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알타이어계인가?**
지금까지 알타이공화국 박물관을 세 번 관람하면서 갈 때마다 나는 한 파넬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바로 알타이어의 계보를 그려놓은 것이다. 이 표에는 분명 한국어가 들어가 있다. 알타이어 계통이라는 것이다.
〈표 〉 알타이계 언어
언어 그룹
언 어
뚜르크어 그룹
알타이어, 아젤바이잔어, 발카르어, 가가우즈어, 돌간어, 카자흐어, 카라차에프어, 키르기즈어, 쿠믜키어, 나가이어, 타타르어, 시베리아타타르어, 텔레우트어, 투빈어, 토팔라르어, 츄바쉬어, 우즈베크어, 쇼르어, 야쿠츠어, 아프샤르어, 바하를루어, 고우다리어, 카자르어, 카라고즐루어, 카라임어, 카라파파히어, 카쉬타이어, 켄게를루어, 나파르어, 피차그치어, 살라르어, 사르그-위구르어, 테이무르타쉬어, 터키어, 위그르어, 호톤어, 호로사니어, 샤흐세벤어, 에이난루어
일본어 그룹
일본어
퉁구스-만주어 그룹
나나이어, 네기달어, 오로끼어, 오로치어, 우데게이어, 울치어, 에벤키어, 에벤어
한국어 그룹
한국어
몽골어 그릅
부랴트어, 깔므이끄어, 몽골어
알타이어계란 원래 18세기 중반 스타라흐렌베르그가 제창한 알타이어족설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 분포는 유라시아대륙의 중앙부(그때 알타이지방이 본 고향이라고 생각하였다)를 중심으로 하여, 동으로 캄차카반도에서 서쪽으로 발칸반도까지, 북으로는 시베리아 북부에서 남으로는 중국 서남부까지 미치는 아주 광대한 지역이었다. 총 인구 약 6466만 가운데 투르크계 5864만, 몽골계 314만, 만주ㆍ퉁구스계 288만 등 3그룹으로 나누었다. 크게 보면 투르크계와 몽골계는 초원의 유목 생활에 적응하며 문화를 발달시켜온 것에 반해 만주ㆍ퉁구스계는 삼림에 살면서 수렵과 어로를 생활의 기초로 하고 있었다. 비록 여러 가지 특징 때문에 크게 3그룹으로 나누었지만 실제로는 투르크계가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국어는 바로 만주ㆍ퉁구스어에 속하기 때문에 알타이어 계통이 되는 것이다.
그 뒤 1928년 람스테드(Ramstedt)는 알타이어를 몽골어, 만주어, 투르크어, 한국어로 나누었다. 그러나 언어학자들 사이에는 알타이어족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까지 연구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4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① 한국어가 다른 알타이어들과 같이 친족관계가 있을 수 있다.
② 한국어의 조어(祖語)는 알타이어란 단일체가 형성되기 이전에 분열했을지 모른다.
③ 한국어는 원래 알타이어가 아닌데 한국어에 알타이어 바탕(언어학에서는 기층)이 있었을 수도 있다.
④ 한국어는 다른 알타이어들과는 계통이 다르다.
이처럼 한국어의 알타이계설은 유력한 설이긴 하지만 그 반론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람스테드 자신이 "한국어는 앞으로 더 연구를 요하는 불가사의한 언어이다"라고 했고, 1950년에는 "한국어를 용이하게 알타이어군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지에 살고 있는 알타이인들의 말과 한국말은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나는, 뒤에 나오겠지만 쿠체를라호수를 가면서 왕복 4일간 알타이인이 안내하는 말을 타고 함께 생활해 보았다. 여기서 여러 가지 단어를 말해보도록 하고 녹화도 하고, 말의 어조나 느낌 같은 데에서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지 여러 각도로 검토해 보았다. 물론 언어학에 대해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 이거다!'라고 할 만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내가 이처럼 얄팍하지만 나름대로 두 언어의 동질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스스로 커다란 의문이 생겼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알타이인은 그 많은 알타이계 가운데 어떤 알타이인인가?
사실 현재 알타이공화국 인구 약 20만 가운데 러시아인이 60%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알타이인은 31%이다. 그리고 카자흐인이 6%를 차지하는데 국경도시인 코쉬아가치에는 카자흐인인 50%이고, 알타이인은 50%가 좀 못 된다. 그런데 카자흐인들도 알타이어계 사람들이다. 우리는 알타이에는 처음 알타이말을 쓰던 사람들이 계속 살고 있고 그 말이 퍼져서 알타이어계가 된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러시아인들이 절대적 숫자를 차지하고 있듯이 역사의 변화에 따라 이곳에 사는 원주민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이곳 알타이의 역사를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사는 앞으로 알타이를 답사해 가는 과정에서 만날 수많은 역사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기 전 기초지식을 갖춘다는 점에서도 필요할 것이다.
