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알타이로 직행**
1시간 반이 지나서야 공항을 나오니 오 다찌아나 여사와 아드님이 버스를 가지고 마중 나와 있었다. 오 다찌아나 여사는 알타이의 수도 바르나울에 사는 고려인협회 회장으로 이번 여행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03년과 2004년에는 한국에서 4명, 러시아에서 4명, 모두 8명으로 단촐한 답사단이었고 믿을 만한 러시아 학자들과 같이 하는 답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러시아 측에 맡기면 되었다. 그런데 막상 단체로 여행단을 구성하기로 하고 현지 여행사를 접촉하는 과정에서 정말 난감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경우 보통 한국에 있는 여행사에게 맡기면 여행사간의 계약을 통해 일정을 추진하고 손님들은 그 여행사를 믿고 여행에 참가한다. 그러나 알타이 여행은 아직 여행사에서 상품개발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러시아 여행사와 접촉을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여행 준비에서 가장 힘든 일은 헬리콥터를 수배하고 가격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내가 이처럼 헬기를 고집한 것은 만일 버스로만 계획을 짤 경우 오고 가는 데 4일이 걸려 결국 알타이 공화국의 입구 정도만 보고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알타이의 진수를 몇 군데라도 맛보려 한다면 헬기를 이용하는 것 빼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선 세 도시의 여행사들에게 헬기 가격을 물어보니 모두가 가격이 다르고 그 차이도 엄청나게 컸다.
가격 말고도 산지 알타이를 다니려면 기름을 넣기 위해 3, 4번 다시 도시로 왔다 가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리고 가격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지에서도 내가 제시한 일정을 해본 여행사가 한 군데도 없고, 모두가 이번 기회에 새로운 코스를 개발한다는 뜻에서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많이 망설이고 있을 때 여행사의 소개로 현지 고려인 협회 오 여사님을 알게 된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이번 여행은 오 여사님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큰 낭패를 볼 뻔 했다. 헬기 사용시간이 무려 16시간이 되어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나자 마지막에 담당 여행사가 손을 떼어버렸고, 그 뒷감당을 모두 오 여사님이 해 주었기 때문이다.
3시 30분 공항을 떠난 버스는 노보시비르스크를 들어가지 않고 우회도로를 이용하여 바로 바르나울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오 여사가 유창한(?) 한국말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이곳에 사는 고려인들은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 여사는 한국말을 아주 잘 하는 편이다. 시베리아에서 우리말을 잘 하는 고려인을 만나면 대부분 '사할린 출신'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오 여사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할린에서 우리말을 썼고, 남편도 사할린 출신 고려인이라는 환경이 아직도 우리말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른 한 편 주로 녹용을 사러 알타이에 오는 한국인들을 안내하고, 한국과 상거래를 하면서 한국을 자주 다녔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데 상당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 호수는 '바다'라고 합니다. 원래 스탈린 시절 발전소를 만들기 위해 막은 것인데 커서 바다라고 합니다."
바이칼보다 더 크다고 해서 나중에 확인까지 하였으나 역시 바이칼에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다. 다만 조국에서 온 한국인에게 하나라도 더 잘해 주려는 마음씨가 말투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 1시간 뒤 벨스크를 지날 때는 러시아에서 가정 유명했던 라디오공장에 대해서 아주 실감나는 안내를 해 주었다. 지금은 사양산업이 되었지만 오 여사가 젊은 시절 라디오를 만드는 도시는 대단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은 휴양지로 유명한데, '바다' 가에 타이가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서있는 별장들과 강가에 기다리고 있는 보트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5시 40분, 바르나울이 92㎞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오고 이어서 노보시비르스크주에서 알타이주로 넘어가는 경계를 지나자 바로 점심 식사를 하기로 예약한 까페(KAФЕ)에 다다랐다. 5시 50분이니 2시간 20분을 달려온 것이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알타이로 가는데 거의 중간쯤 되고 또 식사를 할 수 있어 대부분 길손들이 이곳에서 쉬어간다. 그러나 식사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2시간 뒤 바르나울에 도착하면 맛있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다니 모두들 참을 수는 있었지만 러시아의 현실을 바로 느껴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간단히 음료수 같은 것을 사서 시장기를 때우고 차가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버스가 서버린다. 초반부터 한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현지 적응 교육을 톡톡하게 시키는 것이다.
