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과 헤어진 뒤 김식은 바로 이중의 별채를 떠나지 못했다. 하루 뒤, 칠원(漆原)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온 이중을 만나고서야 안심하고 떠났다. 아직도 칠원 현감은 하정(河挺)이 맡고 있었다. 김식은 선산의 적소에 있을 때부터 하정을 만나고 싶어 했는데, 무과에 급제한 하정 역시도 기묘년에 화를 입은 사람이었다. 사화 전 조광조와 김식 등에 의해 승지로 추천받았으나 오히려 그런 전력 때문에 중앙 내직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부사에서 현감으로 좌천됐으므로 김식은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김식은 하정에게 단 한마디라도 위로를 해주고 무주로 도피할 계획이었다. 김식은 소옥이 잠 든 한 밤중에 별채를 나와 지역의 지리에 밝은 이중의 안내를 받아 길을 나섰다. 이중이 소옥을 깨워 작별인사를 시키려 했으나 김식은 그러지 못하게 했다. 만약에 자신의 도피처가 밝혀져 소옥이 문초를 받는다면 자신의 행선지를 모르는 것이 죄를 더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김식은 이중에게 이러한 당부만은 잊지 않았다.
"전하께서 나를 불러 다시 세상에 나아간다면 나는 소옥이를 잊지 않을 것이네."
"소옥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늙은 아비가 있다 하니 집으로 보내주게. 그것이 자네나 나나 도학(道學)을 공부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첩으로 데려온 소옥이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주는 것도 하늘의 도가 아니겠는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군자라네."
도학이란 유학의 관념이나 문장에 빠지지 않고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말했다. 도학의 목적은 한마디로 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의 도학 정맥은 여말선초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길재로부터 발원하여 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우음산은 이중이 마련한 먹을거리와 잡물들이 많아져 지게를 지고 따랐다. 달빛이 밝아 산길을 오르내리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멀리서 휘파람새가 잠들지 못하고 후이 후이 하고 울었다. 소옥이 잠에서 깨어나 흐느끼고 있는 듯도 했다. 휘파람새가 운다는 것은 봄이 먼발치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이신은 영산에서 서쪽 방향에 있는 무주로 가지 않고 문경으로 올라갔다. 영남대로를 타고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신은 처음에 이중이 김식을 숨겨주었다고 고발하여 이중 부인에게 수모당한 것을 앙갚음할 생각만 했으나 차츰 생각이 독하게 바뀌었다.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 역마다 김식을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내린다는 방을 보고는 악심을 품었다. 김식의 행선지를 고발하여 그가 잡힌다면 자신은 노비의 신분에서 면천(免賤)이 되고, 낙안에서 도망친 죄를 사면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금부로 가서 고발하자. 군이나 현에 고발한다면 놈들이 내 공을 가로챌지 모른다. 금부로 가서 도사에게 직접 고발하자. 내 한 마디에 이중 집안은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대사성 나으리에게는 황송한 일이지만 어차피 붙잡혀 죽을 목숨이 아닌가. 산지사방에 체포령이 내려 방이 붙어 있는 판에 어디로 숨는단 말인가. 나, 이신처럼 운이 좋아 살 사람은 살아야 될 것이 아닌가. 노비의 족쇄를 풀고 승복도 벗어버리고 이제는 나도 사람답게 살아야 될 것이 아닌가.'
김식의 주역 점은 적중한 셈이었다. 주역의 팔괘를 풀었을 때 산인(山人)이 일을 그르친다는 점괘가 나왔던 것이다. 이중의 조언과 소옥의 예감이나, 이중의 배다른 동생인 이용이 '이신을 죽여서 말이 나지 않게 하자'는 주장도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 되었다. 죄인으로 관사 옥에 보낸 뒤 나졸에게 청부하면 곤장으로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심지어는 숨통을 끊어놓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식은 이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하정이 기다리고 있는 칠원을 향해 갔다. 설령 이신이 자신을 배반하더라도 하늘은 덕을 베푼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늘은 무심한 것 같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仁)이면 인이지 어찌 작은 인이 있고 큰 인이 있겠는가. 작은 웅덩이의 물이나 바다의 물이나 그 근본은 같은 것이다.'