길고 긴 알타이의 역사를 짧게 들여다보면, 알타이는 옛날부터 독특한 문명의 접합점에 있었다. 알타이 주변에는 다른 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많은 문화와 민족들이 형성되었다. 알타이의 옛 유적들은 대부분 강의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울러 산지 사이의 분지로 이어지는 스텝지역에 많이 나타난다.
***1. 석기시대**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초기 구석기시대의 유적 가운데 하나가 울라링까(Ulalinka)인데, 바로 알타이공화국의 수도 근처에서 발견된 것이다. 1960~1970년대 고고학자 오클라드니코프가 발굴한 이 유적은 45만~150만 년 전 유적으로 밝혀졌다. 그 밖에도 우스트-셰마, 데니소바, 우스트-칸 같은 데에서 많은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유목민으로 보이며 전략적으로 유리한 동굴들을 잠자리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기시대 유적들이 주로 동굴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알타이는 이처럼 인류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부터 인류의 삶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9) 우스트칸 석기시대 유적
***2. 청동기시대**
알타이 청동기시대는 초기, 발전기, 후기로 나뉜다. 청동기시대 초기 알타이에는 아파나시예보(Afanasievo)문화 단계의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B.C 4000년 말 ~ B.C 2000년 초기에 해당하는 아파나시예보문화 단계의 부족들은 주로 목축, 수렵, 채집에 종사하였는데, 이 문화 유적들이 몽골의 서부지역과 중국의 서북지역에서도 확인되었다.
인류학자들은 이 시기 인종들의 보통 키가 1.8m였고, 해골을 복원해 본 결과 유럽인종이었다고 한다. 한편 알타이 북부구릉지대와 삼림스텝지역의 볼쉐뮈스(Bolshemys)가 발견되었는데, 이 문화는 토기에 빗살무늬가 특징적이어 한국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발굴된 무덤형식이나 유물로 볼 때 몽골인종으로 밝혀졌다.
아파나시예보문화와 볼쉐뮈스문화가 오랫동안 섞이면서 BC 2000 ~ 1700년 사이에 까라꼴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복합문화의 형성과 함께 청동주물이 발전하고 도구와 무기가 개선되었으며, 특히 말갖춤(馬具)이 출현해 이 때 이미 마차운송이 가능해진다. 전차와 우수한 신무기의 개발은 주변 지역의 다른 종족에 비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까라꼴문화는 유럽인종의 피가 섞인 몽골인종이 주인공으로 밝혀졌다. 까라꼴문화와 같은 시기 알타이에는 끄로보프(Krobov)문화와 옐루닌(Yelunin)문화도 존재하였다.
알타이 청동기시대의 발전기는 여러 가지 문화가 모자이크되어 있다. 옐루닌문화와 비슷한 사무쇼-세이미니안(Samusho-Seyminian)문화가 알타이에 들어온 것은 서쪽의 안드로노보부족의 강력한 영향 때문이다. 안드로노보부족은 크로토프, 사무쇼, 옐루닌 같은 부족들을 흡수하고 계속해서 미누신스크지역까지 점유한다. 이 문화의 담당자들은 유럽인종이지만 아파아시예보 종속과는 다르다. 안드로노보문화의 후손들이 고대 아리안(Aryan)족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아리안인과 인도 - 아리안족은 BC 2.000년 초기 동유럽, 카자흐스탄 및 우랄 동쪽의 스텝지역에 고립되어 있던 인도 - 유럽어계 문화공동체였는데 그들이 안드로노보문화의 담당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의 언어는 BC 2000년 후반기 최대로 확장되어 인도 - 아리안족의 신성한 경전에 쓰인 베다어의 조어(祖語)였다. 청동기시대 발전기의 연대는 다양하다. 까라꼴, 옐루닌, 크로토프문화의 시작은 BC 2000년기의 ⅓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안드로노보인 서시베리아로 들어온 것은 BC 13세기이며, 하한 연대는 BC 11세기까지로 본다.
청동기시대 후기문화인 이르멘(Irmen)문화는 데니소바동굴과 마이마(Maima) 주거지에서 발견되었다. 인종학적으로 이르멘인은 몽골인종이 혼혈된 유럽인종이었다. 이르멘인은 큰 주거지에 살면서 목축과 농경에 종사하였다.
