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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너그러워지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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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너그러워지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도리"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 제2장 살아남은 자의 노래〈8〉

용머리나루터 건너편에는 예성산 봉우리가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산자락에는 운무가 끼어 명주 속옷을 입은 여인처럼 산봉우리가 은밀하게 보일락 말락 했다. 사내들이 예성산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하는 것은 산봉우리가 여인의 젖무덤을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용머리나루터에서는 산봉우리에 얹힌 반석이 숫처녀의 젖꼭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용머리라는 지명은 산자락의 형상에서 따온 것이었다. 능주 주변에서 가장 높고 험한 금오산(현 용암산)의 한 산자락이 예성산 앞에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지석천과 만나는데, 마치 청용(靑龍)이 머리를 들이밀고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예부터 용머리라 불렀다.
사공이 손나팔을 하여 강 건너에서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갑니다아. 싸게 갈 거그만이라우. 조그만 기다리시요잉."
예성산 산자락에 화전을 일구고 사는 사공이었다. 그는 용머리나루터에 선 양팽손과 송흠을 발견하고는 긴 삿대를 저어 용머리나루터로 빠르게 건너오고 있었다.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는데도 지석천 물은 흐린 하늘과 달리 쪽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푸르렀다. 예성산 쪽 강가에는 장마철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낚싯대를 드리운 낚시꾼 서너 명이 갈대숲에 앉아 있고, 황새 대여섯 마리가 느릿느릿 낚시꾼 주위를 맴돌았다.
양팽손은 활처럼 휘어져 흐르는 강물을 각별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나룻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말했다.
"죽선(竹船)입니다. 보기에는 뗏목 같으나 안전하옵니다."
대나무를 길게 잘라 촘촘하게 엮어 만든 나룻배였다. 노를 저어가는 게 아니라 강바닥에 삿대를 찔러가며 강을 오가는 배였다. 겉늙은 사공이 허리를 굽혀 호들갑을 떨었다.
"나으리, 편히 금능의 인물역(人物驛)까지 모시겠습니다요. 오늘따라 온 산에 비구름이 끼어 그림 같습니다요."
벼슬아치들이 말을 빌려 타고 가는 인물역은 금능마을 가에 있었다. 인물역에는 역을 관장하는 찰방(察訪; 종6품) 이 있고, 말이 10여 마리나 있고, 말을 기르는 노비가 20여 명이나 되는 시골의 역 치고는 작지 않은 역이었다.
금능마을이란 쇠(金)를 실은 배를 언덕(陵)에 매어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실제로 예전부터 능주에서 금능까지는 지석천을 이용한 뱃길이 열려 있었다. 육로가 나 있으나 배를 강물에 띄워 관아에 공납할 물자와 곡물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

죽선에 송흠이 먼저 타고 양팽손이 뒤따라 올랐다. 죽선은 사공이 강바닥에 삿대를 찌르자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사공은 물길을 찾아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삿대를 저었다. 오르는 길은 유속이 느린 곳을 찾아가고, 내려오는 길은 유속이 빠른 곳으로 죽선을 띄우는 모양이었다. 죽선은 유속이 느린 예성산 쪽으로 건너갔다가 용머리 끝인 시루떡처럼 반듯한 베틀바위를 옆에 두고 천천히 지석천을 거슬러 올라갔다. 양팽손은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처럼 말했다.
"아낙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베틀바위라고 합니다."
"학포, 듣고 보니 강물이 마치 아낙이 짠 베를 펼쳐놓은 것 같군 그래."
조광조의 적소에 들러 받았던 비감한 감정이 남아 좀체 말이 없던 송흠이 한 마디 뱉어내자, 양팽손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오늘 짜고 있는 베는 쪽물을 들인 것입니다."
송흠이 오자 현감이 마중을 나와 조광조의 적소를 안내해 주었지만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다. 현감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아전에게 술자리를 지시했으나 한사코 송흠이 거절하여 취소시켰던 것이다. 오히려 송흠은 현감의 호의를 '이곳 능주 현감은 공무시간에도 술을 마시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거절당한 현감은 뚱뚱한 몸집을 흔들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학포는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있어 산수(山水)가 때로는 동지 같겠군. 그렇지 않은가."
"능주의 빼어난 풍광을 소재 삼아 서화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산수도(山水圖)가 바로 여기 풍경과 비슷하구먼."
"그렇습니다. 복숭아 산지인 이곳 능주에 복사꽃이 한창 피어나면 신선들이 사는 선계(仙界)가 돼버립니다."
송흠은 성격이 대쪽처럼 곧아 타협을 잘 못하는 양팽손의 인품을 알기에 가능한 현실 정치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도학은 입신양명보다는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수신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양팽손에게 있어서 서화는 단순한 은둔생활의 벗이 아니라 도학을 실천하는 수신의 방편이라 할 수 있었다. 송흠이 보았던 양팽손의 산수도 제화시(題畵詩)는 이런 것이었다.

