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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에도 인연이 있으니…'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 제2장 살아남은 자의 노래〈7〉

밤새 축축한 바람이 불더니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져내려 쌍봉사 경내를 적시고 있었다. 법당 주변의 산수유나무와 이팝나무 가지에 물방울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마치 유리구슬이 반짝이는 듯했다. 사시예불을 올리는 혜공의 독경소리가 경내로 메아리칠 무렵에는 빗소리가 제법 커졌다. 혜공의 독경소리가 그의 마음이 실린 듯 구슬프게 들렸다. 빗소리도 원왕생 원왕생 하고 구천을 떠도는 한 맺힌 고혼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듯 들려왔다.
여인은 법당에서 나와 동암으로 가려다 해탈문을 들어서는 사내를 보고는 잠시 망설였다. 사내는 어깨에 도롱이를 걸치고 삿갓을 쓰고 있었다. 도롱이는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사내가 삿갓을 들고 얼굴이 보이며 여인에게 말했다.
"공양주보살인가."
"네."
여인은 공양주보살이 아니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 사실 여인은 혜공에게 허락받은 것은 아니지만 재(齋)를 지내며 기도하는 동안 공양주보살이 되려고 작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지스님은 어디에 있소."
"사시예불을 드리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법당에서 나오실 것입니다."
"알았소."
사내는 돌아서서 비를 맞으며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돌아가시게. 난 여기서 이틀은 지내야 할 것이네."
"괜찮겠사옵니까."
"현감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눈 감아 줄 것이네. 여기까지 길 안내를 해주어 고마우이."
"아니옵니다. 나으리께서 서울에 계실 때 저희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일이옵니다."
사내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는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고는 돌아섰다. 상투를 튼 남자는 행색이 농사를 짓는 양인으로 보였고, 사내는 대단한 벼슬을 지낸 신분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현감의 허락을 받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귀양 온 선비가 분명했다.
"아무 일 없을 것이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가시게."
"혼자서 돌아오시겠사옵니까."
"걱정 마시게."