그림 10) 까라꼴 청동기 문화
***3. 철기시대(빠지리크 시대)**
빠지리크(Pazyryk) 문화는 B.C 6~2세기에 알타이에 존재한 문화다.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에서 온 강한 전투 기마유목민인 스키타이인들이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알타이에 살았던 주민들을 정복한다. 이 정복자들은 놀라운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앗시리아, 미디아, 이란의 고대 예술과 문화에서 채택된 것이다. 알타이문화와 이 정복자들의 전통이 합쳐져 나타난 문화를 빠지리크문화라고 한다.
빠지르크시대의 쿠르간은 알타이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울라간, 온구다이, 우스트 꼭신, 차르쉬 등등… 대형 꾸르간이 있는 반면 작은 것도 있는데, 작은 꾸르간은 대개 유목민들의 것이다. 꾸르간들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한 줄로 이어져 있는데 돌무지 밑 구덩이에는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상자들과 화려한 물건들(금속, 칼, 거울, 상아 장식품, 승마용 마구)이 발굴되었다. 속이 얼어있던 꾸르간에서는 나무, 가죽, 천 같은 것들도 발굴되었다. 빠지르크시대 꾸르간에 대한 연구는 발쇼이 울라간강 부근에서 발견된 5개의 꾸르간부터 시작된다. 1993년 노보시비르스크 고고민족학연구소 고고학자들은 우코크에서 젊은 귀족여인의 미이라를 발견하였다. 이 두 군데의 꾸르간에 대해서는 앞으로 직접 현장을 찾아갔을 때 자세하게 쓰기로 한다.
빠지리크문화를 형성한 사람들의 실제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논의가 있다. 중국의 연대기에 나온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는 월지(月支)족이라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그렇게 되면 문헌에 잘 알려진 것처럼 월지족에 종속되었던 슌누(Shunnu)일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슌(Shun)'은 원시알타이어 (proto-Altaian)로 '하늘' 또는 '해'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흉노족으로 잘 알려져 있는 훈(Hun)족들이 자신을 슌누라고 불렀다고 한다. 흉노란 중국 사람들이 주변을 비하해서 쓴 말이지 사실 훈족들은 자신을 하늘이나 해라고 불렀던 것이다. BC 4 ~ 3세기 서쪽으로 이동하던 훈족이 알타이에 정착하면서 B.C 3세기 빠지르크 문화는 귄노 사르마트(Gynno-Sarmat)문화로 바뀌었다. B.C 3세기 말에 유럽을 정복한 훈족(귄노들의 조상)의 결합은 중아시아에서 최초의 계급사회를 만들었다. 최근 20년 동안 고르노 알타이에서 20개의 당시 유적들이 발견되어 연구되었다. 우스트에디간(Ust-Edigan), 첸데크(Chendek), 볘르흐니이 우이몬(Berkhnii Uimon), 벨르이 봄(Belyi Bom), 비케(Bike), 아이뤼다쉬(Airydash) 같은 곳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유스띄드(Yustyd), 베르떼크(Bertek), 마이마(Maima), 쿠제를라(Kucherla) 같은 곳에서 발견된 유적들이 이 문화에 해당된다.
철기시대 유적은 무덤 이외에도 의전용 건축물과 멘기르(돌비석)들이 있다. 크기과 구조는 빠지르크 꾸르간과 비슷하고, 중국산 물건들이 발견되기도 하며, 대형 꾸르간에서는 많은 금제품들이 나왔다.
그림 11) 울라간의 빠지리끄 무덤4. 투르크(돌궐)시대
훈족들이 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1세기 이후부터 5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알타이의 역사는 완전히 안개 속으로 들어가 불분명해진다. 그리고 AD 6 ~ 10세기의 투르크시대에 해당되는 여러 유적들이 고르니 알타이에서 발견되었다. 이 때 알타이에 살던 인도ㆍ유럽민족들이 고대 투르크, 현재의 알타이족, 터키족, 몽골 족들의 조상들로 바뀌었다.
