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50분, 출발하여 얄로만절벽을 지나자마자 볼쇼이 얄로만강이 까뚠강으로 흘러드는 합수머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까뚠강 중류를 따라가는 래프팅 출발지점이 있다. 말르이 얄로만에서 체말까지 래프팅을 할 수 있는 거리는 거의 180㎞로 4일에서 6일이 걸리는 거리이다. 얄로만과 일구멘강이 만나는 지점에는 위험하지는 않지만 흐름이 빠르다. 그리고 빠른 흐름이 끝나는 곳에 바로 카뚠강의 강력한 급류 가운데 하나인 일구멘스키(파고 2.5~3m)가 있다. 일구멘스키 급류는 가장 격렬한 카뚠지역으로 접근한다. 까드린(Kadrin) 급류의 큰 파도(3m까지)와 강력한 "샤바쉬(Shabash)"급류(카테고리 4~5)는 소용돌이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독버섯"이라 불린다. 강력한 급류는 아얄라(Ayala)강과 셀라 강이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도 만나게 된다.
그림 1) 얄로만 래프팅 출발 지점
그림 2) 옛 이냐 다리
10시 8분 이냐(Inya, 703km)도착, 까뚠을 건너는 유명한 다리 사진촬영을 했다. 두 개의 다리가 있는데 하나는 세워진 지 오래되지 않은 새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30년이 넘게 사용된 낡은 다리이다. 이 낡은 다리는 추야도로에서 유명한 도로이다. 원래 이 다리의 건축 책임자는 모스크바 도로연구소 졸업생인 차플린이라고 한다.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두 개의 사슬에 매달린 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미국에서 비슷한 다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인야에서 우선 약방에 들려 약을 샀다. 알약과 연고를 샀는데 해독제와 항알레르기 약이라고 한다.
***이냐의 고대 유적**
10시 15분, 이냐에서 2㎞ 가서(706km) 오른쪽 넓은 평야에 선돌 3개가 서있는 곳에 도착하였다(706km 지점, 해발 704m, N50°33'429" E86°34'428"). 원래 4개가 서있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작은 것 하나가 바로 뒤에 있는 꾸르간에 뉘여 있고 3개만 서있었다. 왼쪽에 서있는 가장 큰 것은 3m,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1m, 오른쪽 중간의 것은 2m이다. 이 선돌은 원래 청동기 때 썼던 것을 뚜르끄시대에 다시 자기들의 무덤 단으로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 흩어져 있던 것을 꾸바레프 교수가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선돌 바로 뒤쪽있는 대형 꾸르간은 청동기 시대의 것이라고 하며, 그 옆에 보이는 돌무지들은 청동기 시대 것보다 작았는데 모두 투르크 시대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1km 더 올라가 도로를 건너가자 알타이에서 아주 드물다는 석판이 하나 있는데(해발 783m, N50°25'415", E86°37'759") 석판 위에서 성혈을 파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것을 별자리로 보고 있다고 하는데 명확하지가 않았다. 기원전 2,000년경으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16km 쯤에도 꾸르간이 하나 있는데 고고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 이곳에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과도기에 만든 돌 조각상이 하나 더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조각상에서 인간 모양을 하고 있는 윗부분은 이미 없어졌고, 나머지는 고르노-알타이스크 향토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703km" 표지판 조금 못가서 작은 기념비 한 개가 더 있다.
그림 3) 이냐의 선돌
이냐에서 5㎞를 가면 오른쪽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높은 언덕을 내려가 다리를 건너면 다시 높은 산길로 올라가는 좁은 길이 있는데 이 길은 카뚠을 따라 튠구르로 가는 길이다. 추야도로에서 이녜겐(Inegen)까지는 12㎞는 차로 갈 수 있으나 나머지는 길이 좋지 않다. 이녜겐 마을 남쪽에는 돌사람이 남아있다고 한다. 우리가 돌아올 때 가서 보기로 했는데 결국 시간이 모자라 포기하였다. 알타이에 많이 있던 돌사람은 거의 사라지고 얼마 남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19세기~20세기 초에 사라졌고, 남아 있는 것들을 박물관으로 가져가므로 해서 황금의 산 알타이의 문화적 아름다움은 빈약해졌다.
