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바레프 교수는 알타이 제사 터 돌판에 새겨진 뚜르크시대 바위그림의 형식과 장르가 고구려 수렵도와 비슷하다는 주장을 폈다.
"특히 통구현의 춤무덤 벽화에 보이는 사냥하는 그림과 비슷하다. 호랑이와 사슴의 사실적인 모습과 3명의 활을 든 사냥꾼이 그 뒤를 쫒는 배치를 보여준다. 이 장면은 귀족계급들의 삶 가운데 하나로 당시의 직업과 취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그림은 고대 이란의 사산왕조 예술품과 그 배경이 비슷하며, 중국의 시안포동 동굴사원의 그림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사한 것은 알타이 절벽에 새겨진 바위그림의 많은 양식과 제사터의 돌판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아한 사슴 모습이 아주 비슷한데, 사슴 양식과 제작기술은 알타이 바위그림과 아주 많이 닮았다."
고구려 춤무덤 벽화에 나오는 그림은 5세기 초에 그린 것이고 알타이 뚜르크시대는 6~8세기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시대적으로 몇 백 년 앞선다. 물론 물감으로 회벽 위에 그리는 것과 돌 위에 새기는 것과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미술사적 완성도로 보면 고구려 벽화가 훨씬 앞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와 뚜르크시대 사이라고 볼 수 있는 돈황석굴의 사냥하는 그림도 비교의 대상이 된다. 6세기 중엽의 중국 돈황 석굴 259호 벽화에 그려진 사냥하는 그림은 분명히 고구려의 것과 같은 체계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사냥그림을 보면, 속도감과 긴장감이 가득 한 사냥터 맨 위쪽에는 백마를 타고 달리며 윗몸만 뒤로 돌린 채 암수 두 마리의 사슴을 향해 화살을 쏘는 힘찬 무사의 늘름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중앙에는 검은 말을 탄 무사가 달아나는 호랑이를 향해 막 시위를 당기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고, 뒤따라오는 다른 무사와 사냥개가 함께 달리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맨 아래쪽에도 두 무사가 사슴과 토끼를 쫒고 있는데 현재 토끼는 아쉽게도 떨어져 나가 확인할 수 없다. 고구려가 망한 7세기 많은 고구려인들이 돌궐, 즉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뚜르크로 넘어간 것은 역사책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혹시 고구려 화공들이 알타이까지 와서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며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깐 잠겨본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도시 냄새 - 코쉬-아가치
아주 인상 깊은 돌사람과의 만남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말 하루쯤 이곳에서 야영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 계곡을 빠져나와 국경수비대 초소에 도착하니 4시 10분이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추야스텝을 최고 속도로 달린다. 큰 대머리독수리가 무리를 지어 있고 가끔 나타나는 호수에는 많은 물새들이 노닐고 있다.
1시간 뒤인 5시 10분, 우리 일행은 일주일이 넘어 처음으로 코쉬-아가치(kosh-agach)라는 도시에 들어선다. 코쉬는 '주머니'라는 뜻이고 아가치는 '장작'이라는 뜻이니 마을 이름은 '장작 주머니'라는 색다른 이름이 되는 것이다. 이정표에는 국경에서 68km라고 되어 있으니 국경에서 아주 가까운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도인 고르노-알타이스크에서 471km 지점에 있다. 코쉬-아가취라이온의 중심도시이고 알타이공화국 남부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4500명이다. 이곳을 방문하려면 누구나 통행증이 필요한데, 통행증은 고르노-알타이스크와 악타쉬에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통행증 없이 다닐 수 있는 것을 보면 요즈음은 통행증 검사가 그렇게 심하지 않는 모양이다.
코쉬-아가치(1756m, n49°58'673", e88°41'131")는 1820~1840년 19세기에 러시아 상인에 의해 세워졌다. 코쉬-아가치는 남 고르노 알타이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기 때문에 마을 역사는 알타이와 몽골 문화와 경제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이 마을은 몽골과 중국으로 가는 상품이 모이는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코쉬-아가치는 넓은 추야스텝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알타이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드는 곳이다. 주민의 구성은 카자흐인(50%), 알타이인(거의 50%)이고 러시아인은 살지 않는다. 마을에는 1층 집들과 중국 상품을 파는 작은 시장, 문화 센터, 주유소, 비행장이 있는데 실제 운행되는 비행기는 없다.