강 넓어 티끌 날아오지 못하고
여울이 시끄러워 속세의 말 들리지 않네
고깃배는 오락가락하지 마라
세상과 서로 통할까 두렵네.
江濶飛塵隔
灘喧俗語聾
魚舟莫來往
恐與世相通

산수도 제화시 속에는 양팽손의 마음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능주의 산중에 묻혀 세상의 티끌을 멀리하고, 세상의 온갖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겠다는 다짐의 시이기도 했다. 강을 오르내리는 고깃배의 사공이 세상 말을 전할까 걱정할 정도이니 양팽손의 각오가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되는 것이다.

금능 언덕에 도착하자, 사공이 먼저 뛰어내려 죽선을 강가의 말뚝에 매었다. 송흠은 금능마을에 들어서더니 고개를 젖히며 놀랐다. 500여 호가 넘는 마을이 갑자기 나타나 들판 가운데 고대 왕국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마주보고 있는데, 한 마을은 돌담을 둘러친 양반들의 기와집과 양인들의 초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또 한 마을은 말을 메어둔 역을 중심으로 주로 가게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역 옆으로는 말굽과 낫이나 호미를 만드는 대장간도 있고, 약방도 있고, 주막도 있고, 길손이 묵어가는 여관도 있었다. 역촌 길은 갓을 쓴 양인이나 짚신을 신은 노비들의 왕래가 잦았다. 금능마을이 일찍이 대촌이 된 것은 육로와 뱃길이 열려 산지에서 쏟아지는 곡물과 외지에서 들어온 장사꾼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촌인 금능마을은 능주현 소재지와 마찬가지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찰방에게 말을 부탁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쌍봉사까지는 걷지 않으셔도 됩니다."
"학포. 왜 그런 부탁을 했는가."
송흠의 책망에 양팽손은 어리둥절했다.
"부탁하면 안 될 까닭이라도 있습니까."
"학포, 그렇다네. 망신을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다네."
역의 노비가 다가와 허리를 굽혔으나 양팽손은 역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송흠이 왜 역마(役馬)를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찰방 어른 계신가."
"장흥에 급한 우보(郵報; 관아의 문서)를 전하러 가셨습니다요. 쇤네에게 나으리 두 분을 쌍봉사까지 모셔다드리고 오라 일렀습니다요. 힘센 말 한 필을 골라 아침부터 여물을 잔뜩 먹여놓았습니다요."
"고생했네. 허지만 어른께서 역마를 타지 않으시겠다고 하네."
"그러하시더라도 쇤네는 찰방 나으리께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요."
"괜찮을 걸세. 내가 그리했다고 연락을 해주겠네."
양팽손은 울상을 짓는 말먹이 노비를 안심시켜 주었다. 대신 자신이 맡겨두었던 소를 데려오라고 노비에게 일렀다. 양팽손은 삭탈관작 당한 처지였으므로 외출할 때 역의 말을 타지 않고 집에서 기르는 소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소가 말보다 느리고, 무엇보다 지구력이 부족하여 오래 타지 못하는 단점은 있으나 어린 시절 월곡마을에서 논밭을 오가며 탔던 그런 즐거움은 되살려 주곤 했다. 양팽손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 소를 타고 가며 시를 지은 적도 있었다.

