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황남대총의 금관과 얼음공주**
몇 년 전 KBS 일요스페셜 팀이 제작한 '황금나라의 비밀, 신라 황남대총'이란 프로에서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이색적인 화두를 던져 화제가 되었다. 그 프로의 주제는 신라의 옛 서울 경주 시내 한 가운데서 출토된 금관이 알타이공화국의 우코크에서 유래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주로 2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갔다. 이 프로가 방영된 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조금씩 새로운 유사성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알타이문화가 신라와 연관이 있다고 본 관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에서 금관이 발견된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같은 무덤은 모두 5~6세기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타이의 빠지릭 꾸르간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둘째, 금관의 생김새는 한자의 '뫼 산(山)'자를 위아래로 붙이고 좌우에 사슴뿔 같은 가지를 세워 뼈대를 만든 뒤, 거기에 곡옥과 새의 날개 같은 장식을 달았다. 그런데 새 날개 장식은 우리나라 주변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반해 수 천리 떨어진 알타이'얼음공주'의 새 장식과는 닮아 있다는 것이다.
셋째, 금관의 주요 장식의 하나인 곡옥도 이미 신라보다 1000년 전 알타이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동부 알타이에 있는 기원전 5~3세기의 빠지릭 대형 꾸르간 5호에서 나온 벽걸이용 양탄자에 새겨진 기사도에 기사가 탄 말의 가슴과 콧등에 곡옥이 한 개씩 달려 있다는 것이다.
넷째,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의 소재가 '금'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타이는 '금의 산'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타이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동서로 이어지는 황금문화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유물로 알타이 지방의 이시크 고분에서 나온 '황금인간'(기원전 5~4세기)을 들고 있다. 이 고대 황금문화는 BC 5세기부터 AD 6세기까지의 1000년간 이어진다. 이 시기 알타이 지방에서 발생한 황금문화는 스키타이가 개척한 동방교역로를 따라 서방으로 그리스까지, 동방으로 신라까지 퍼져갔다는 것이다(정수일의 문명교류기행, 한겨레신문 참조).
알타이와 신라가 이어지는 흥미로운 주제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두 가지 큰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첫째 알타이 빠지리크 문화와 신라의 금관 사이에는 1000년이라는 시간적 갭이 존재한다. 두 번째 수 천 리 떨어진 알타이의 문화가 신라까지 도달하는 경로가 거의 연구되지 않고 "알타이와 신라의 문화는 유사하다"는 점만 강조한 결과가 되었다.
최근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접근들이 시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본 정수일은 "남만주 요령성 일대 유적에서 '山'자 모양의 관을 쓴 봉황(일설은 불경 속의 가릉빈가 새) 장식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3세기 이후 중국 화북지방과 남만주 일원에서 여러 나라를 세워 신라와 교류했던 선비족 부족집단들이 그 매개 구실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알타이→선비→신라로 이어지는 루트인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 선비족의 교류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구려와 선비는 많은 교류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중간에 고구려를 빼고 설명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에 대해 일본 학자 아즈마는 「고고 자료를 통해서 본 고구려와 가야ㆍ신라의 교통관계」에서 고구려의 금동 관모를 분석하여 고구려적 요소가 신라에 전해졌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해 보려는 시도도 있다. 이한상은 「적석목곽분 출토 황금장식과 유리제품의 원류」라는 논문에서 "신라의 황금장식은 디자인의 모티브나 제작기법으로 본다면 중국의 북방이나 서역과 관련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시간적 공간적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 한족이나 선비족의 금속공예문화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고구려의 금속공예문화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해 앞에서 본 정수일과 아즈마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덧붙여 이한상은 "또한 중국에는 수많은 서역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매개로 서역산 문물이 고구려나 신라ㆍ백제로 이입되었을 것이고…"라고 해서 다른 가능성도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알타이를 단순히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관련성을 연구ㆍ검증하는 단계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의 연구 성과는 큰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코크 고원에서 학자들이 세계적인 유적을 발굴한 뒤 알타이공화국 정부는 고고학 발굴에 대한 금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런 선언은 외국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러시아 학자들은 발굴이 가능하다고 한다. 외국인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우코크 고원이 또다시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바로 우코크 고원 남쪽에 있는 중국과의 40km 국경에 일어나는 개발 문제 때문이다. 현재 이 지역에 가스관을 깔고, 이어서 중국 알타이 쪽에 자동차 도로를 만들 계획이며, 이를 위한 준비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이런 일이 현실화 되면 자연과 문화가 오염되지 않은 이 지역이 훼손되어 돌이킬 수 없는 인간재앙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빠지릭과 스키타이**
지금까지 우코크의 빠지릭 문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빠지릭과 스키타이를 섞어서 쓴 때가 많았다.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여기서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빠지릭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의 한 가지다. 다시 말해 빠지릭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키타이 문화란 무엇인가.
