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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대 알타이' 유적의 주인은 누구인가?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26〉돌사람들

***고대 알타이의 주인, 돌사람**

구석기 시대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은 이미 많이 지나 12시가 다 되어 간다. 얼마 안 가 오늘 우리가 목표로 하고 있는 차간-부르가즤강이 나타난다. 제법 큰 강이지만 거의 말라 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강가 여기저기에 15기쯤 되는 꾸르간들이 널려 있어(2052m, N49°45'195", E88°38'413'") 간단히 사진만 찍고, 여기서부터는 남쪽으로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서 제법 큰 계곡에 들어서며 계곡물도 많이 흐르고, 물이 흐르는 강가에는 풀들이 많이 자라 이곳저곳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다. 12시 30분 우리는 국경수비대 초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1시간 이상의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이곳 꼬쉬-아가치 라이온은 원래 국경지역이기 때문에 출발할 때 반드시 신고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대의 본부가 있는 악-따쉬의 허가가 나와야지만 이곳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본부의 허가가 날 때까지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간단히 낮밥을 먹었다. 초소 근처에도 어김없이 꾸르간들이 여러 기 흩어져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돌로 만든 고대 유적들이 널려 있는 것이다. 강가에는 유르타가 있고 많은 가축들이 방목되고 있다.

오후 1시 50분이 되어서야 허가가 나서 본격적인 오후 답사가 시작되었다. 역시 꾸바레프 교수의 명성과 현직 신분 때문에 답사가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앞을 가로막는 높은 설산을 넘으면 바로 몽골이라고 한다. 올라가며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두서너 군데 유목하는 알타이인들이 사는 집들이 있는데 모두 쇠똥들을 모아 겨울철 연료를 잔뜩 준비해놓고 있다. 강가로 난 산길을 30분쯤 계속 올라가 왼쪽 강 건너에 유르타와 많은 염소들이 있는 목장이 있는 지점에서 꾸바레프 교수가 갑자기 찻길을 벗어나 경사도가 심한 산 위로 차를 몰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얼마 뒤 우리는 나무 하나 없는 평평한 고원에 올라 서 있다.

고원을 한 참 달리더니 한 유적 앞에 차를 멈춘다. 제사터(2227m, N49°39'191", E88°42'203")가 있는 곳이다. 꾸바레프 교수는 제사터에 다가가더니 한 바위덩이를 일으켜 세우는데 보니 아주 잘 생긴 고대 돌사람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 제사터 말고 멀리 꾸르간과 선돌들이 띄엄띄엄 서있는 것이 보인다. 옛날 이 높은 고원은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원에 널린 여러 유적 가운데 가장 압권은 역시 제사터에 세워진 돌사람이다. 이처럼 완전한 돌사람은 이번 답사에서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차간-부르가즤에는 모두 8점의 돌사람이 있었는데 5점은 이미 박물관 등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3점만이 남아 있다. 1m 가량의 높이에 짙은 눈썹과 콧수염을 한 얼굴을 하고 있고, 오른손에는 잔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띠를 잡고 있었다. 보통 칼을 가지고 있으면 6세기 이전의 것이고, 칼이 없으면 그 이후의 것이라고 하였다. 꾸바레프 교수는 차간-부르가즤의 석인상은 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군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석인상 바로 뒤쪽에는 너비 1.5m 정도의 바른네모꼴로 돌덩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꾸바레프 교수가 직접 발굴했던 곳이라고 한다. 발굴 당시 이곳에서는 사람의 주검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꾸르간이 아닌 다른 시설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꾸르간은 다른 곳에 있고 이곳은 죽은 이의 영혼이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네 모서리에서는 나무가 발견되었는데 나무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여기에 작은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돌사람은 그 집 앞에서 항상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네모난 제단 북쪽 변 안쪽에서 돌사람이 오른손에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은잔이 발견되었고 동물 뼈와 숯이 남아 있는 화로도 나왔다. 한 가운데는 나무막대기가 서 있었는데 꼭대기에 말머리가 걸려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곳은 꾸르간에 온 사람들이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제사 지냈던 곳이라고 볼 수 있다.

나머지 2점의 석인상은 높이가 50cm 정도로 크기가 작았고 얼굴도 마모되어 형태가 알 수 없었다. 석인상 외에도 10기 남짓한 꾸르간과 선돌들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선돌들은 스키타이 시기의 경계석 내지 표지석이라고 한다.

〈그림 56)〉 차간브르가즤 가는길 : 161-꼬꼬조끄, 164-따르하뜨강, 165-꾸르간 5기, 167-구석기유적, 168-꾸르간 약 15기, 169-국경수비대 초소, 172-돌사람 유적

***뚜르크 전사와 귀족들의 제사터**

알타이의 한적한 산간 초원지대에는 많은 돌사람들이 천년 역사를 간직한 채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 돌사람 무리는 청동기시대 돌사람, 스키타이시대 돌사람, 뚜르크시대 돌사람, 그리고 남부 러시아 초원지대의 킵차크-뽈로베츠 돌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무리는 역시 뚜르크의 돌사람(7~9세기)이며, 이런 뚜르크의 돌사람은 알타이뿐 아니라 몽골, 뚜바, 중국 신강성, 카자흐스탄, 키르기즈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넓은 초원과 산악지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주로 꾸바레프의『알타이의 제사유적』을 참고한다).