소를 타는 것이 좋은 줄 몰랐더니
이제 말이 없어 알게 되었네
석양의 방초 우거진 길에
봄의 해도 천천히 가네.
不識騎牛好
今因無馬知
夕陽芳草路
春日共遲遲

그런데 양팽손은 스승인 송흠이 소를 타는 것도 거부하기 때문에 자신도 쌍봉사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금능을 조금 지나 발용산 산자락 아래 뜬바우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에야 송흠이 말했다.
"학포, 나는 걸어 갈 테니 자네는 소를 타고 가게나. 나는 원래부터 소를 타보지 않았다네."
"스승님이 걸으시는데 어찌 제자가 소를 타고 가겠습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네. 도반(道伴)처럼 걸어가세."
송흠은 허허허 웃으면서 자신이 사적인 용무로는 관의 말을 타지 않는 이유를 얘기했다. 송흠에게는 역마에 얽힌 뼈아픈 젊은 날의 기억이 있었다.

〈송흠의 정착지는 장성이지만 출생지는 영광이었다. 서울에서 나주는 영광을 거쳐 가야 했는데, 나주는 송흠이 평소에 좋아했던 선배 최부의 고향이었다.
두 사람은 홍문관에서 함께 일했던 적이 있었다. 최부가 홍문관 응교(應敎; 정4품)로 일할 때 송흠은 최부 밑에서 일을 보좌했던 것이다. 고향이 이웃인 두 사람은 함께 휴가를 얻어 시골로 내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송흠이 최부가 사는 마을로 찾아갔다. 송흠은 타고 온 말을 마당가에 매어두고 최부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오랜 만에 재회하여 이런 저런 정담을 나누었다. 한참 만에 최부가 송흠이 타고 온 말을 보더니 말했다.
"저 말은 무슨 말인가."
"역마지요."
역마는 관리가 길을 떠날 때 나라에서 지급하는 말이었다. 송흠은 별 생각 없이 말했는데, 최부는 안색을 바꾸면서 꾸짖었다.
"저 역마는 자네 고향집까지만 타고 가라고 빌려준 것이네. 자네 고향집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것은 사적인 일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는가."
최부는 휴가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송흠의 잘못을 대간에게 알려 파면시켜버렸다. 송흠이 파면되어 최부에게 찾아와 하직인사를 하자, 최부가 송흠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네 같이 젊은 사람일수록 앞으로 큰일을 할지 모르니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네."
최부의 말을 듣는 순간 송흠은 섭섭했던 마음이 씻어지고 두 눈에서 헛것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파면시켰던 최부야말로 자신의 장래를 참으로 걱정해주는 고향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양팽손은, 권력에 무임승차하지 않고 공사(公私)를 분명하게 처리하는 스승의 인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새삼 이해되었다. 사실 송흠이 후배나 제자뻘 되는 젊은 도학자들과 어울렸다면 진즉 영상의 자리 하나는 꿰찼을 터인데, 자존심이 세고 비위가 약한 그는 그러지를 못했다. 요직으로 불려갔다가도 부모 봉양을 핑계로 외직으로 나와 버렸다. 그러니 조정을 장악한 조광조 등의 젊은 사림과는 인연이 없었다. 송흠 자신이 권력을 탐탁지 않게 여기어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을 뿐더러 개혁파인 젊은 사림들도 나이 든 송흠이 요직으로 들어오는 것을 걸림돌처럼 부담스러워했던 것이다.
송흠이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이란 막강한 자리에 임명되었을 때도 그는 서울로 들어오지 못했다. 젊은 간원(諫院)이 명분을 만들어 중종에게 송흠의 벼슬을 교체하라고 아뢰어 뜻을 관철했던 것이다.
"대사간 송흠은 80세의 부모가 영광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 전주부윤으로 있을 적에도 사임하고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였습니다. 이번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으나 틀림없이 벼슬자리에 나오지 못할 것이며 혹시 나온다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고향으로 가서 부모를 봉양할 것입니다. 장관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으니 교체하시기 바랍니다."
명분은 장관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공사와 시비를 정확하게 따지는 송흠이 젊은 간원들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훗날 사신(史臣)도 이 일을 두고 〈중종실록〉에 이렇게 평하였다.
〈송흠은 관직에 있을 때 청렴하고 근신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다만 신진 선비들은 스스로 맑은 부류라 하고, 원래부터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식견이 밝아 쓸 만한 사람이라도 못난 사람이라고 하고, 자기들에게 붙는 사람이면 추천하곤 하였다. 대간들과 시종관들이 모두 송흠의 제자였기 때문에 추종하는 사람이 많았다.
송흠은 여러 차례 수령이 되어 외방에 있었고, 또 연로하여 신진들과 서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사간원에서 그를 논박하려 해도 헐뜯을 말이 없으므로 지방에서 올라오지 않는 것을 구실 삼아 교체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의도는 사실 규탄한 것이다.〉

