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행(五行)이 재미난 근본적인 이유는 '다섯'이라는 숫자로 사물의 변화와 발전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처럼 '다섯'이라는 숫자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오행이 유일하다.
반면 '넷'이라는 숫자로 설명하는 사상은 대단히 보편적이다. 고대 인도의 사대(四大), 즉 땅과 물, 그리고 불과 바람이라는 식의 설명이나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4 원소설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중국의 주역(周易) 역시 '사상(四象)'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처럼 '4'로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더 많은 까닭은 인간의 인식구조가 기본적으로 이분법(二分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음(大小), 길고 짧음(長短), 높고 낮음(高低), 밝고 어두움(明暗), 멀고 가까움(遠近), 열거하면 한없이 많겠지만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 언제나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인지한다. 이런 것이 바로 이분법이고 이원론(二元論)도 이런 바탕위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그런데 사물을 이런 식의 이분법으로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크고 작음이 아니라, 큰 중에서도 작거나 작은 것과 함께 작은 중에 큰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4'로서 세상을 보는 법이고 이분법보다 진일보한 방식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데 그 까닭은 이분법이나 그로부터 발전된 '4'로서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중간'이라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세상은 중간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데, 중간이 있어야만 균형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이 존재하려면 새로운 접근법이 요구된다. 그것은 앞서 대소(大小)와 고저(高低)를 열거했지만 이를 대중소(大中小)라든가 고평저(高平低), 이런 식으로 사물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사물을 세 가지 상태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접근법은 인간의 지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단히 어렵고도 난해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복잡하다는 점, 바로 우리 두뇌를 어지럽게 만든다는 점을 지닌 것이다.
이 탓에 서구나 다른 문명권에서는 이와 같은 난해한 접근법이 발달하지 않았거나 대단히 부진한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대중소와 같은 생각은 결국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 이상한 그 무엇을 인정한다는 것인데 이런 것은 흔히 하는 말로 '클리어(clear)'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분명히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만이 우리의 인지와 사고는 가일층 성숙될 수 있는 법이다. 유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중용(中庸)은 이와 같은 것을 인지하고 활용할 때만이 성립 가능한 것이다.
"With us or against us?"
아군이냐 적군이냐를 묻는 이 말은 과거 필자가 봤던 영화에서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파리 시경국장에게 들이대면서 결단을 촉구하는 대사이다. 이런 것이 이분법이고 또 이원론이다. 또 3년 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독촉할 때 우리에게도 썼던 말이기도 하다.
세상을 둘 중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은 참으로 명쾌한 것이지만 때로는 많은 문제를 낳는다. 적도 아니고 동지도 아닌 자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기에 말이다. 그런 자들을 동지가 아니라 해서 적으로 몰아붙인다면 세상은 적으로 가득할 것이고, 동지로 믿어버린다면 그 세력은 허장성세에 불과할 것이다.
이분법이 지닌 치명적인 약점은 이처럼 세상을 선과 악으로 재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선악으로 나누는 방법은 결국 무협소설이 되고 만다. '너 흑도(黑道)냐 나 백도(白道)다, 그러니 칼을 뽑자' 식이 되는 것이다. 무협소설이라면 그래도 허구라 다행이지만 실제 세상이 이런 식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을 앞세워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서구 문명 속에 도사린 사고는 여전히 이런 이원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중용의 사상을 지닌 동아시아인들의 사고 속에는 '중간'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세상을 '3'으로 볼 수 있는 관념 체계가 뿌리 깊게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행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오행이 재미난 것은 결국 '2'와 '3'이라는 두 체계의 결합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둘과 셋을 합치면 다섯이 되는 것이다.
오행은 목화토금수의 다섯인데 최초에 생겨날 적에는 원시 유물론적인 경향을 보였지만, 그것이 추상화되고 세련되어지면서 오행의 다섯 가지는 하나의 상(象)을 대표하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그 유용성과 응용성이 엄청나게 풍부해졌다.
오행은 분명 주역(周易)사상과 출발이 다르다.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앞서 얘기했듯이 주역은 둘에서 넷, 그리고 여덟, 나아가서 64로 발전이 세분화된다. 이런 주역 사상은 사실 서구적인 것과 더 가까우며 그것이 만들어진 것도 중국대륙 서쪽 깊숙한 곳이다.
이에 비해 오행은 발해만 일대의 동이(東夷)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상이다. 중국 문화란 결국 크게 볼 때 중국 서쪽의 대륙 문화와 발해 일대의 해양 문화의 결합인데 이를 그들은 염황의 후예, 염제와 황제의 후손이라고 내세우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황제는 동쪽 바닷가에 속하는 문화적 전통을 지니며 실은 우리 동이 문화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어쩌면 황제(黃帝) 자체가 우리 동이족의 한 갈래이며 북아시아의 단군 계통보다 먼저 남쪽으로 내려와 발해만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동이의 갈래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오행은 그렇기에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가 결합한 육십갑자를 그 응용의 틀로 삼고 있다. 십간은 5의 배수이며, 십이지는 3의 배수인 6, 그리고 다시 두 배가 된 12에 근거를 둔다. 그렇기에 60 갑자는 모든 변화의 수가 되는 것이다.
유교에서 중용이라는 것이 부각된 것도 결국은 오행에 들어있는 '3'의 관념, 즉 세상에는 중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제 오행에 대해 얘기했으니 '오운육기'란 것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오운육기란 원래 일종의 기상학(氣象學)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이 없었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런 옛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실은 억지로 꿰맞춘 오운육기가 오늘날에는 무척이나 신비한 것 인 양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다. 특히 오운육기는 주역 사상과 결합되면서 대단히 난해하고 현학적인 설명을 앞세우는 바람에 더더욱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오운(五運)이란 하늘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서 오행의 목화토금수를 그대로 쓰고, 육기(六氣)란 땅의 기운으로서 풍(風), 화(火). 서(暑), 습(濕), 조(燥), 한(寒)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육기 중에서 풍(風)은 문자 그대로 바람이 부는 계절이고 화(火)는 따뜻한 때이며, 서(暑)는 무더운 계절이며, 습(濕)은 축축한 계절이며, 조(燥)는 건조한 계절이며 한(寒)은 추운 계절을 말한다.
그런데 육기를 오운과 짝을 짓기 위해서 목화토금수가 아니라 화(火)중에는 군화(君火)가 있고 상화(相火)가 있는 식으로 해서 여섯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는 논리적으로 지리멸렬이다. 나머지 기운은 모두 공평하게 하나씩인데 왜 불은 두 개가 되어야 하는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동양학이 지닌 논리비약이고 무질서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주역 사상과 오행을 마구 결합하고 비약시킨 중국인들의 비논리성에서 기인한다.
이런 논리적 무질서를 정리하고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난해하지도 않고 실은 대단히 쉽다. 다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다음 글로 넘기고자 한다.
***〈알림〉**
제13기 음양오행과 명리학 기초강좌를 시작합니다. 4월 8일 토요일에 첫 강좌를 시작합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4시간씩 양재역 근처의 강의실에서 열게 됩니다. 물론 휴식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 1회씩 3개월간 진행됩니다. 따라서 전체 강좌 시간은 52시간이 됩니다.
음양오행과 명리학이란 결국 삶과 세상의 변화를 또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고 내다보고자 하는 노력이자 학문입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02-534-7250 으로 문의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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