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시대 바위그림 찾기 실패**
7월 7일(월), 밤새 푹 자지 못하고 여러 번 깼다. 새벽 2시 반 온도를 재보니 텐트 밖이 7~8℃, 안이 12~13℃다. 4시 반쯤 밖을 내다보니 잔뜩 흐려 있어 우코크에 대한 마음을 비웠다. 우코크는 떠났다고 해서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비가 오면 우코크에서는 눈이 올 수도 있고 중간에 물이 불어서 갈 수도 없기 때문에 우코크 가는 날 날씨는 아주 중요한 변수가 된다. 가는 동안에 날씨가 바뀌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고지에서는 지금 맑은 날씨라고 좋아할 수도 없고 나쁘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그저 올라갈 뿐이다. 해가 뜨지 않고 바람이 부니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갑다.
커피와 빵으로 간단히 아침밥을 먹고 나니 8시가 넘었다. 부지런히 출발 준비를 했는데도 9시 30분이 되어서야 출발하였다. 그렇게 사막의 돌길을 누비던 꾸바레프 교수 승합차도 우코크를 가는 데는 무기력하다. 그래서 꾸바레프 교수는 차를 지키기 위해 야영지에 그대로 남아서 기다리기로 하고, 나머지 6명의 대원들은 모두 큰 대형 트럭에 함께 탔다. 앞좌석에는 운전사 니꼴라이와 내가, 뒤 짐칸에 마련한 특별석에 5명이 타고 힘차게 출발한다. 뒷좌석이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대원이 있자 니꼴라이는 10명도 탈 수 있고, 50명까지 태운 적도 있다며 지금은 완전히 특별대우라고 한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에 길을 만든 뒤 한번도 고친 적이 없는 것처럼 엉망진창이다. 그나마 돌산이라 큰 돌들이 가로놓여 있어 이런 특수차가 아니면 도저히 올라갈 생각도 못할 길이다. 그러나 이건 불평이 아니다. 이렇게라도 길이 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코크를 가 볼 수 있다는 감사함을 가지는 것이 더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코크 가는 길에는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 피어 있는 산꽃들은 때때로 모든 어려움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답고 향기롭다. 길가 바위틈에 피어나 산들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꽃들은 우리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했다. 꼭대기에 닿기 직전 차가 어느 정도 숨을 고를 수 있을 때 니꼴라이에게 부탁하여 차를 세우고 꽃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갖가지 아름다운 꽃 그 자체도 아름답지만 마치 꽃밭처럼 무리를 이루어 끝없이 이어지는 꽃과 주변 경치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장관은 자리를 뜰 수 없게 한다. 그 가운데서도 때 묻지 않고 맑은 연한 노란색 두메양귀비는 으뜸 자리를 차지한다. 두메양귀비는 백두산의 고원에서도 많이 보아 익숙한 꽃이지만 여기서는 분홍색 두메양귀비도 있어 참으로 이채롭다.
10시 15분, 야영장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고개 뚀플뤼이 끌뤼츠(Tёplyi Klyuch)에 도착하였다. 해발 2907m(N49°24'479", E88°02'138")로 그 높이가 이미 백두산 최고봉을 앞지른다. 한 낮이지만 기온이 11.4℃로 제법 쌀쌀하다. 고개 너머는 엊저녁 잤던 골짜기 보다 수 십 배나 더 큰 평원이 펼쳐져 있다. 내려가는 길이 좋아 힘들이지 않고 달린다.
그림 10) 길가 돌 틈에 핀 두메양귀비. 분홍색 두메양귀비가 이채롭다
그림 11) 뚀플뤼이 끌뤼츠(2907m) 고개에서 내려다 본 우쿠크 가는 길
산을 거의 다 내려와 니꼴라이가 차를 멈춘다. 바위그림을 발견한 곳(2749m, N49°23'216", E88°03'774")이 이 근처라는 것이다. 이곳에 구석기 시대의 바위그림이 있다는 것인데 몰로딘 교수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구석기시대 이미 우코크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고원지대 바위에 새겨진 고대인의 바위그림으로, 우코크에서 맨 처음 사람의 흔적이 남겨진 곳은 깔구뜨(Kalgut) 광산에 위치한 바위그림이다. (…) 그것은 말이었다. 말을 그린 방법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지만, 한편로는 나름대로 정형화된 것이다. (…) 깔구뜨의 이 그림들은 아르샨-하따, 몽골에 있는 호임-쩬께르 아구이, 하까시에 있는 '흰 말의 제사터' 유적, 례나 강에 있는 쉬스끼, 그리고 뷔르까에서 발견된 그림들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된 바위그림 가운데 하나다. (알타이 고고학 시리즈의 2권 『고대 알타이의 비밀- 우코크 고원』, 학연문화사, 2000)
이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다. 아침밥 먹을 때 꾸바레프 교수와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꾸바레프 교수는 몰로딘 교수의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와 유사한 그림은 몽고에 수 백, 수 천 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었다. 꾸바레프 교수가 생각하는 알타이 지역 암각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신석기 시대로 보고 있다. 책의 사진을 보고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깔구뜨 바위그림은 이미 자신이 30년 이전에 발견한 것으로, 작년 몽골의 체벤도르지와 미국의 야콥슨과 함께 와서 보면서 논의를 하였다고 한다. 발견된 위치도 깔구뜨 광산에서 꽤 많이 떨어진 지역이라고 하였다. 꾸바레프 교수는 그 바위그림이 있는 곳을 직접 지도로 그려주면서 찾아보라고 하였다.