최근 알타이에서는 300기가 넘는 뚜르크 돌사람이 수집되어 그 기원과 의미를 설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뚜르크 시대의 돌사람들은 대부분 넓은 얼굴에 사팔뜨기 눈, 귀와 수염을 기른 모습을 한 황인종(몽골로이드) 얼굴을 가진 남성 윗몸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어떤 돌사람은 귀걸이를 하고 어깨에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목걸이를 한 것도 있다. 많은 돌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습들이다, 가슴 부분이 접혀 있는, 옷깃이 넓은 두루마기나 옷자락이 긴 외투, 소맷동이 있는 좁거나 넓은 소매 같은 다양한 옷이 조각되어 있다. 좁은 허리띠는 금속판으로 엮어져 있으며, 허리띠에는 단검이나 칼집에 들어 있는 칼이 매달려 있으며, 쌈지주머니, 숫돌, 그밖의 여러 가지 물건들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거의 모든 돌사람은 오른손에 그릇을 쥐고 있고, 왼손은 칼이나 허리띠에 놓여 있다. 뚜르크인들은 돌사람을 만들 때 반 이상은 이미 만들기 전 어느 정도 사람의 모습을 띄고 있는 특별한 돌멩이를 골라 썼다.

뚜르크 돌사람의 기원과 발전에 관하여 꾸바레프 교수는 "소그드인들의 불교예술에서 왔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불상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초기 불상의 특징은 머리에 관을 쓰고, 귀금속으로 목걸이, 귀걸이, 팔찌, '큰 칼을 차는 허리띠', 손에 물병이나 연꽃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불상은 존귀함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모든 뚜르크 돌사람에게도 대체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강조한다. 다만 "그 기원을 불상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샤머니즘의 영향도 모두 받았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뚜르크의 석상은 강력한 적을 무찌른 무사라는 설과 제사 터의 주인인 뚜르크 귀족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사실 이 점은 두 가지 모두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칼을 가지고 있는 돌사람은 무사이고 칼을 갖지 않은 돌사람은 귀족이라고 보면 되기 때문이다.

뚜르크의 돌사람은 대부분 일정한 형식을 가진 제사터 앞에 서 있다. 이 제사터는 앞에서 실례를 보았듯이 평면이 네모이고 널돌을 세워 에워쌓았다. 제사터 안에는 빙퇴석(빙하에 밀려 하류에 쌓인 돌무더기)이나 강자갈을 깔았다. 이런 제사터를 발굴해 보면 말이나 양의 뼈가 많이 나오고, 쇠로 만든 칼, 말갖춤과 무기, 그릇과 갈돌 같은 것들이 많이 나타난다. 모두 전통 의식에서 쓰인 것들이다.

꾸바레프 교수가 자신이 발굴한 결과와 전설을 종합하여 복원한 제사는 이렇다. 제사터 중앙에 넓은잎나무(활엽수)를 심고 제사에 바칠 말과 양을 준비한다. 이것은 죽은 영혼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제사에 찾아온 친척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제사터 남쪽이나 북쪽에서 모닥불을 피웠고, 모닥불에서 나온 뜨거운 숯덩이를 제사 터로 옮겨 나무 아래 모닥불을 지피고 제물을 죽은 영혼에게 바쳤다. 옛날 사람들은 죽은 영혼이 넓은잎나무에 살면서 나무 밑 모닥불에 던져진 음식물이 익으며 나오는 연기를 먹는다고 보았다. 뚜르크계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탁 트인 지역에 홀로 서 있는 나무에는 죽은 이의 넋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죽은 넋은 제사를 지낼 때 모르는 가운데 새로 변해 나타난다"는 생각이 시베리아 전역에 퍼져 있다. 그리고 그 새는 의식이 끝나고 나면 다시 조상들이 살고 있는 저승으로 날아간다고 보았다.

첫 제사 마지막에는 제물로 바친 말(또는 말꼴을 한 모형)의 머리와 가죽을 나뭇가지에 걸거나 특수한 막대기 위에 걸었다. 그리고 제사터 나무 밑 화덕은 널돌과 돌멩이로 덮었다. 마지막 제사가 끝날 즈음 죽은 이를 위해 세웠던 집은 불태웠다. 돌사람은 사자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부셔야만 했다. 그리고 타고 남은 돌 기초 위에 다시 돌들을 쌓았다. 이러한 뚜르크인들의 제사의식 바탕에는 샤머니즘의 특징이 짙게 깔려 있어 뚜르크인들의 의식은 시베리아 사람들의 의식과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이 희귀한 돌사람과 제사 터가 경지정리 하는 트랙터로 파괴되거나 건축 재료로 쓰이기도 하는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대부분의 돌사람이 학교 박물관이나 지역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한편 이 돌사람이 현지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돌할머니"로 불린다고 한다. 우리나라 제주도에 "돌하루방(돌할아버지)"이 있는데 알타이에는 "돌할망"이 있었던 것이다. 남자 돌사람이 여자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1~13세기 남쪽 러시아를 지배했던 뽈로베츠(Polobets) 사람들이 만든 돌사람에서 비롯되었다. 뽈로베츠 돌사람이 많이 남아 있는 초원지대로 이주한 러시아 사람들이 초원에 서 있는 돌사람의 생김새을 보고 "돌할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실제 뽈로베츠 사람들은 자기 종족의 조상이나 어머니로 볼 수 있는 여성상을 많이 조각했다고 한다. 그 뒤 무사나 귀족을 만든 뚜르크의 남자 돌사람도 습관대로 "돌할머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림 57) 제사를 지내는 알타이의 뚜르크인들(『알타이의 제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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