양인의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는 사내의 이름은 최산두(崔山斗)였다. 조광조와 한 날 한 시에 서울을 떠나 조광조는 능주로 와 한 달 후 사사 당했고, 그는 동복 나복산(蘿葍山)의 한 민가에서 호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짓고 지금까지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떠난 양인은 최산두에게 적소(謫所; 유배 처소)를 내준 민가의 주인이었다. 그는 농사도 짓지만 농한기에는 사냥을 업으로 하는 양인이었는데, 최산두가 없었더라면 공물인 매를 제 때에 바치지 못하고 빚에 쪼들려 결국에는 유랑민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매잡이 농부가 자청해서 최산두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최산두가 중종에게 진언하여 매가 드문 남방에서 매를 잡아 진상하는 관행을 혁파했기 때문에 남방의 매잡이들이 매를 잡지 못하여 매 한 마리 대신에 베 40-50필을 바치던 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산두는 중종 12년 8월 24일 조강(朝講)에 나아가 인천 출신인 시강관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매의 진상 폐단에 대해서 아뢰었던 적이 있었다.
검토관으로 조강(朝講; 아침강론)에 참여한 최산두가 먼저 아뢰었다.
"매는 본래 남쪽지방에서 나는 것이 아니어서 한 마리의 값이 베로 거의 40-50필이나 되는데도 각 고을에서 감사에게 올리면 감사는 받아서 나라에 진상하고 나머지는 선물로 각처에 나누어주면서 하찮은 물건처럼 여기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백성들이 당하는 폐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양계(兩界; 동북계와 서북계)에서 토산물을 바치는 규례에 따라 남쪽지방에 다같이 바치도록 요구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것 같사옵니다."
중종은 뜻밖에도 최산두의 진언을 조금 받아들였다.
"매를 진상하는 것은 햇것을 올리는 제사에 산 꿩을 바치는 것과 같은 일이니 없앨 수는 없다. 양계는 토산지이지만 남방은 산지가 아니니, 굳이 봉진(封進)하게 하면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칠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최산두와 조강 전에 응방을 없애자고 입을 맞춘 이성동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매를 진상하는 것의 폐단에 대해서는 시종관과 대간들이 이미 자세히 논계하였으며, 남방은 토산지가 아니니 폐지해야 하옵니다. 함경도의 가을철매(秋鷹)와 사냥매 소응(巢鷹)을 잡아 바치는 폐해도 많사옵니다. 매사냥하는 사람이 진상이라는 핑계로 여염에 드나들며 닭이나 개를 때려잡아도 힘없는 백성은 막지 못하여 뒤숭숭하옵니다. 매를 바친 뒤에는 그 나머지가 재상과 시종에게 내려지기도 하니, 폐단은 지극히 크나 쓰임은 지극히 가볍사옵니다. 응방을 둔 것이 놀이 도구에 가까우니 폐지한들 무엇이 해롭겠사옵니까."
중종은 응방의 폐지만은 허락지 아니하였다.
"응방을 둔 것은 놀이 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햇것을 올리는 제사를 위하여 둔 것이므로 부득이한 일이니 폐지할 것이 없다."
응방(鷹房).
매를 사육하고 잡는 일종의 관청인데, 연산군 때 그 폐단이 절정에 달하였다. 연산군은 응방에 서울을 수비하는 갑병(甲兵)과 군역에 복무하는 장정인 정병(正兵)을 각각 400명을 두었고, 이것도 부족하여 내금위에서 70명, 사복(司僕) 10명을 대기시켜 놓고 매를 잡게 하였다. 이들이 민가에 끼치는 민폐는 가을 논을 뒤덮은 메뚜기 떼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으므로 중종 때에 이르러 최산두 등이 응방을 폐지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응방의 혁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남방에서 매를 진상하는 일만 중지시키는 데 그쳤다.
그래도 최산두의 공은 남방의 지방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그는 유배를 와서 뜻밖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반듯한 삼 칸 초가를 제공받았고, 능주와 이웃한 동복의 향교 교생들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자주 찾아주어 외롭지 않았다. 최산두가 유배 중에도 쌍봉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과 호의가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여인은 법당 문 밖에서 사시예불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혜공이 나오자 최산두가 쌍봉사에 왔음을 알렸다.
"대사님, 손님이 왔습니다."
"누군가요."
"지체가 높으신 분인 것 같습니다."
"지체가 높건 낮건 간에 비가 오는데 왜 방으로 안내하지 않았소."
혜공은 황급히 최산두에게 다가가 합장을 하며 사과했다.
"죄송하오이다. 어서 방으로 드시지요."
"동복에서 온 최산두라고 합니다."
"존함을 익히 들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최산두는 도롱이를 벗고 삿갓을 벗었다. 여인은 조광조와 나이나 체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큰 얼굴에 눈썹이 숯덩이처럼 검어 강직하게 보였다. 여인이 본 대로 최산두는 조광조보다 1살 아래의 나이였고, 그 역시 조광조와 인연이 깊은 도학자였다. 광양의 둔전(屯田)을 일구는 가문에서 태어나 김종직, 김굉필을 사숙했고 15세 때 〈통감강목(通鑑綱目)〉 80권을 2년 동안 독파한 후 18세 때 상경하여 조광조, 김정, 김안국 등과 교유하며 '낙중군자(洛中君子)'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혜공이 방에 들자 여인은 공양간 부엌으로 들어가 찻물인 석간수를 돌솥에 넣고 끓였다. 솔방울을 넣기 전에 불쏘시개는 마른 소나무 가지를 사용했다. 사시예불 전에 혜공이 법당 부처님에게 헌다하기 위해 찻물을 끓였는데 여인은 유심히 보아두었던 대로 했다.
혜공이 위로의 말을 먼저 건넸다.
"적소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먼저 찾아가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을 받은 자는 적소에 있어야 하고, 스님은 법당에 있어야지요. 그게 법도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는 법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오늘처럼 예외는 있는 법이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불가에서는 지킬 예도 없고 만들어진 법도도 없다고 봅니다. 그것에 얽매이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고자 함이지요. 그래서 공(空)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혜공이 던지는 말에 최산두는 오랜 만에 고승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없다기보다는 무상하고 허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허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입니다. 본래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불도들은 불성(佛性)이라고도 합니다. 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소승은 수행하고 있습니다. 불성을 깨치어 행동하고 말하면 그것을 우리 빈도(貧道)들은 해탈이라고도 하고 성불이라고도 합니다."
최산두는 논박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가볍게 응수하고 말았다.
"석가는 공자와 노자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소승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승이 알 수 있게끔 가르침을 줄 수 없겠습니까."
"공자는 수신하여 세상에 나아가 지치를 펴는 데 도(道)가 있다 하고, 노장(老壯)은 자연으로 돌아가 세상을 잊어버리는 데 도가 있다 하고, 석가는 자연 속에서 수행은 하되 세상의 일을 외면하지 않는 데 도가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혜공이 합장을 하며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최산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문대로 기묘명현의 반열에 오른 선비답게 최산두는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15세 때 〈통감강목〉 80권을 들고 석굴로 들어가 수천 번을 읽고 나왔을 때 주변의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는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혜공은 합장한 채 소리 나지 않게 중얼거렸다.
'임금님에게 〈성리대전〉을 강할 26인의 선비 중에서 최 공이 첫 번째로 뽑혔다는데 과연 사실이군 그래.'
여인이 다관에 차를 달여 담아 오자, 혜공은 합장을 풀고 말했다.
"최 공께 먼저 차를 따르시오."
"아닙니다. 대사님께 차를 먼저 따르시오."
여인이 웃으며 중재했다.
"차는 술과 달라서 따르는 순서가 없을 듯싶사옵니다. 제가 앉은 쪽에서 가까운 쪽부터 따르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최산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강호에 고수가 따로 없소이다. 보살이 바로 고수입니다."
혜공도 맞장구를 쳤다.
"최 공의 도학이나 소승의 불도보다 높은 것이 다도인가 봅니다."
여인은 갑자기 두 사람이 추켜세우는 바람에 얼굴을 붉혔다. 여인이 당황해 하자 혜공이 말했다.
"보살님, 볼 일을 보시지요."