쉬스코프는 자신의 추야도로를 여행하며 쓴 수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냐 가까이에 돌사람이 있다. 이 돌사람은 사각형이고 2.134m가 넘고 교묘하게 위로 뻗쳐 있는 크고 얇은 석판이다. 그 옆에 서면 자신이 작아지지는 것을 느끼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떻게 미개인들이 이 무거운 돌사람을 이곳으로 끌어 왔으며 어떻게 들어 올리고 땅에 파묻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안내자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옛날, 흰 자작나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강한 용사가 이곳으로 왔다. 그는 추야로 가려고 했지만 얕은 여울이 어딘지 몰라 그냥 깊고 빠른 강을 건넜다. 말을 타고 건너다 옷이 축축하게 되었다. 젖은 옷을 말려야겠는데 주위에는 작은 나무 한 그루도, 작은 숲도 없었다. 옷을 걸고 말릴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산 중턱의 평평한 대초원뿐이었다. 그는 산으로 기어올라가 돌을 빼냈고 이 돌을 못처럼 땅에 박았다. 바로 이것이 지금 있는 돌사람이다.' 노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10시 55분 출발하자 이내 제법 높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더니 20분만에 고개 꼭대기에 다다른다. 이냐로부터 약 8km 떨어진 이 지점에 비칙뚜-까야(Bichiktu-Kaya) 절벽이 우뚝 솟아 있다("708km" 표시로부터 오른쪽으로 100m 지점). 절벽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멀지 않은 곳에 웅장한 카뚠이 변덕스러운 추야와 합류하는 장소가 보인다. 회색에 가까운 추야강과 에메랄드색의 카뚠강의 합류이다. 추야 강변의 대지는 아주 높고 수직의 장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은 절벽을 깎아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깨진 바위가 그대로 노출된 곳이 많다. 이곳에 노보시비르스크 대학의 지질학과 학생들이 실습을 나와 있었다. 모두 망치를 하나씩 들고 실제 바위를 깨서 그 특질을 관찰하고 바로 이어서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는 다시 바위를 깨고 있다. 러시아 학생들은 방학 때 무조건 모두 쉬지 않고 실습을 하는 기간에는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림 4) 추야와 까뚠이 만나는 곳
그림 5) 전망대의 오보와 까이라
그림 6) 지질학과 학생들의 현장 실습
그림 7) 방학중 알타이 전체가 교실
추야강과 까뚠강의 합수머리를 보고나서는 이제 까뚠강과 이별을 하고 추야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2시가 다 되어 추이스키 대로의 714km 지점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민속적인 알타이식 식사를 할 수 있는 모텔과 카페가 있다. 몽고계 여인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꾸바레프 교수와는 안면이 있는지 반가워한다.
온도가 37℃가 올라가고 건물 안에서도 29℃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다. 아침의 14℃에 비하면 23℃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여러 가지 전자제품에 쓰이는 전지들을 충전하도록 맡겼다. 여기서 우리는 입과 손으로 연주를 하는'카무스(러시아어 : 보르간)'라는 알타이 전통 악기의 연주를 들으며 낮밥을 먹었다. 말고기 소시지, 쿱치긴(알타이식 요구르크), 우유차 같은 간단한 메뉴인데 우리가 해먹는 음식만 못했다. 식당은 유목민 전통가옥인 유르타(몽골-겔, 중국-빠오)의 생김새대로 나무를 가지고 지은 식당인데 더위를 피할 수 있어 좋았다. 플루스닌 교수가 차를 마시며 유럽에서는 17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차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에서는 14세기에 이미 중국으로부터 수입해 마시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림 8)〉 말 매는 말뚝
〈그림 9)〉 몽골 여인이 운영하는 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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