김식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하정은 칠원의 길목에서 김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했다. 김식은 하정을 만나 위로하려고 했지만 하정은 그 반대로 김식을 보자마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음인지 참담해 했다. 칠원 현감 하정은 망명 중인 김식의 초라한 몰골을 보더니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공, 밤중에 이곳까지 나오게 해서 미안하오이다."
"무슨 말씀이오. 노천의 신세를 번번이 지고서도 갚지 못했습니다. 오늘 밤은 관사에서 주무시고 내일 저의 본가로 가 푹 쉬시도록 하시지요."
"피해를 보지 않겠습니까."
"피해는 무슨 피해가 있겠습니까. 무부(武夫)로서 의리를 지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옵니다."
하정은 무과에 급제한 무부답게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외직으로만 돌았기 때문에 중종을 보필한 적은 없지만 승지 같은 내직의 벼슬로 끌어올리려는 김식의 호의를 늘 고맙게 여기고 있던 그였다.
"노천, 걱정하지 마시오. 이 촌 구석에서는 대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쉬셔도 됩니다. 저도 관사 아전들에게 서울에서 온 손님이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사실은 하공께 위로의 말을 드리려고 왔습니다만 제가 위로를 받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노천의 깊은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이까. 그러니 마음의 부담일랑 털어버리시고 그저 고향집에 오신 것처럼 편히 쉬었다 가십시오."
김식은 관사 안으로 들어가고, 이중은 영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음산은 객사로 가 지게에 얹힌 짐을 부렸다. 김식은 문득 소옥을 떠올렸다. 영산에서 칠원까지 두 번 쉬었을 뿐 서둘러 걸었어도 힘이 남아 돈 것은 소옥이 덕분이었다. 그녀가 간병을 잘했기에 장독이 다 가시고 완치되었던 것이다.
관노가 나타나 김식을 시종하고자 하였으나 김식은 그를 물리쳤다. 가능하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도피하는 데 유리할 터였다. 비록 하정의 명으로 접대는 받고 있으나 자신은 체포령이 내려져 쫓기고 있는 수배자의 몸이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도 수시로 두려움이 엄습하기 때문이었다.
날이 새어 하정의 본가로 옮겨지고 난 후에야 김식은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관가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장소인 데다 아침에 관사의 동문에서 무심코 본 것인데 온갖 수배자의 방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정의 본가도 며칠이 지나자 안심하고 은둔할 만한 장소는 못되었다. 마침내 이신이 서울에 도착하여 의금부 도사를 만나 김식의 도피처를 낱낱이 고해바친 탓이었다. 의금부는 발칵 뒤집혀 금부도사는 칠원으로 향했고, 어영청의 장수는 영해로 달렸다. 김식 일행이 칠원에 들른다고 하였고, 선산 적소에 있을 때 '나를 용납해 줄 사람은 오직 영해 부사 이윤검뿐'이라고 이신에게 말했던 것이다.
하정의 전갈을 받은 김식은 심장의 통증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술은 진통제처럼 통증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김식은 술을 몇 잔 마신 다음 오랜 만에 먹을 간 뒤 붓을 들었다. 붓은 김식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초라한 자신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묵향이 코끝에 스밀 때쯤에는 눈물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반듯하게 편 두루마리 한지에 비친 아침 햇살이 너무나 눈부시어 우울한 마음이 서러움으로 변했다.
자신을 버리고 내친 중종이지만 털끝만큼도 증오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휘둘리는 중종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김식은 심호흡을 한 뒤 옷매무새를 살피고 나서 북쪽을 향해 큰절을 했다. 그런 다음 붓에 먹을 듬뿍 묻혔다.
〈망명한 김식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조그마한 정성을 주상 전하께 토로하옵니다. 신이 이미 전하를 저버리고 망명하였으니 지극히 사람답지 못한 줄 아옵니다. 다만 신의 망명이 또한 공연한 일이 아닌 만큼, 그릇된 소견을 간략하게나마 토로하여 전하로 하여금 원대한 생각을 하게 하겠사옵니다.