여인은 주지실을 나와 추녀 밑에서 비를 피했다. 빗방울이 기와를 때리는 소리가 솨아솨아 들렸다. 장맛비치고는 소나기처럼 굵은 빗방울이었다. 암막새기와 끝에서 낙숫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어제 오후에 양팽손이 동암으로 올라오라고 했으나 비가 오니 머뭇거려졌다. 양팽손이 조광조의 초상화를 보여준다고 했으나 가슴이 떨렸다. 여인은 동암에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으므로 내리는 장맛비를 탓하며 동암에 가기를 주저했다.

혜공은 최산두에게서 귀양살이의 고독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물었다.
"최 공께서는 적거(謫居)의 생활이 심히 외롭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술을 구해 실컷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제가 태어난 광양의 백운산과 바다의 풍경만 수려한 줄 알았는데, 동복의 숨은 비경도 한 폭의 수묵화입니다. 말로만 듣던 중국의 적벽 진경(眞景)이 바로 동복에도 있소이다. 적소를 드나드는 제자들에게 동복천의 병풍바위를 앞으로는 적벽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조물주가 이 세상에 내려준 작품이라 할 만한 적벽이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복에도 있습니다.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최산두는 적거 생활이 고독하기는커녕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양팽손이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교생들에게 '지금 아는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을 걱정하며 물리치는 데 반해서 그는 제자들도 활발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민심도 따뜻하고 향학의 열망도 대단합니다. 전하께서 동복으로 보내주신 성은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해배가 된다 해도 동복을 떠나지 않고 적벽 노루목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
기묘사림 중에서 최산두는 분명 특이한 인물이었다. 김식은 기회를 기다리려고 도망치다 자살하였고, 양팽손이나 유성춘, 윤구 등은 세상을 벗어나 산촌에서 잠심(潛心)하고 있고, 박상(朴祥) 등은 분함을 억누르지 못해 화병이 날 지경인데, 최산두는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유배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혜공은 최산두의 얘기를 들으면서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시절에도 인연이 있으니 시절을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사람이 시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절이 인연 따라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소극적인 처세 같으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처세가 바로 기다림이었다. 봄을 갖고 싶다 하여 겨울을 건너뛸 수 없는 것처럼 기다림이란 조용히 순리를 따르는 방편이었다.
혜공의 눈에는 최산두가 기다림을 체득한 선비같이 보였다. 그는 유가의 도학자이면서도 불가의 수도승 못지않게 인연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작년 가을에 조광조가 쌍봉사에 왔을 때 혜공은 이런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났다.
"세상을 맑히는 데 유가의 공이 큽니다. 삼강오륜을 벗어나면 소인이요, 그것을 지켜 실천하면 군자입니다. 얼마나 명쾌합니까. 하오나 명쾌한 것이 병통입니다. 불가에는 소인과 군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깨치면 모두가 부처입니다. 그러니 갈등이 없고 당(黨)이 없습니다. 투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연기(緣起)만 있을 뿐입니다."
조광조는 혜광의 변재(辯才)에 놀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조금은 아쉬워했다.
"사람이 하늘과 같다면야 어디 소인이 있고 군자가 따로 있겠소. 하늘의 도가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가에도 깨치지 못한 사람을 일러 중생이라 하지 않습니까. 중생이 있는 한 도덕이 있고, 질서가 있어야 세상이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불가에서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수도(修道)라면 사람이 하늘을 본받으려고 수신하는 것이 도학이 아니겠소. 다만 정치를 바로세우고자 달려오느라고 소인들에게 인을 주지 못하고 덕을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인과 덕을 불가에서는 자비라고 합니다."
빗줄기가 오락가락했다. 지금은 비가 잠시 멈추어 푸른 하늘이 언뜻 보였다. 혜공이 창을 열어젖히자 축축한 바람이 방안으로 몰려들었다.