송흠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학포, 춥지 않는가."
"지금은 초여름이옵니다. 한데 춥다니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란 말 잊어먹은 게로군."
"벼슬을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 하지도 말라는 스승님의 당부를 왜 잊었겠습니까."
"가까이 하면 뜨거워 화상을 입겠지만 자네는 지금 너무 멀리하고 있어. 그래서 춥냐고 물은 거지. 하하하."
"선생님이나 저나 벼슬하고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멀리할 것도 없고 가까이 할 것도 없지요."
"자네는 이 산중에 들어와서 도인이 돼버린 것 같군. 권력도, 사랑도, 우정도 불가근불가원이 좋지. 그것이 바로 중용일세."
양팽손은 스승과 함께 산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느릿느릿 뒤따라오는 소가 음매음매 하고 소리치더니 여린 풀을 한 움큼 뜯어 맛있게 삼켰다. 두 사람이 쌍봉사로 가고 있는 산길은 매정마을 쪽이 아니라 금능을 지나치는 지름길이었다.
"동지들은 지금 모두 와 있는가."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한 동지도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도 아시는 눌재(박상의 호)와 신재(최산두의 호)가 와 있습니다."
"눌재는 감정이 풍부해서 눈물이 많아. 무엇보다 사심이 없는 게 장점이지."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을 하늘 같은 선비입니다."
"신재는 사막에 가둬놓아도 살아날 사람이고."
"곤궁한 집안에서 자라선지 잡초 같은 근성이 대단합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정암의 초상화는 다 그렸는가."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장흥에 유배 와 있는 신잠(申潛)에게도 며칠 전에 두루마리로 가져가 보여준 바 만족해했습니다."
"신잠이라면 겉치레로 말할 사람이 아니니 믿을 만해. 그 사람의 패기는 알아줄 만하지 않은가."
양팽손보다 3살 아래인 신잠은 고향이 나주인 신숙주의 증손으로, 부친은 병조, 예조, 이조참판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신종호(申從濩)였다. 신잠은 시서화에 두루 능해 삼절(三絶)로 불렸는데, 서예에는 초서와 예서에, 화목에선 난초와 대나무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선비였다.