신이 비록 사람답지 못하나 옛 사람들의 처신하는 방법에 대해 대략 알고 있는 만큼 구차히 사는 것이 부끄럽고, 수절(守節)을 숭상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반드시 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는 것은 흉악한 이들이 장차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는 것을 보고 조그마한 충의를 바치려고 하는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조금이라도 굽어 살피소서.〉
김식은 붓끝이 떨려 잠시 붓을 벼루 위에 놓았다. 그는 두어 번이나 심호흡을 하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겨우 진정했다. 비록 부치지 못할 상소문이지만 자신의 몸에 부적처럼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위안을 받고 싶었다. 김식은 다시 붓을 들었다.
〈신이 당초 죄를 입을 때 화를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 들었사옵니다. 심정과 남곤은 본래 탐욕스럽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소인으로서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하자 가슴속에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키려고 생각한 지 오래였사옵니다.
다만 그 틈을 얻지 못하다가 조광조가 전하의 신임을 받아 학자들이 함께 따르고 또 백성들이 칭찬하는 동안, 그들은 허망한 참문(讖文)으로 전하의 마음을 흔들고, 또 굴욕을 당해 불평하는 몇몇 정승들을 사주하여 드디어 사림의 화를 만들어 이름 있는 선비를 모두 당적(黨籍)에 올리고 말았사옵니다.
마침내 완악하고 어리석으며 몰염치한 이들로 조정이 채워지고 그 인척인 이빈(李蘋)을 대사간으로 삼아서 대관(臺官;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 중에서 약간이라도 청론(淸論)하는 자가 있으면 이빈을 시켜 공격하여 내쫓게 함으로써 전하의 이목을 가렸사옵니다. 또 남곤과 더불어 많은 무사들을 모아 밤낮으로 집을 채운 것은 그 속셈이 어찌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조정은 전하의 조정이 아니요 남곤과 심정의 조정이니, 전하의 형세가 또한 외롭고 위태하지 않사옵니까.〉
김식은 또 다시 붓을 벼루에 놓았다. 남곤과 심정이 눈앞에 어른거려 이를 소리 나게 악물었다. 그러자 입술이 깨물려 붉은 핏방울이 한지에 떨어졌다. 그렇다고 깨끗한 한지를 구해 다시 쓸 생각은 없었다. 핏방울이 떨어진 한지에 자신의 심중을 토로했다.
〈신이 이 때문에 마음속에 감추고 참으며 망명하여 간흉들이 전하를 핍박할 때를 기다려 몸을 빼내 달려가서 전하의 깊은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 신의 본뜻이옵니다. 전하께서 조광조를 의심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며, 신을 죄 주신 것 또한 본심이 아님을 깊이 알고 있기에 이같이 간절히 아뢰옵니다. 전하께서 다행히 소신의 진심을 깊이 살펴 정세를 관찰한다면 간흉들의 실정을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시종 깨닫지 못한다면 조종(祖宗)을 어찌하며, 사직을 어찌 하겠사옵니까.〉
이쯤에 이르러 김식은 소리 내어 울었다. 이를 악물었으나 입술이 깨지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김식은 떨리는 붓을 놓지 않았다. 글씨마저 감정에 휘둘려 심하게 흔들렸으나 김식은 결코 붓을 놓지 않고 끝을 맺었다.
〈명사(名士)를 다 죽이고도 나라가 유지된 일은 없었사옵니다. 소신의 한 몸은 돌볼 바 아니나 신 때문에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바로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이옵니다. 감히 이로써 아뢰옵니다.〉
김식이 평상심을 되찾고 좌정하고 있는데 하정이 본가로 찾아와 급히 문을 두드렸다.
"노천, 계시오이까."
"들어오시오."
하정은 방에 앉자마자 금부도사가 칠원으로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역의 우관에게 들었으니 틀림없소이다. 잠시 피신했다가 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공, 나를 접대한 것이 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오."
