당한 무덤이었다고 한다. 꾸바레프 박사가 준 발굴보고서를 찾아보니 거의 빈 무덤을 팠던 것을 알 수 있다. 시작은 정말 황당했던 것이다.

두 번째 발굴한 곳도 빠지릭시대 무덤인데 대형 꾸르간이 이어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작은 선돌이 하나 서 있다. 원래 청동기시대 유물인데 빠지릭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꾸르간으로 가져다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세 번째 찾아간 꾸르간에도 선돌이 하나 서 있다. 이 구르간은 5명이 한 달 만에 모두 발굴한 곳이라고 한다.

"이 돌은 발굴하는 학생들이 가져다 세워놓은 것이다. 그런데 양이 와서 이 돌을 무너뜨리며 그만 양이 깔려 죽어버렸다."

꾸바레프 교수는 발굴할 때 생겼던 에피소드를 얘기 하면서 당시는 참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발굴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현지 알타이 원주민들과의 원만한 관계이다. 얼마 뒤 쫒아온 알타이 아주머니가 현장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죽였으니 당신들이 먹으시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발굴 팀은 이 기상천외한 요구에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덕분에 영양보충을 잘 한 학생들이 다음날 발굴단장인 꾸바레프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이 선돌 다시 세워놓을까요?"

발굴한 곳마다 40년간 자기 집처럼 살아 왔기 때문에 어느 한 곳 꾸비레프 교수의 추억이 남아 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우리는 역시 최고의 권위자를 모시고 최상의 답사를 하고 있었다.

어제 처음 도착하여 감동에 빠졌던 께렉수르에 도착하여 1시간이 넘게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든 괜찮은 사진을 한 장 찍기 위해서다. 망원 렌즈와 광각 렌즈를 모두 동원했으나 결국 만족할만한 사진을 얻지 못했다. 먼저 북쪽에 있는 산에 올라가 300㎜ 렌즈로 찍었으나 산이 높지 않아 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다시 가까이 가서 최대 너비를 찍을 수 있는 14㎜ 광각 렌즈를 가지고도 어려워 유리 할아버지의 짐차에 올라가고 학생들이 나를 받치고 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역시 큰 소득이 없었다. 방법은 단 한 가지 헬기에서 공중 촬영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는 "해보니 안 되더라"는 말만 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다음에 반드시 헬기를 타고 와서 이 신비한 께렉수르를 사진에 제대로 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

바르부르가즤 강가의 알타이인

께렉수르를 떠나 북북서로 산길을 하나 넘자 바로 바르부르가즤강 계곡이 나온다. 좁은 계곡을 흐르는 강가에는 푸른 목초지가 형성되어 있어 목축하기 알맞을 곳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1시 30분 우리는 알타이인의 유르타(2034m, N49°50'053", E89°11'790")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알타이인과 1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생활을 알아보았다.

주인장은 읍내에 가고 없고 안주인과 큰 딸만 있다. 마침 딸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치즈를 만들고 있어 비디오로 촬영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딸이 너무 부끄러움을 타서 완벽한 과정을 찍지 못했다. 치즈를 만드는 방법은 먼저 우유를 끓이는데 우유가 솥에 눌어붙지 않도록 쉬지 않고 저어 주어야 한다. 끓여진 우유는 매달아 놓은 가죽부대에 퍼부어 물기를 빼고 말리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었다. 조금 있으니 12~13세쯤으로 보이는 아들이 강가에 가서 물을 떠서 지게에 지고 온다. 이 작은 청년도 부끄러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목축을 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을 치는 일은 물론 치즈 만들고 물 떠오고, 또 키작(쇠똥 장작)을 낟가리처럼 쌓아올리는 것도 그들의 일이다.

꾸바레프 교수가 이곳에 올 때마다 반드시 들르는 집인 것 같았다. 꾸바레프 교수는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주인아주머니께 전해 주었고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우리 모두를 유르타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유르타 안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했다. 가운데에는 항상 난로가 자리하고 있고 한쪽에 침대와 부엌 기구, 탁자들이 놓여 있는 식이었다. 꾸바레프 교수는 이 사람들이 알타이어를 사용하는 진짜 알타이인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현재 집에서 살 때는 모두 알타이어만 사용한다고 한다. 알타이인이 말하는 알타이어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나는 녹화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몇 마디 쉬운 말을 시켜보았다. 어머니가 옆에서 많이 독려를 했지만 너무 부끄러워해서 만족할만한 데이터는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알타이어를 접할 수 있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비안(감사합니다)."

"아다(아버지)."

"에네(어머니)."

모두 다 생소한 단어들이다. 카자흐 말에서는 아버지를 "아빠"라고 해서 비슷한 발음을 발견했으나 여기서는 그런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넉넉하게 생긴 주인아주머니는 있는 것 없는 것 내놓으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가이막(버터 같은 것), 스르치크(치즈), 쿠릇트(가루로 된 것) 같은 전통음식과 차에 빵을 곁들인 것이지만 여기서는 이 이상을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가 "알타이인들은 손님이 서서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는 편하게 앉아서 알타이를 즐겼다. .

수줍어하던 아들이 '쑤록'을 보여 주었다. 자기가 어제 잡아온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찍으려 했으나 실패한 쑤록을 알타이인 소년이 덫을 놓아 잡아온 것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여름 동안 이 소년의 주된 일은 바로 쑤록을 잡는 일이다. 상당히 영양가가 높은 고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9~10월에는 가죽을 만들기 위해 잡는데 주로 털신이나 모자를 만드는 데에 아주 유용하다고 한다.
▲ (좌)알타이인의 유르타에서 (우)알타이인 가족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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