스키타이 문화는 BC 7세기에서 BC 3세기에 걸쳐 흑해 북쪽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성립된 기마 유목민족의 문화를 말한다. 유라시아 내륙의 광대한 초원지대에서 활동했던 세계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의 문화를 통틀어 말하기도 하고, 흑해 북쪽 연안 일대에 예부터 살고 있었던 특정 민족의 문화라고도 한다. 스키타이는 그들의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다만 그리스인이 스키타이, 페르시아인은 사카라고 불렀다. 그들은 아시아의 유목민으로, BC 8~7세기에 동방에서 서쪽으로 진출, 볼가강 가에 출현하여 원주민 키메리아인을 내쫓고 남러시아 초원에 강대한 스키타이 국가를 건설하였고, BC 4세기에 돈강에서 온 사르마티아인에게 쫓겨 서방으로 옮겼다. BC 3세기에는 사르마티아인의 압박으로 세력을 잃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주요 유적은 크림 반도와 드네프르강·돈강 하류지역, 흑해 북쪽 기슭, 서쪽으로 다뉴브강 남부, 동쪽으로 카프카스산(山)을 넘어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스키타이 문화유적의 발굴이 18세기부터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많은 꾸르간(무덤)과 삶터(취락지)에서 금은제의 화려한 출토품이 발굴되었다.
고고학으로 본 스키타이 문화의 특색은 ① 아키나케스형의 검, 세 날개식 청동 화살촉, 도끼·던지는 창·화살통 같은 무기 ② 재갈 같은 말갖춤(馬具) ③ 동물무늬 같은 장식 미술이라고 한다. 이들 문화적 요소의 성립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BC 4세기에 스키타이는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날카롭고 용맹한 유목민족으로 소가 끄는 천막집에서 생활하였으며, 소유한 말의 숫자로 부(富)를 결정하였다. 청동제의 갑옷과 투구, 미늘로 된 갑옷 속옷을 입었으며, 단검·활·화살로 경쾌한 기동력을 갖춘 기병대로 강적(强敵) 페르시아인을 괴롭히는 뛰어난 전술을 자랑하였다. 드네프르강 하류 니코폴 근방이 스키타이 왕국의 정치·경제 중심지였으며, 흑해 북쪽 연안 지역 그리스 식민지에서 가축·곡물·모피·노예 등을 도기·직물·금속제품·기름 등과 교환하는 광범한 통상으로 부유한 계층이 성립되었다. 귀족층에서는 딸려묻음(殉葬)이 행해져 여자·노예·말 등을 함께 묻은 장대한 꾸르간을 만들었다. 이들 꾸르간에서 금ㆍ은ㆍ동으로 만든 단지, 스키타이 청동 솥, 손으로 빚은 바닥이 납작한 질그릇, 갈아 만든 질그릇, 다양한 장식 무늬가 있는 암포라, 스키타이와 그리스인 장인(匠人)이 만든 정교한 보석 장식품들이 나왔다.
스키타이 미술로는 맹수·괴수(怪獸)·동물 같이 싸우는 모습을 주제로 한 동물 무늬가 두드러진다. 이 동물 무늬의 기원이 오리엔트와 동방에서 전파되었다는 양설이 있었으나, 최근 시베리아 남부 기원설이 우세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1년 10월 에르미타슈 미술관 소장의 스키타이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우코크에서 내려가는 길**
12시가 다 되어가자 니꼴라이가 재촉하기 시작한다. 돌아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통역을 맡은 풀루스닌 교수는 차에 싣고 온 산악자전거를 타고 이미 떠나버려 니꼴라이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날씨도 변해 사진 찍기에도 그 다지 좋지 않은 상태이고 사실 돌아가는 길도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12시쯤 출발하여 철책을 나서자마자 나타나는 유일한 악-알라하강 다리 가에 풀루스닌 교수가 모닥불을 피우고 기다리고 있다. 잠깐 자전거를 타며 휴식을 취했다.