차가 서버려 시간은 걸렸지만 평지 알타이를 달리는 단원들은 창밖에 스치는 경치에 넋을 잃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감자밭, 옥수수밭, 밀밭이 이어지다 어느새 소나무, 자작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타이가 속을 달린다.
"저렇게 곧게 솟은 나무는 처음 본다!"
나이가 지긋하신 박교수가 감탄을 하자마자 오 여사의 타이가 자랑이 바로 이어진다.
"숲 속에는 버섯, 딸기 같은 무공해 식품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울러 모기가 많아 숲속에서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과, 새벽 4시가 되면 모기도 자기 때문에 아주 이른 새벽에 가면 쉽게 버섯을 딸 수 있다는 실전경험까지 자세하게 일러준다.
***신기한 시베리아의 경치 다차**
시원한 들판을 달리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차'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4시간 이상 달리는 동안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마을들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 이 다차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다. '다차'는 보통 '별장'이라고 번역하는데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일반화된 문화이다. 유럽에서 주로 도시의 중산계급들이 교외에 주말 채소밭을 겸해서 간단한 별장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습관이 19세기 러시아에 들어와 널리 퍼진 것이 다차이다. 혁명 뒤 다차는 특권계층에게만 보급되었는데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중산계급까지 확대되었다. 한 때 이 다차는 자동차, 텔레비전과 함께 러시아 국민의 '세 가지 신기(神器)'라고 불릴 정도였다.
다차는 주로 개인 것도 있지만 단체나 회사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공동 다차도 있다. 저택처럼 호화로운 것도 있지만 오두막처럼 조그맣게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차는 12솟까지 지을 수 있는데 땅이 좁은 도시에서는 6솟으로 제한합니다."
오여사가 정확하게 정의해 준다. 1솟은 10×10m라고 한다.
다차는 주말을 보내는 별장일 뿐 아니라 도시 주민에게 있어서는 열악한 먹을거리 사정을 해결해 주는 중요한 밭이 된다. 감자, 당근, 레디쉬(빨간 무), 양배추 같은 채소는 물론 사과나 자두 같은 과일들, 그리고 잼을 만드는 복분자 같은 것도 많이 심는다. 대부분 서민들은 이곳에 추수를 해 겨우살이를 위해 저장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 든 노인들은 이곳에서 농사지은 것을 길거리나 시장에 가지고 나와 팔아 용돈을 마련하기도 하다.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서면 많은 노인들이 다차에서 생산한 물건들을 파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일행들은 여행 도중 내내 참 많은 다차를 구경할 수 있었다.
예정보다 1시간쯤 늦었지만 8시 알타이주의 주도인 바르나울에 도착하였다.
〈사진?〉 시베리아의 아테네 바르나울(평지 알타이의 수도)
자! 이제 알타이에 들어왔으니 알타이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 계통에 속한다"**
교과서 배운 이 말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알타이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타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다. 알타이가 중앙아시아에 있는지 몽골에 있는지, 러시아에 있는지 모른다. 이 책의 목적은 이처럼 거의 환상 속에 막연히 가지고 있는 알타이를 현실 속으로 끌어내 모두가 직접 확인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알타이는 아시아의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지구 위의 3대양(북빙양, 태평양, 인도양)을 세모꼴로 연결한다면 거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알타이'는 옛 터키말로 '아름다운', '귀중한', '금'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몽골말로 "황금산(黃金山)"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바위가 많은 알타이산맥의 꼭대기를 보았는데 마치 황금 산과 같아 황금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로 알타이에 금이 많이 생산되어 그렇게 지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알타이는 전체 면적이 26만 500㎢로 영국이나(24만 ㎢) 남북한을 합친 한국(22만 ㎢)보다 약간 더 크다. 