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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피해 가족들이 사형제 폐지운동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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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피해 가족들이 사형제 폐지운동을 한다고?

[화제의 책] 레이첼 킹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

얼마 전 서울 용산초등학교 학생의 살해범에게 법원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지난 13일 서울서부지법 제11형사부는 초등학생 허모(11) 양을 성추행하려다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모(53) 씨에게 무기징역을, 사체 유기를 도운 아들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허 양의 부모와 친척들은 이런 판결에 거세게 반발했다. 허 양의 아버지는 재판부를 향해 "우리 딸이 살았다면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는 것 아니냐, 저 사람 때문에 10년밖에 못 살고 죽었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는 "재판장의 자식이 이런 일이 당했더라도 무기징역밖에 안 내리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비록 모자이크 처리를 통해 얼굴은 가려졌지만 이들의 모습은 방송을 통해 생생히 전달됐다. 흐느끼며 울부짖고 거세게 항의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열한 살 난 딸을 잃은 가족의 슬픔과 분노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건이 일어난 날 이후 하루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가족들의 고통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내가 만일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레이첼 킹 지음, 황근하 옮김, 샨티 펴냄)는 살인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로서 이같은 고통과 분노를 이겨내고 가해자를 용서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데까지 이른 열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의 저자인 레이첼 킹은 세밀한 필치로 이들의 가족이 살인자에 의해 얼마나 끔찍하게 죽어갔는지, 가족이 살해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을 겪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고 어떻게 살인범을 용서하고 사형제 폐지운동에까지 나서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한다.

1976년 가정주부 마리에타 재거는 가족캠핑 도중 일곱 살 난 막내딸이 유괴당하는 일을 당한다. 유괴범과 연락도 닿지 않고 딸의 종적도 찾을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 재거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괴범과 한 마디만 하고 싶다고 말한다.

딸이 유괴된지 1년 뒤 재거는 유괴범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나와 전화하고 싶냐"며 조롱하는 유괴범에 대해 재거는 진심을 담아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한다. 물론 재거로서도 이 한 마디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1년 간 그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 속에 있는 분노와 싸워 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유괴범은 혼란에 빠졌다. 그는 결국 자신이 재거의 딸을 포함한 4명의 연쇄 유괴 살인범임을 자백한 뒤 체포되어 수감됐으며 결국 감옥 안에서 자살했다. 재거는 "만일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딸의 생사도 모른 채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사형제는 결코 유가족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없다"**

이 책에 소개된 10편의 사연은 미국 살인피해자유족회(MVFR)라는 단체 회원들의 실화다. 유가족들의 사연에 초점을 맞춘 만큼 이 책에서 가장 분명하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사형제는 결코 유가족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 치유를 더디게 한다'는 것이다.

론 칼슨은 술과 마약에 취한 두 살인범에 의해 누나를 잃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방식으로 누나를 죽인 카리라는 여성을 용서하기 전까지 칼슨은 마음의 안정은 물론 사랑하는 연인, 건강 등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어느날 그는 '카리를 용서해야 한다'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고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칼슨의 진정한 용서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과정을 통해 카리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거듭난다. 결국 카리는 사형을 당하고 말지만 사형제 폐지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칼슨은 상처에서 벗어나 그 자신의 삶을 새로이 구한다.

물론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해자를 응징해야만 피해자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누구도 피해자 가족의 보복심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 책 역시 그런 태도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다만 '용서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이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이 책에 나오는 린다 화이트라는 중년 여성은 이러한 깨달음에서 한발 더 나아가, 딸이 살해되는 충격에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심리상담학을 공부하고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피해자-가해자 중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용서'가 피해자의 심리치료와 가해자들의 뉘우침과 교화에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3000여 년 전 함무라비 법전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나아갔는가**

이 열 명의 목소리는 용서란 얼마나 깊고 위대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케 한다. 그리고 더불어 한국의 사법체계가,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이 폭력과 보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되돌아보게 한다.

모든 문화와 기술이 발전해 오는 와중에도 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3000여 년 전의 법 원칙에서 근본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 셈이다.

올해는 국제 엠네스티가 지정한 '한국의 사형제 폐지를 위한 집중 캠페인의 해'다. 한국에서 사형은 1997년 이후 한번도 집행되지 않았으며, 현재 한국에는 63명의 사형수가 있다. 국제 엠네스티는 10년 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으면 '실질적 사형제 폐지국가'로 간주한다.

사형제 폐지는 응징과 보복의 법이 3000여 년만에 용서와 화해의 법으로 옮아가는 첫 발이다. 그런 점에서 2006년이 중요하고, 이러한 해에 나온 이 한 권의 책이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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