투르크는 중국 역사에서 돌궐(突闕)이라고 불렀는데, 처음에는 철륵(鐵勒 : 예니세이강 상류, 바이칼호 지방에 살았던 투르크 종족)의 한 부족으로서 알타이산맥에 거주하면서 유연(柔然 : 몽골지방의 고대 유목민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552년 그 가운데 한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의 족장 토문(土門 : 만인의 長이라는 뜻)이 유연·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하여 첫 카간국(可汗國)인 일리가한[伊利可汗]을 세웠다. 이 때 우리나라는 고구려가 평양에 거대한 장안성을 축조할 만큼 큰 힘을 발휘할 때이고, 중국은 남북조로 갈려 있을 때이다. 남조는 한족(漢族) 왕조인 송(宋)나라의 문제(文帝)에서 시작되어 제(齊)· 양(梁)· 진(陳)의 4왕조가 교체하는 혼란기였는데 한 나라가 24 ~ 60년 사이에 멸망이 계속되었다. 북방민족이 차지한 북조는 5호16국(五胡十六國)의 혼란을 수습한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고 동위는 북제(北齊)에게, 서위는 북주(北周)에게 교체되었다. 돌궐은 이처럼 안정된 북위가 무너지고 분열되는 혼란기를 틈타 나라를 세운 것이다.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 때는 동쪽으로는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으나 동족간의 다툼으로 583년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그 뒤 630년 당나라에 멸망하고 간접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682년 다시 몽골고원에 독립국가를 세워 한 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쳤으나, 다시 동족간의 다툼으로 쇠약해져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에게 멸망하였다.
알타이는 744년까지 투르크(돌궐)의 권력 아래 있다가 아시아의 중심인 위구르한국에 속했는데, 위구르한국이 쇠퇴한 뒤 840년 예니세이족에 예속되었다.
그림 12) 뚜르크시대의 돌사람
***5. 몽골과 중가리아의 지배시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뚜르크, 위구르, 예니세세이 키르기즈 국가들이 정치무대를 바꾸면서 AD 10세기 경 알타이의 주민들은 여러 투르크민족들이 혼합된 상태였다. AD 13세기 까지는 예니세이 키르기즈, 키마크, 코만, 키단, 나이만 같은 여러 민족들이 여러 국가들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 AD 13세기 초 키르기즈칸국이 칭키스칸에게 무너지면서 몽골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몽골에 정복당한 알타이인들은 지배자인 칸(汗)에게 가축, 모피, 무기와 금속 같은 공물(Yasak)을 바쳤고 칸의 군대를 위해 '피의 공물(군사)'도 바쳤다. 이 때문에 알타이의 인적 물적 자원이 고갈되게 되고 발달이 더디게 된 원인이 되었다. 13세기 중엽부터는 몽골이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나 계속해서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이 당시 알타이 동쪽에는 알타이 민족들과 이웃하고 있던 서몽골 오이라트족들이 힘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1635년 흩어져 있었던 오이라트들은 중가리아 왕국(Dzhunggrian Khanate)을 세웠다. 이 때 알타이는 남, 북 두 개로 나누어진다. 남알타이족들은 몽골, 중앙아시아와 남시베리아에 분포했다(뚜바, 브럇트, 몽골). 북알타이인들은 우랄쪽에 해당되고, 뚜르크, 사모디이, 케트 , 우고르 족들이 섞여 있었다. 고르니 알타이에는 남알타이 족들이 살았다(텔레쯔코예 호수, 추흐쉬만 강변, 추이강, 카툰강 지역).
***6. 러시아 지배 시대(18~19세기)**
1) 데미도프(1727~1745)와 카비넷(1747~1893)의 시대
18세기 초 러시아는 스웨덴과 20년 이상 계속되는 전쟁을 치루었다, 이 때 무기를 만들기 위해 구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뻬쩨르대제의 명령에 따라 구리와 은을 찾는 탐사대가 조직되었는데 알타이에서 광물 산지가 발견되었고, 이 소문은 우랄에서 거대한 공장을 운용하고 있는 데미도프에게로 흘러간다. 1727년 말 데미도프가 벨로이(Beloi)강이 흘러 들어오는 로크톄브켸(Loktyebke)에 구리 야금공장을 세운 것이 러시아 인의 알타이 첫 진출이다. 그러나 구리 야금은 경제성이 없어 폐기하고 은광산을 개발하여 자신의 우랄공장에서 은전을 주조하여 크게 성공한다.
1745년 데미도프가 죽자 엘리자벳 여왕이 그의 영지를 몰수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알타이는 카비넷(18~19세기 초 러시아 정부기관의 이름)시대가 시작된다. 이 때 중국은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멸망(1662년)하고 만주지역의 여진족(뒤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엄청난 기세로 영토를 넓혀 명나라보다 2배의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 때 청나라가 1756년 중가리아왕국을 병합하게 되었고, 알타이는 러시아에 속하게 된다. 그 뒤 알타이는 러시아의 발달된 야금술이 들어와 광산업이 빨리 성장한다.
1861년도에 농노 소유권폐지 이후 광산산업은 어려운 공황에 처하게 되고, 1893년 바르나울의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19세기 말 알타이의 주업은 농업이 되었고 도시에만 작은 공장들과 상업이 발전되었다.