"양공이 동암에서 기다리시는데 지금 만나시겠습니까."
"세창(世昌; 박상의 자)이 오면 함께 동암으로 올라가겠습니다."
광주에 내려와 있는 박상도 쌍봉사에 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박상은 조광조보다 8세 연상으로 성격이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로서 포용력이 부족한 듯하나 그는 담양부사 시절에 순창군수인 김정과 함께 폐비 신씨(중종의 정비) 복위를 위한 상소를 목숨 걸고 올려 폐비를 모의한 박원종, 남곤 등의 훈구파를 견제하고 조광조, 김식 등의 사림파에게 힘을 실어준 기폭제가 됐던 선비였다.
박상은 성격이 너무 대쪽같아서 대간들과 자주 부딪치므로 내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직으로만 돌았다. 조광조도 작년 봄에 그의 인품을 중종 앞에서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사람 된 품이 학문에 박식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재능과 덕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품행이 꿋꿋하고 결백하여 세상 사람들과 잘 휩쓸리지 않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의 눈에 나서 가끔 비웃음을 받기도 합니다. 그는 평생의 뜻을 오로지 퇴폐해진 것들을 일소하고 다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인재입니다.'
심정이 양천에 소요당(逍遙堂)을 짓고 기둥에 거는 주련을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에게 부탁했을 때 박상은 다음과 같이 글을 보내 심정을 조롱한 적이 있었다.

반산(半山)에 음식상을 차렸고
추학(秋壑)에 술잔을 열었도다.
半山排案俎
秋壑闢樽盂

심정은 주련을 뜯어내며 '간을 빼어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노옴!' 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반산은 왕안석(王安石)의 호이고, 추학은 가사도(賈似道)의 호인데, 그들 모두 송나라를 망친 대신이었던 것이다. 박상이 위와 같은 주련의 글을 보낸 것은 심정 너야말로 조선을 망쳐먹을 간신이라는 직격탄이었다.
박상이 호남 사림의 시조 격이 된 것은 아버지 박지홍이 본향인 충주에 머물지 않고 처가를 따라 광주 방하동(芳荷洞) 봉황산 아래 자리를 잡아 살았기 때문이었다.

박상은 최산두와 약속한 대로 정오가 조금 지나자 쌍봉사에 나타났다. 그는 거상이 끝났는지 상복을 벗고 있었다. 기묘년에 벼슬을 못하고 조광조 등과 어울리지 않은 것은 거상 중이기 때문이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그로 인해 그는 국문을 받고 삭탈관직 당하는 화는 피할 수 있었다.
최산두가 해탈문으로 달려 나가 박상을 맞아들였다.
"눌재(訥齋; 박상의 호) 형님, 죄인의 몸이라 문상을 가지 못해 송구합니다."
"경앙(景仰; 최산두의 자), 어려운 시절에 어찌 법도대로 살 수 있겠소. 그러니 미안해 할 것 없소."
"거상은 잘 치르셨는지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이오. 어머니도 잃고 동지들도 잃었으니 화를 입지 않은 나라고 어찌 안색이 좋을 리가 있겠소. 거상 중에 노천(김식의 자)의 소식을 듣고도 달려가 보지 못해 마음이 무겁소이다."
"눌재 형님, 천장(天章; 유성춘의 자)이나 형중(亨仲; 윤구의 자)에게 소식을 전했습니까."
"형중은 병으로 오지 못하겠다고 하고, 천장은 연락이 닿지 않았소."
유성춘은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파직되었고, 해남 출신인 윤구 역시 예조좌랑으로 있다가 파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 있는 처지였다. 박상과 유성춘, 윤구 등은 벼슬과 상관없이 교우가 두텁고 오래 전부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사람들은 호남의 삼걸이라고 불렀다.
"동부승지 어른도 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부승지 어른은 학포의 스승이니 학포가 잘 알 것이오."
양팽손의 스승이라 하면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별명이 붙은 송흠(宋欽)을 말했다. 양팽손이 16세 때 장성에서 나세찬, 송순 등을 가르치고 있던 송흠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삼마태수란 송흠이 수령의 임기가 끝날 때 다른 부임지로 가면서 세 마리의 말만 받아 가므로 생겨난 그의 별명이었다. 고을 백성들이 수령이 떠날 때 전별금으로 양마(良馬) 여덟 마리를 관행으로 주어 왔던 것인데, 송흠은 자신이 타는 말 1필과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을 각각 1필씩 전체 3마리의 말만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삼마태수란 단어는 백성들 사이에 어느덧 청백리를 상징하는 고사성어가 돼버렸다.
양팽손이 스승인 송흠이 오기를 동암에 앉아서 기다릴 리 만무했다. 양팽손은 벌써 비를 맞으며 능주로 나가 송흠을 기다리다가 맞이하여 용머리를 휘감고 흐르는 지석천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나루터에서 사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쌍봉사를 가는 데는 용머리를 넘어가는 산길도 있으나 나룻배를 타는 것이 힘이 덜 들고 지름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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