다리를 떠나 고원지대를 지나 12시 50분쯤에 갈 때 고생했던 얼음강에 도착하였다. 풀루스닌 교수는 그 사이 11㎞를 산악자전거로 달려왔다. 이곳은 우코크에서 경치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따반-보그도-올라 봉우리들의 아름다운 설경, 계곡 사이이며 멀리 살짝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나이람달봉(友誼峰), 그리고 개울에 장관을 이룬 얼음 천지, 맛있는 낮밥, 정말 환상적인 시간을 보냈다. 특히 멀리 눈 덮인 산과 함께 녹은 얼음 호수에 비친 파란 하늘은 정말 선경이다. 많은 필름을 소비했다.
그림 30) 우코크에서 산악자전거를.
그림 31) 얼음강에서 먹는 낮밥.
따반-보그도-올라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내려가는 길은 시시각각 변하는 경치의 아름다움에 정말 지루한 줄 모르고 혼이 빠져 있었다. 아르잠지강의 범람한 지역을 거쳐 깔구뜨강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기 직전에 꾸르간이 2~3개 보인다. 3시 45분, 바로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도중에 사람을 만났다. 물어볼 것 없이 국경수비대다. 차에서 내리는 군인의 인상이 험악해 보인다. 어제 우리가 통과할 때 우리를 보고 검문을 하려고 했으나 따라 잡지 못했다고 한다. 약간 겁먹었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여권검사를 하고 빵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한다. 이런 산속에서 제대로 보급품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도 병영에서 얻어 먹었다고 하며 주지 못했다.
깔구뜨강을 따라가다 어제 낮밥을 먹었던 지점을 지나니 다시 높은 산을 올라간다. 여기서부터 풀루스닌 교수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한다. 올해 나이가 50세라고 하는데 어디에서 그런 대단한 체력이 나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비탈을 힘겹게 올라가는 차는 자전거가 먼저 달려갈 정도로 힘들어 한다. 니꼴라이가 엔진이 과열되어 쉬어가야 한다며 차를 멈춘다. 차에서 내려 주변 경치를 살피는데 저 아래 깊은 계곡에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처음으로 말 탄 사람을 본 것이다. 개를 데리고 가는 것이 사냥꾼처럼 보였다. 나는 망원렌즈를 최대로 해서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들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적당히 한 장 찍고 뒤돌아섰다. 니꼴라이가 서둘러 차를 출발시킨 뒤 운전을 하면서도 자꾸 그들을 쳐다본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들도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때야 그들도 국경수비대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러니까 내가 국경수비대를 찍었고, 수비대는 우리를 쳐다보기 위해 정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니꼴라이가 최대의 속도를 낸다. 아무리 늦어도 말보다는 빠른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낮은 계곡을 지나 다시 산을 오르는데 갈 때 보았던 엄청난 두메양귀비 밭이 나온다. 우리는 차를 멈추고 한참 동안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험악한 돌밭길에, 누구도 돌보지 않은 산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다니! 글로써는 도저히 표현을 할 수 없는 그 색깔, 꽃 색깔….
6시 20분, 우리가 출발할 때 쉬어갔던 가장 높은 뚀풀릐 끌류치고개(2896m)에서 마지막 휴식을 한다. 7시 반이 다 되어 랴듐온천 야영지에 도착하자 꾸바레프 교수가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마치 히말라야를 등정하고 베이스캠프에 돌아온 것처럼 감격적인 포옹을 했다.
9시 저녁밥을 먹고 나니 차가운 바람이 불고 머리가 띵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사흘간의 우코크고원 탐사는 진이 빠질 정도로 사건의 연속이었고 힘이 들었다. 한국에서 간 대원들은 모두 지쳐버렸는데 저력 있는 러시아 팀은 시끄럽게 웃으며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끝날 줄을 모른다. 사흘간의 모험이 알타이 산지에서 이골이 난 그들에게도 이야깃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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