"붙잡히면 노천의 뜻을 펼 수 없으니 어서 피신하셔야 합니다."
"고맙소."
"폐주(廢主; 연산군) 때 도망쳤던 희강(希剛; 이장곤의 자)이도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노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아니 됩니다."
"하공, 우리 다시 좋은 세상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소."
"반드시 만나 좋은 세상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지요.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소이까. 다만 어느 때라고 기약할 수 없으니 서글퍼지오."
김식은 하정과 이별주를 마신 후 우음산에게 짐을 꾸리게 했다. 자신은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렸다. 이제 갈 곳은 무주 오희안의 집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음산이 반대했다.
"나으리, 이신이란 놈이 다 불었을 것입니다요."
"음산아, 가자. 이신은 이신이고 하늘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음산은 발길이 내키지 않은 듯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느리게 걸었다. 그것도 낮에는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밤에만 지리산으로 향했다. 가다가 사람을 마주치면 신고할까 두려워 산속으로 들어가 이삼 일 후에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상투를 틀지 않은 우음산은 김식보다 자유로웠다. 천민의 신분이기에 걸식을 하러 마을을 다녀올 때도 있었다.
우음산은 길에서 만난 농부에게 들은 얘기를 김식에게 전해 주기도 했다. 김식은 하정의 얘기를 들을 때 귀를 막았다. 금부도사와 창녕 현감 성희문(成希文)은 하정을 체포하지 않고 도망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먼 변방에 귀양 보내졌다고 하며, 하정은 결국 붙잡혀 매일 400여 대의 장을 치자 기묘년에 김식과 간당(奸黨)을 모의했다고 허위 자백하고는 사형 당했으며 가산을 몰수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해 부사 이윤검은 서울로 끌려가 국문을 당했으나 증거가 없으므로 죄는 면했으나 파면되었다는 것이었다.
김식은 이중의 얘기를 듣고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을 받았다. 자신이 영산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이중이 도사에게 붙잡혀 금부로 압송되어 갔는데, 특히 심정이 이중을 죽이려 들었다는 것이었다. 국문할 때 추관(推官)인 심정이 이중의 친척이라고 속이고 곤장을 든 나졸에게 사사로이 이렇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보게, 처자를 이끌고 변방으로 귀양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죄인이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심정이 나졸에게 한 지시는 죄인을 심하게 쳐 죽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심정은 영산의 이중이 김식의 애제자이기 때문에 죽이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에 김식은 심장이 터지고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중은 곤장을 7대를 맞고서는 "이미 김식 어른을 은닉했다고 자백했는데 어째서 다시 곤장을 치는가" 하고 큰 소리로 대들자, 추관인 심정은 그만 할말을 잃고 이중 가족을 부령(富寧)으로 귀양 보냈다는 것이었다.
김식은 밤길을 이용하여 무주로 가면서도 내내 오희안의 집으로 갈지 말지 망설였다. 자신이 들리고 나면 예외 없이 잡혀가 귀양을 가거나 가산을 몰수당할 것이니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음산아,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김식이 거창의 수도산 남쪽에 이르렀을 때였다. 봇짐을 머리에 인 장사꾼 아낙에게 오희안도 김식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누명을 쓰고 온 가족이 벽동(碧潼)으로 귀양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희안마저 귀양 갔다는 소식은 김식을 밑도 끝도 없는 절망 속으로 빠트렸다. 김식은 무주로 가지 않고 수도산으로 올라갔다. 멀리 발 아래 절이 보이는 산기슭까지 올라갔다. 구름이 몰려오면 운해에 가려 절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극도로 불안해진 김식은 우음산이 마을로 나가 해오는 음식도 입안에 넣을 수 없었다.
마침내 김식은 우음산이 마을로 나가는 것조차 금했고, 연기가 나니 불을 피울 수 없었으므로 끼니 때가 되면 바위 동굴에 숨어 솔잎과 생쌀을 씹어 허기를 달랬다. 나물 잎과 칡을 씹어 요기를 했다. 그러나 남은 한 되의 쌀마저 떨어지자, 김식과 우음산은 물과 어린 생고사리만으로 버텼다.