우리는 그동안 식량이 떨어져 군인들로부터 빵을 얻어 먹을 정도였는데 오랜만에 보급품을 조달한다. 사과, 오렌지, 오이를 사고 내가 특별히 수박을 두 덩이 샀다. 빵, 통조림, 그리고 화동이를 위해 사이다 큰 병으로 3병, 오랜만에 아이스크림까지 사먹는다. 전화국에 가서 집 떠난 지 10일 만에 처음으로 전화를 한다. 셋이서 전화하는데 1시간이 더 걸리니 이쪽 전화사정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요금도 1분에 45루블이면 비싼 편이다. 마침 건전지가 다 떨어져 다른 가게에 들르게 되었다. 그런데 대우 상표가 붙어 있는 건전지가 눈에 띠었다. 대우에서 언제 건전지까지 만들었나? 모두 놀란 눈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닥의 이름을 빌려온 듯한 코독(kodok) 건전지까지 팔고 있었다. 건전지가 필요했고 가짜 상표 건전지가 유행하는 것이 신기해서 모두 하나씩 구입했다. 그런데 gps에 넣어 사용을 했더니 채 3분이 가지 않았다. 이름에서부터 냄새가 나더니 역시 이름값을 단단히 했다.
도시는 라이온의 행정 중심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도시 형편에 걸맞지 않게 크고 잘 지은 중학교와 라이온 청사를 빼놓고는 대부분의 집들이 수 십 년 전에 지은 낡은 집뿐이다. 러시아에서 사업하고 있는 한 중국 동포가"러시아는 90%가 몇 십 년 전에 지은 낡은 집이고, 중국은 90%가 새로 지은 집이다"라고 한 말이 실감난다. 한가한 거리에 사람들이 많지 않아 다니는 사람들도 그다지 활기차 보이지 않는다. 허름한 여관 같은 호텔이 하나 있는데 꾸바레프 박사가 "벌레 나온다"고 한다. 호텔에서 자려면 행정기관이나 관광회사의 요청이 있어야 가능한 면도 있지만 실제 텐트에서 자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주유소에 기름이 없어 여러 군데 다녀 간신히 기름을 넣을 수 있었다. 시내 여관 앞과 주유소에서 본 벤츠 차량은 황량한 주변 경치에 비해 너무 이질적이다. '아마 다른 데서 온 차량이거나 마피아 것이겠지!'
6시 40분 우리는 다시 초원으로 돌아간다. 코쉬-아가치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잘긔즈-또베(jalgyz tobe)라는 나지막한 산기슭에 도착하여 야영 준비를 한다. '또베'는 계곡이라는 말이니 이곳은 '잘긔즈 계곡(1857m, n49°52'310", e88°41'140")'이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다시 모기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어제 캠프장에서도 수없이 되뇌었지만 역시 "꾸르간 옆에는 모기가 많다"는 말이 다시 실감나는 시간이다. 이곳에 꾸르간도 있지만 바로 옛날 목장이었던 곳이기 때문에 모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9 시쯤 저녁밥을 먹는데 오늘은 메뉴가 바뀌었다. 감자국에 오늘 산 야채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가 곁들여졌다. 밥 먹고 나서 모기를 피하기 위해 뒷산을 올라가 바위그림을 찾았다.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확인을 해 보지 못했지만 바위 면 곳곳에서 쉽게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봐서 이곳도 꽤 많은 바위그림이 있을 듯 보였다.
넓은 추야스텝 건너 아득히 보이는 산맥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깊어가는 고원의 저녁을 즐기고 싶은데, 이런 분위기를 완전히 깨는 모기특공대들은 어찌 할 수가 없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유리 할아버지가 모깃불을 피우며 "이것이 내 방식이다"며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짓는다. 유리 할아버지 방식은 바로 소똥을 주어다 불을 피우는 것인데 냄새가 그다지 향기롭지 않는 데도 할아버지의 모깃불은 계속된다. 이리나가 묻는다. "이 불 위에다 고기를 구울 수 있는 것인가?" 마치 선문답 같은 화두를 던지는 이리나의 여유가 오히려 한 수 위다. 이런 날은 일찍 들어가 자는 것이 상책이다. 덕분에 일찍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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