2) 19세기 알타이
농노제 폐지 이후 유럽쪽에서 자기 땅을 찾아 시베리아로 이주하는 러시아인들이 알타이에도 들어왔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새로운 기술과 농업방식을 사용하여 농업과 축산업을 키웠고, 바르나울, 비스크, 즈메이나고르스크 같은 도시들은 상업센터로 발전하였다. 바르나울과 비스크는 특히 밀과 밀가루를 생산하는 농상업의 중요 센터가 되었다. 비스크를 통하여 몽골ㆍ청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19세기 말 알타이에서 대 상인가문들이 형성되었다. 19 ~ 20세기 섬유산업. 징게르(독일 재봉틀 회사), 농기구회사, 귀금속회사 같은 많은 러시아와 외국 회사들이 활동하였다.
3) 소비에트연방시대
1917년 12월에 볼쉐비키혁명으로 태어난 공산당들은 1918년 여름 체코슬로바키아 군들의 폭동 때문에 알타이에서 후퇴하였다. 이 지역에 공산당이 재집권한 것은 1919년 말이다. 1922년 오이로트 공화국이 형성되었고, 1948년 알타이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알타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알타이는 고대부터 유럽인, 인도인, 몽골인, 뚜르크인처럼 수많은 인종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우리처럼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알타이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인가?
자칭 알타이키쥐(알타이의 사람)는 러시아내에 6만9000명 가까이 되고, 그 가운데 5만9000명이 알타이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적은 숫자인 것이다. 알타이족이란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산지 알타이(알타이공화국)와 꾸즈네츠키이 알라따우(Kuznetskii Alatau)에 사는 민족들을 일컫는다. 따라서 현재 알타이족이 쓰고 있는 알타이어는 뚜르크어와 관련이 있다. 현대의 알타이족은 고대 터키의 부족인 위구르, 키막-킵착크, 예니세이 키르기즈, 오구즈 등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었다.
앞에서 보았지만 알타인은 4세기에 뚜르크의 부족 연맹에서 독립한 그들은 뚜르크(552~745), 위구르(745~840) 키르기즈(8세기~13세기 초)의 기초를 구성하였고, 몽골과 오이라트인을 받아들였다. 현대 알타이인들의 중요한 기초는 그 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처음에 제기했던 "우리말은 알타이어계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내가 갖는 결론은 우리가 한국어를 우랄-알타이어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고 그 가운데 남자에 속한다든가 여자에 속한다.'고 구분하는 것처럼 크게 나눈 것(大分類)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몽골로이드에 속한다고 해서 몽골과 한 핏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몽골로이드(Mongoloid)는 인도에서 동아시아 대륙, 태평양제도(諸島) 및 아메리카대륙에 분포한 인종으로 가히 세계의 절반 지역에 분포하는 인종을 말하는 개념이다. 몽골인종·황색인종이라고도 하며, 아이크슈테트의 인종분류에 따르면 몽골리데(Mongolide)라고도 한다. 코카소이드(백인종)· 니그로이드(흑인종)와 더불어 3대 인종군(人種群)이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에 그 뿌리를 형성한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아직 몽골이란 나라는 물론 그런 단어조차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몽골의 후손인가? 몽골로이드란 서양 학자가 인종을 크게 3가지로 나누면서 황인종은 몽골로이드라는 단어를 쓴 것뿐인데 우리가 그것을 몽골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정체성을 유라시아대륙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찾지 않고 서양 학자가 학문적 편의를 위해 만든 분류법의 명칭만 가지고 쉽게 단정해버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타이가 우리와 관계가 없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알타이의 친근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에는 돌로 만든 돌무지무덤이 없는데 반해 알타이와 고구려는 모두 돌무지무덤을 만든 전형적인 문화형태를 가지고 있다. 최근 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샤먼이즘을 통해서도 그런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이런 문화가 시베리아의 전반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화의 발생과 흐름에 있어서 시대의 앞뒤와 경로를 밝히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 막연하게 '우랄알타이어계'라는 암기식 지식에서 벗어나 알타이를 포함한 시베리아 문화에 대한 기본적이고 본격적인 연구부터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북방문화를 접하면서 내가 깨닫는 또 다른 하나의 큰 반성은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중국과 우리의 관계만 가지고 전체 역사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 동안 모든 우리 역사를 중국의 역사서에 따라 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중국사에서 자기 역사라고 하는 흉노, 돌궐, 5호16국, 북위, 거란(요), 몽골(원) 같은 것은 분명 중국의 중원문화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고 이런 민족과 국가들은 중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우리와 연관을 가지고 교류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역사를 이런 3각구도에서 보아야 한다는 자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소득이었고, 앞으로 이런 새로운 역사 인식에서 연구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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