어느새 두 사람은 쌍봉사가 내려다보이는 쑥고개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중조산 정상은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축축하게 젖은 쌍봉사의 전각들은 한눈에 들어왔다. 송흠은 쌍봉사가 세조의 원찰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조의 위패가 어느 전각에 모셔져 있는가."
"호성각(濩聖閣)입니다. 하오나 세조가 어찌 성인일 것입니까. 동지들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하여 인정하지 아니하고 호성각 앞에서 침을 퉤 뱉거나 그냥 지나쳐버릴 뿐입니다."
"그래, 자네들 주장이 맞아. 일리가 있어. 왕위를 찬탈한 무도한 분 아닌가. 하지만 세조는 세종의 업적을 흩뜨리지 않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임금일세. 전조의 살림을 허물지 않고 지키는 것만도 업적이라는 말이네. 과오도 분명하지만 공도 또한 분명하니 나는 분향하고 참배할 것이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러한 견해 차이 때문에 젊은 사림들이 송흠을 꺼려했다. 그러나 양팽손은 젊은 사림 중에서 스승의 가르침에 영향 받은바 컸으므로 유일하게 송흠을 따르고 지지했다. 그러다 보니 양팽손은 어느 새 권력을 독약 같이 여기어 멀리하는 송흠을 닮아 있었다.
"저도 오늘은 호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겠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갑자기 그러면 눌재나 신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야. 그러니 그들이 떠난 뒤 세조 위패 전에 차라도 한 잔 올리게나."
"스승님의 뜻을 헤아려 그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약속한대로 쌍봉사에 도착하여 송흠은 호성전으로 가고, 양팽손은 박상과 최산두가 머물고 있는 요사채로 갔다. 박상과 최산두는 송흠이 왔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다렸다. 박상이 물었다.
"동부승지 어른은 어디 계신가."
"호성전에 계십니다."
"학포, 자네 스승은 여전히 보수적이네 그려."
"눌재 선배님, 무슨 말씀인지요."
"과거 역사를 늘 긍정하시는 분이란 말일세."
"맞습니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하여 판을 뒤엎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나간 모든 것을 푹 썩히어 밑거름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부정해야 될 것은 부정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보를 이룰 수 있겠나. 개혁이란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정하고 반성하는 데서 시작하는 정치가 아닌가."
"스승님은 사람이 세월보다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순리를 역행하지 말라는 뜻으로 과거를 긍정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산두가 나서 중재를 했다.
"눌재 형님, 동부승지 어른이 오늘은 좌장입니다. 그러니 좌장의 인품이나 신념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후배들의 예의가 아닐 것 같습니다. 먼 길을 오셨으니 반갑게 맞이하십시다."
박상은 마뜩한 얼굴을 하며 최산두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양팽손도 박상의 시비가 터무니없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스승인 송흠의 언행은 너무 원칙적이었으므로 신뢰감은 주지만 답답한 데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장맛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송흠이 호성전에서 나오자, 일행은 비를 맞으며 경내에서 기다리다 앵팽손의 안내를 받아 동암으로 올라갔다. 혜공도 여인을 데리고 뒤따라 올라갔다.

동암은 쌍봉사 동편의 남향받이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숲은 쌍봉사부터 길게 형성되어 있는데, 대숲 속에는 야생 차나무들이 산재해 있었다. 혜공이 여인과 함께 오르는 것은 다회(茶會)를 주재하기 위해서였다. 혜공은 차로 일가를 이룬 다승(茶僧)이기도 했다. 쌍봉사 주변에 차나무들이 산재한 것은 창건주 철감 도윤(道允) 선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차씨를 가져와 퍼뜨린 데서 연유했다. 철감 도윤선사는 '평상심이 도(道)'라고 외친 중국 안휘성의 남전선사 회상(會上)에서 조주와 법형제(法兄弟)가 되어 함께 수행 정진한 유학승이었던 것이다.
쌍봉사는 남전과 조주가 무심히 차 한 잔 마시며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라고 하던 중국의 다맥을 잇고 있는 다사(茶寺)이기도 했다. 남전은 열반하기 전에 철감 도윤에게 '우리 종(宗)이 너로 인하여 동국으로 몽땅 돌아가는구나' 하고 전등(傳燈)을 인가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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