우리는 1시간 이상(11:00~12:20) 바위를 샅샅이 뒤지며 말 그림을 찾았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림을 찾던 우리는 어느덧 깔구뜨강까지 내려가 있었다. 이곳에서 어제 갈라졌던 길이 깔구뜨강을 따라 이어지다가 함께 만나는 곳이다.
그림 12) 구석기시대 말그림 (『고대 알타이의 비밀』)
그림 13) 바위그림은 못 찾고 꽃만 찍었다.
그림 14) 알타이에 핀 꽃(멀리 우리가 탄 특수차가 보인다)
***"우코크, 국경수비대나 술 취한 운전사만 간다"**
12시 20분 우리는 깔구뜨강을 건너 다시 산길을 오른다. 산길을 달리며 오른쪽을 보니 넓은 계곡이 이어지는데 아마 비가 많이 오면 범람하기 때문에 길을 산 위로 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산길에서 만난 두메양귀비의 행렬은 오전에 봤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꽃들이 모여 있어 장관을 이룬다. 마치 길가에 씨를 뿌려 밭을 일구어놓은 것 같다. 우선 지나가고 돌아올 때 꼭 다시 멈추어 사진을 찍기로 하였다. 산을 내려가 깔구뜨강을 다시 건넌다. 13시 10분, 여기서 1시간 동안 낮밥을 먹었다. 러시아 대원들은 '도시락라면'으로, 한국 대원들은 '신라면'으로 간단히 때웠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왼쪽에 눈 덮인 산이 솟아 있는데 그 너머는 바로 몽골이라고 한다. 몽골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멀리 광산이 보인다. 아마 그 광산이 깔구뜨광산인 모양이다. 한나절 내내 달려온 셈인데 산머리 두 개를 넘었을 뿐이다.
2시 15분, 다시 출발하여 강을 건너 30분쯤 달리니 왼쪽으로 눈 덮인 산 아래 몽골과의 국경을 나타내는 남방한계선 철조망이 나오는데 아무런 제한 없이 드나들 정도로 관리가 허술하다. 철조망에는 굵은 동선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통신을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여기서부터 우리에게 정말 모험이라고 할 정도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돌길에서 차가 넘어질 정도로 뒤뚱거려 위험했지만 이제부터는 물과 얼음과의 전쟁이다. 빙하가 녹아 물들이 흘러내리며 마치 범람한 하천처럼 온통 물바다를 이룬 들판을 용감히 건너던 니꼴라이가 한 물구덩이에서는 갈 수 없다고 선언을 한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깊어 니꼴라이에게 계속 가자고 우길 수가 없을 정도다. 만일 여기를 건너지 못하면 어렵게 여기까지 온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위기인 것이다. 지금까지 오면서 단 한 대의 차도 보이지 않고,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차가 물에 빠져버리면 옴짝 딸싹할 수 없게 되고 구원을 요청할 곳도 요청할 방법도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빗줄기가 더 굵어지고 있다.
갈등이 왔다. 어떻게 온 길인데 이곳에서 돌아가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모두의 안전이 걸린 문제인데 여기서는 절대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모두 내려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여기저기 길을 찾던 중 이리나가 사람이 뛰어넘을 수 있는 지점을 찾아냈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그곳을 통해서 뛰어넘어가 무게를 줄이고 차만 건너가기로 했다. 우리의 막강한 특수차 '프로베테니크'는 마치 바다에서 상륙정이 달리듯 힘차게 달리더니 무사히 건너편에 다다른다. 저절로 박수가 나온다. 어떤 곳은 몇 백 미터를 물속으로만 달리기도 하며 모험에 모험을 거듭하였다. 몇 개의 능선을 넘더니 4시 15분 얼음강에 도착하였다.