그것도 며칠뿐이었다. 먹었던 것을 토악질했다. 김식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을 보곤 했다. 삯바느질을 하는 아내와 칼을 찬 아들이 보이기도 했고, 갑자기 조광조가 나타나 헛헛헛 웃고 사라지기도 했다. 중종은 김식에게 술을 권하기도 했고 소옥이 나타나 소리 없이 울고 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숨겨준 하정과 이중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가기도 했다.
'하늘이 나를 버리려 하는구나.'
아직도 힘이 남은 우음산이 눈동자가 흐려지는 김식을 흔들었다. 그러면 김식은 다시 정신이 돌아온 듯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음산아, 세상 사람들하고 이별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나서 나를 오라고 손짓하는구나. 정녕 면치 못하겠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으니 면치 못하겠구나."
"나으리, 무엇을 면치 못하겠다는 것입니까요."
"너는 아직도 모르겠느냐."
"모르겠습니다요."
"자살을, 자살을 면치 못하겠다는 것이야. 쯧쯧."
"서울에서 마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요. 그러니 그런 말씀 마셔요."
김식은 그럴 가망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호주머니에서 흰 돌멩이를 꺼내 반반한 바위에 한 자 한자 써나갔다.
날은 저물어 하늘은 침침한데
산은 텅 비고 절은 구름 속에 들었네
군신간의 천추의 한
외로운 나의 무덤 어느 곳에 묻히려나.
日暮天含墨
山空寺入雲
君臣干載恨
何處有孤墳
김식은 또 무언가를 쓰려다가 기진맥진하여 흰 돌멩이를 떨어뜨렸다. 며칠째 밥을 먹지 못하여 작은 돌멩이조자 천근처럼 무거웠다. 배를 적실 것은 고제원(高梯院)으로 졸졸 소리치며 흘러가는 계곡의 물뿐이었다.
"음산아, 물이라도 마시고 싶구나."
김식은 우음산이 물을 뜨러 간 사이 남쪽을 향해 흐느적거리며 두 번 절을 했다. 중종이 있는 북쪽으로 절을 하고 싶었으나 이미 방향감을 상실한 탓이었다. 김식은 우음산이 떠온 물을 두 그릇이나 맛있게 비웠다. 물을 술이라고 생각하고 마시자 힘이 좀 났다. 김식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불에 익힌 고사리가 먹고 싶구나."
"마을로 가 불을 구해 올 테니 기다리셔요."
"어서 다녀 오거라."
김식은 며칠째 생고사리만 씹어 먹었던 탓으로 구역질이 났지만 사실은 우음산이 옆에 있는 것이 미안해서였다. 사별하는 마당에 충직한 우음산이 자리를 잠시 뜨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우음산이 마을로 간 사이에 김식은 나무 가지에 삼끈을 늘어뜨리고 목을 맸다. 그러고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또렷한 소리로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암(靜庵; 조광조의 호), 자네가 보고 싶으이. 나 지금 자네를 만나러 가네. 아직도 능주 쌍봉사 동편에 누워 있는가. 정암, 조금만 기다리게. 나 그곳으로 가는 중이네. 우리 저 세상에서 지치(至治)를 이루어 좋은 세상을 만드세. 전하를 모시고 왕도(王道)의 태평성대를 이루세.'
우음산이 마을에서 불을 구해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김식의 사지는 차갑게 축 늘어져 있었다. 동공은 풀어져버렸고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우음산은 저문 하늘을 노려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수도산 산속의 승려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암자의 승려들은 목 맨 시신이 기묘년에 대사성을 지낸 39세의 대장부 김식인 줄 아무도 몰랐다.
다음날 오후, 거창 현감이 나타나 김식의 소지품을 뒤졌을 때, 그의 무명저고리 속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부적처럼 간직하고 다녔던 핏방울로 얼룩진 상소문 한 장뿐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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