북에서 남까지의 길이는 588km이고 서에서 동까지의 길이는 600km이다. 이 영토는 크게 북쪽 평지를 차지한 알타이크라이(Krai는 국경에 있는 지방행정 단위로 '국경주' 또는 그냥 '주'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전에는 '지방'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반명사 같아 정확한 뜻을 전달할 수 없다)와 산으로 이루어진 알타이공화국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알타이는 남쪽에 몽고, 중국, 카자흐스탄 같은 나라들과 이웃하고 있고, 뚜바, 하까스, 노보시비르스크, 케메로바 같은 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알타이크라이와 알타이공화국을 좀 쉽고 자세하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표〉
알타이크라이(알타이주)
면적 : 16만 7,900㎢
인구 : 270만(그 가운데 도시 인구 130만으로 48%)
인구밀도 : 1㎢에 16명
주도 : 바르나울(Barnaul, 인구 60만 6000명, 1992)
행정구역 : 60 라이온, 11 대도시
전화 지역번호 : 22
주요 강 : 오비, 비야, 까뚠, 알레이, 챠릐쉬, 추믜쉬
모스크바와의 시차 : +3
알타이공화국
면적 : 9만 2,600㎢
인구 : 20만 1,700명(그 가운데 도시 인구 24%)
인구밀도 : 1㎢에 2.2명
민족 : 러시아인 60%, 알타이인 31%, 카자흐인 6%
수도 : 고르노 알타이스크(Gorno Altaisk, 인구 4만 7,000명)
* 1932년까지 울랄라(Ulala), 1932~48년까지 오이로뜨-뚜라(Oirot-Tyra)
행정구역 : 10 라이온(아이막), 1 도시
전화 지역번호 : 04
주요 강 : 비야, 까뚠, 추야, 아르구뜨
모스크바와의 시차 : +3
그림 6) 2006년 알타이 탐사 지도(주로 헬기 이용)
그림 7) 2005년 답사단
우리가 지금 도착한 바르나울(Barnaul)은 바로 알타이크라이(알타이주)의 주도이다. 바른(Barn)은 '크다'는 뜻이고, 울(ul)이란 마을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 바르나울이란 '큰 마을'이 되는 것이다. 이 도시는 1730년에 건설되었다. 우랄 광산을 맡고 있던 아킨피야 데미도바가 처음 오비강 가에 제련공장을 세운 뒤 이 도시는 빠르게 성장했다. 1771년 바르나울은 시베리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예까쩨린부르그에 이어 광산 도시로 뽑혔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유명한 여행가들이 수준 높은 복지와 주민들의 문화, 바르나울의 발달된 과학문명을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1823년에는 서시베리아 최초의 향토지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1835년에는 최초의 시베리아 기상천문대가 세워졌다. 돌로 교회를 지었고, '띠아뜨랄니 돔'에서 정기공연이 열렸으며, 지역 오케스트라도 생겨났다. 19세기 중기에 세메노브-쨘-샨스끼는 바르나울을 '시베리아의 아테네'라고 불렀다.
바르나울은 제련산업이 쇠퇴하면서 빠른 속도로 상업도시로 바뀌었고, 20세기 초에는 문화와 과학 중심지는 유지하면서 시베리아에서 큰 상업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이 도시는 화재, 지진, 홍수, 혁명 파국, 내전, 사회주의 집단화 시대를 거쳤다. 2차 세계대전 때 100개가 넘는 러시아 지역 공장들이 알타이 지역으로 옮겨지면서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맞이하였고 인구 65만의 큰 도시가 되었다. 도시의 크기에 걸맞게 많은 박물관과 극장, 콘서트 홀, 고고학적 유적들이 남아 있다.
바르나울은 오비강 왼쪽 강가에 있는데, 이 강은 러시아와 유라시아에서 가장 큰 강 가운데 하나이다. 알타이의 거봉에서 발원한 비야강과 카툰강이 비스크라는 도시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진 지점에서 만나 오비강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북해로 흘러들 때까지 3,560km를 흐른다. 오비강을 따라 물놀이와 낚시를 하고 휴일에 강가 소나무 숲에서 휴식을 하는 바르나울 사람들의 쉼터이다.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인 바르나울은 가까이에 있는 시베리아 최대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 비하면 작지만 알타이에서는 명실 공히 가장 큰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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