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돌무지)는 제사터인가?
뚜르크인들은 제사를 마치고 죽은 이의 넋을 해방시키기 위해 돌사람을 부수거나 파묻었다고 한다. 현재 돌사람의 머리가 많이 깨져 있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초원에 서 있는 돌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뚜르크인들의 적들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이슬람인들이 유목민족의 세계로 스며들면서 생긴 것이라고 본다. 어떤 연구자는 뚜르크인들이 돌사람의 째려보는 눈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 돌사람이 사람이나 가축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돌사람의 머리를 부순다거나 완전히 없애거나 땅속에 묻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신을 믿는 주민들은 돌사람을 무서워하였으며 돌사람은 언제나 신비한 존재였다. 그런 그들이 일부러 돌사람을 깨뜨리는 사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꾸바레프 교수에 따르면 알타이에서 여러 가지 발굴을 할 때, 발굴이 끝나면 알타이인들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복구시켜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 알타이 주민들은 돌사람을 일부러 낮추어 부르는데 그것도 사실은 공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알타이인들의 경외심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작은 돌무지인 오보(obo)를 세운다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예는 알타이의 꾸라이 평원이나 악-따쉬 같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오보의 원형이 제사유적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제사가 끝나면 타고 남은 터에 돌을 쌓는 것이 마지막 순서이다. 그 순간부터 제사 터는 잊히거나 성스러운 장소로 남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오보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특히 높은 곳에 있는 길옆이나 깊은 오지에 있는 돌무지 오보는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알타이 곳곳에는 오보가 있고 이런 오보에는 여행객들이 제물을 바치게 되어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하얀 헝겊조각(까이라, kayra)이나 깨끗하고 하얀 돌이다. 이런 것은 흰색 모가 난 돌이 제사유적에서 많이 나타난 것과도 관련이 깊은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는 "오보의 전통은 옛날 뚜르크인들의 제사의식에서 생겨난 것 같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오보나 까이라는 알타이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전역에 퍼져 있기 때문에 그 원류가 뚜르크의 제사 터에서 왔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 58) 길 가에 만들어진 오보
작은 선돌(balbal)은 말 매는 말뚝인가, 적을 죽인 숫자를 뜻하는가?
제사 터에는 돌사람이 바라보는 동쪽을 향해 '발발(balbal)'이라고 부르는 작은 선돌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에게 이 선돌의 행렬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다른 어떤 시설보다 신비한 감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처럼 돌을 세워놓았을까? 이 문제는 나 이전에 이미 다른 학자들도 많이 고민했던 문제이고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다.
지금까지 나온 학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뚜르크인들이 죽인 적들의 숫자만큼 작은 선돌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은 중국의 사서에 나온 뚜르크의 매장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돌 하나를 세우는데, 100개를 넘어 1000개까지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뚜르크의 제사 터에서 실제 수 십 개 또는 100개가 넘는 선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와 같은 통설에 대해 현장에서 많은 선돌을 직접 접한 꾸바레프 교수는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아 이채롭다. 현장을 다니던 꾸바레프 교수는 통설에 대해 몇 가지 강한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먼저 돌사람이 모두 전사들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꾸바레프 교수는 현장에서 돌사람이 칼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군인과 일반인으로 나누어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통설은 부인된다. 왜냐하면 군인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대부분의 돌사람 앞에는 선돌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꾸바레프 교수는 뚜르크 이전의 초기 유목민의 꾸르간에도 이런 시설물이 있다는 데 주목한다. 초기 유목민이란 알타이의 스키타이시대인 b.c 6세기~2세기 빠지릭시대를 말한다. 초기 유목민 시대의 선돌은 꾸르간의 동쪽에 서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아울러 꾸르간 자체도 북에서 남으로 여러 개가 체인처럼 이어지는 것도 비슷한 원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는 저명한 고고학자 루덴꼬(s. n. rudenko)의 주장을 끌어드린다. 루덴코는 무덤 근처에 놓인 돌은 장례나 기념식에 참여한 사람들과 친척의 수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한편 여성이나 아이들의 무덤에도 이런 선돌이 있다는 것을 그 선돌이 적을 죽인 숫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실제로 알타이의 울란드릐끄나 지금 우리가 와 있는 바르부르가즤의 여성과 아이의 무덤에서 동쪽 방향으로 서 있는 작은 선돌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키타이시대, 다시 말해 알타이의 빠지릭시대 꾸르간에 세워진 작은 선돌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꾸바레프 교수의 주장을 결론부터 말하면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죽은 이의 친척이나 손님들이 타고 온 말을 매는 돌 말뚝이었다는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는 우선 꾸르간에 세워진 작은 선돌과 실제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집 가까운 곳에 세워진 말의 말뚝이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유목민들의 집 가까이 세우는 말말뚝은 일반적으로 동쪽이나 남쪽에 세우는데, 이런 풍습은 지금도 몽골과 카자흐스탄에 남아 있으며, 유적에 서 있는 선돌을 그대로 말을 매는 말뚝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유목민의 습속에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야쿠트 민족지에 나온다고 한다. 첫 번째 말뚝은 존경하는 손님의 말을 매는 최고 말뚝(또이오 세르게 = 귀인의 말뚝)이고, 두 번째 말뚝은 중간 정도의 손을 위한 것이며(오르뜨 세르게 = 중간 말뚝), 세 번째는 하층민을 위한 것(켈린 세르게 = 뒤 발뚝)이라고 하는데 가장 멀리 있는 말뚝은 '아따흐 세르게'라는 이름이 붙는다고 한다. 빠지릭 꾸르간이나 뚜르크의 제사 터에 서 있는 많은 선돌 가운데서도 1개 또는 2~3개의 말뚝이 다른 것에 비해 뚜렷하게 큰 것이 나타난 것은 같은 이유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적군을 죽인 숫자인가, 아니면 말을 매는 말뚝인가? 적군의 숫자일 수 있고, 그런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행사를 하는 당일에는 말을 매는 말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결국 논의에서 끝날 수밖에 없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 모든 수수께끼를 다 알고 있을 돌사람은 오늘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입 다물고 인간들의 논의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학자들의 논의는 끝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은 어떤 것이요?"라고 물으면 내 개인적인 솔직한 정답은 "모른다"이다. 나는 무엇을 알아내려고 60년간 그렇게 노력하며 살았는데, 60이 넘어서야 "모른다"라는 솔직한 답을 알고 나서부터는 삶이 많이 편안해졌다.
각 박물관에 소장된 돌사람들
그림 59) 연구소
그림 60) 비스크
그림 61) 비스크
그림 62) 비스크
그림 63) 비스크
그림 64) 비스크
그림 65) 비스크
그림 66) 바르나울
그림 67) 바르나울
그림 68) 바르나울
그림 69) 바르나울
그림 70) 바르나울
그림 71) 고르노 알타이
그림 72) 고르노 알타이
그림 73) 고르노 알타이
그림 74) 크라스노야르스크
그림 75) 톰스크 대학
그림 76) 옴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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