지금까지 본 것과는 달리 작지만 강이다. 지도를 보니 지금까지는 남알타이산맥의 한 부분인 '따반-보그도-올라봉(몽골어 Tavan-Bogdo-Ola, '5인의 성인 봉우리'라는 뜻. 최고봉 '후이뚱산, 4374m')' 기슭을 계속 따라 왔는데 바로 마지막 최고봉인 나이람달봉(Nairamdal, 중국에서는 友誼峰) 가까이에 도착한 것이다. 이 나이람달봉은 4374m로 러시아, 중국, 몽골의 세모꼴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최고봉으로 알타이산맥에서 밸루하산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이 얼음강은 바로 그 골짜기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다만 그 최고봉 앞에 2585m의 이름 없는 봉우리가 가리고 있어 멀리 산골짜기 사이를 통해서 내다보고 있을 따름이다. 이 강의 이름은 아르감지(Argamdzi)강이다. 이 아르감지강은 조금 더 내려가 우리가 하루 종일 끼고 달려 왔던 깔구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여기서 니꼴라이가 완전히 손을 든다. 작년에 왔을 때는 물이 없었는데 지금은 얼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얼음이 녹으면서 가운데는 물이 흐르고 양쪽에는 녹지 않은 얼음이 남아 있는데 높이 차이가 1m가 넘기 때문에 만일 큰 차가 나가다 앞으로 넘어지면서 꼬꾸라지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한 번 넘어지면 그것으로 끝장이기 때문에 니꼴라이의 신중함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많이 망설이다가 결국 니꼴라이의 뚝심이 시도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물이 흐르는 부분의 얼음은 두께가 얇아서 차가 가까이 가자 쉽게 꺼지면서 차가 물에 안착을 하였다. 우리의 '프로베테니크'와 니꼴라이가 다시 해낸 것이다.
중국에서도 대흥안령을 넘으면서, 백두산의 서벽을 내려오면서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겼지만 이번처럼 무모한 모험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아침에 꾸바레프 교수가 "우코크는 국경수비대나 술 취한 운전사만 간다"고 했던 말이 실감난다. 오늘 하루 종일 심지어는 국경수대도 만나지 못하고 지리하고 힘든 강행군을 계속한 것이다. 날씨마저 천둥이 치고 비는 계속된다. 강을 건너서는 높은 고지대가 계속되고 물이 없어 어렵지 않게 달린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많은 호수들이 이어져 있다. 고지대 끝나는 지점에서 내려다보니 눈앞에 넓은 고원이 펼쳐진다. 바로 이곳이 우리가 목적지로 했던 우코크 고원이다.
이 고원을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을 이루는 알타이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그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들이 만든 악-알라하(Ak-Alakha)강이 흐르며 만들어낸 많은 호수와 넓은 초원이 형성되어 있다. 이 악-알라하강이 깔구뜨강과 합쳐 아르구트(Argut)강이 되고, 이 강이 다시 까뚠강으로 들어가 결국 오비강이 되어 북빙양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우코크강의 막-알라하강은 결국 오비강을 이루는 최초의 근원지가 되는 것이다.
고지대를 내려가자 바로 유명한 베르떽(Bertek) 계곡의 다리를 건넌다. 악-알라하강의 물이 불어서 무서운 물살이 다리 밑을 지난다. 다리를 지나자 다시 국경 울타리가 나오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길이 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조금 가니 큰 호수가 나타난다. 이 호수(2184m, N49°17'721", E87°34'221") 옆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아침에 출발하여 지금 시간 5시 15분, 거의 8시간 가까이 숨 가쁘게 달려 온 것이다. 야영지는 결정했으나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텐트를 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차 안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는 내리고 있으나 멀리 서쪽, 중국 쪽 산에 하얀 눈이 덮여 아름다운 경치는 보인다.
우리는 우선 비가 그칠 때까지 주변의 유적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니꼴라이가 발굴지점을 알고 있어 빗속에서도 쉽게 얼음공주의 무덤(2211m, N49°17'716", E87°32'783")을 찾아냈다. 발굴을 마치고 드러낸 돌을 둥그렇게 쌓고 파낸 흙을 다시 담처럼 쌓아 잘 정리해 놓았다. 약간 작은 듯한 무덤이 나란히 있고 동쪽으로 선돌이 두 개 서 있다. 철책 건너 북쪽으로 여러 개의 무덤들이 흩어져 있는데 상당수는 이미 발굴이 완료되었다.
이곳 우코크고원은 1994년까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깊은 산골이었다. 그러다가 얼음공주가 발굴되면서 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세계유산이 될 정도로 일약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생긴 변화다. 철책 뚫어진 곳을 통과해 건너편으로 가서 조사했다. 건너자마자 만나는 첫 꾸르간은 바로 작년에 발굴한 것인데 사람 뼈와 말 13마리의 뼈만 나오고 유물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더 가니 대형 무덤이 있고 무덤 앞에 두 열로 선돌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꾸르간들이 분포되어 있다.
그림 17) 발굴한 철책 밖의 꾸르간
그림 18) 우코크 고원의 악-알라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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