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서경대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연재를 시작한다.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의 이사장이기도 한 서 교수는 지난 1997년 알타이대학 방문을 시작으로, 2002년부터는 매년 알타이지역을 찾아 우리 민족의 시원이기도 한 알타이의 이모저모를 샅샅이 찾아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써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Ⅰ. 알타이로 가는 길**
2005년 7월 10일 10시 15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행 비행기(시베리아항공 S7 504호편)가 인천공항을 떠나 북북서로 향한다. 다섯 번째 알타이 답사를 떠난 것이다. 1997년 알타이대학 방문을 시작으로 2002년부터는 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신들린 듯 알타이를 찾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그런 물음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고, 따라서 이 글이 그 대답이다.
예정보다 약간 늦게 이륙한 TU-154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서해를 건너더니 얼마 안 가 북경을 지난다. 이륙한 지 1시간 뒤 식사가 나오는데 생각보다 먹을 만하다. 국제선이라 그런지 러시아 국내에서 다니는 같은 기종에 비해 기내가 말끔한 편이다. 우리가 타고 가는 비행기는 러시아의 유명한 항공기 제작회사인 '투폴레프 설계국(OKB Tupolev)"에서 제작한 중거리용 여객기다. 1966년 첫 비행을 한 뒤 성능이 계속 향상되면서 현재까지 800대 넘게 생산된 옛 소련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여객기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노보시비르스크,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톡 구간에 취항하고 있다. 여름에는 에어콘의 수증기가 머리 위 짐칸에서 새어 나와 놀란 적이 있지만 비교적 안정된 비행을 하고 러시아 비행사들도 수준이 높아 안심해도 좋다. 다만 의자가 너무 빽빽하게 들어차 키가 큰 사람이나 안쪽에 앉은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2003년 180㎝가 넘는 김화동 군이 5시간 비행을 마치고 거의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 난다. 덩치 큰 러시아인들이 왜 이처럼 자리는 좁게 만들었는지 러시아에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의아심을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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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쯤 지나면 몽골 하늘 위를 날다 3시간이 지나면 러시아 시베리아에 들어선다. 이 때부터는 시계를 꺼내 현지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원래 우리나라와 노보시비르스크는 3시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여름에는 러시아에서 서머타임을 실시하기 때문에 2시간만 뒤로 돌려주면 된다. 비행기가 노보시비르스크에 착륙한 것은 5시간 15분이 걸린 오후 3시 30분, 그러니 이 시간에서 2시간을 뺀 현지시간 오후 1시 30분에 도착한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타이가를 날던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더니 드넓은 벌판을 구비치는 오비강가 노보시비리스크 톨마체보(Tolmachevo)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공항에서는 내ㆍ외국인이 다른 창구를 사용하게 되는데 러시아인에 비해 외국인들은 수속이 늦다. 러시아인은 간단히 여권만 확인하면 되지만 외국인들은 컴퓨터에서 비자에 대한 확인 사인이 떠야지만 통과가 되고, 시간이 제법 걸린다. 외국인 창구는 주로 한국인들로 붐빈다. 노보시비르스크로 들어가는 손님 말고 모스크바나 뻬쩨르부르그에 가는 사람들이 이곳을 경유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모스크바나 뻬쩨르부르그로 직접 가는 비행기들이 있지만 시베리아항공에서 가격이 싼 할인항공권을 팔기 때문에 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답사를 위한 짐들이 많아 서두르지 않기 때문에 검사대를 통과해서 밖으로 나가는데 1시간이 더 걸린다.
우리나라에서 알타이로 가려면 노보시비르스크를 거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다행히 90년대 후반부터 여름에는 직항비행기가 뜨기 시작해 다니기가 아주 쉬워졌다. 예전처럼 블라디보스톡이나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중간에 하루씩 묵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진 것이다. 다만 일주일에 1번(97년에는 한 달에 2번)밖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일정을 잘 짜야 한다.
그림 3) 1979년의 크라스 에어 항공기
그림 4) 2005년의 시베리아항공
***추억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는 시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곳이다. 공식적으로 이 도시는 1893년 건설되었지만 20세기가 되어서야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893년은 오비강(river Ob')을 지나는 철교와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이 시작되었던 시기다. 건설과 함께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철도 완공 후에도 계속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도시로의 발전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는 시베리아의 경제적인 수도로 가장 큰 시베리아 은행과 시베리아 스톡 마켓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교육의 중심으로 유명한데, 1957년에는 시베리아 과학 학부가 설립되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아카데미도시(Akademgorodok)가 건설되었다. 현재 이곳은 학문의 요람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노보시비르스크 대학은 시베리아에서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고 있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젊은 활기가 느껴지는 도시로 많은 젊은이들이 일하고 배우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산업과 학문의 발달이 가속화 되고 있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매우 잘 알려져 있는 도시로, 여섯 개의 극장과 오케스트라 악단, 유명한 음악 학교를 가지고 있다. 도시의 명물인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하우스는 그것 자체로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와 오페라 그룹이 이곳에 있다. 이렇듯 노보시비르스크는 러시아의 떠오르는 도시로 계속적인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다.
나에게 노보시비르스크는 그다지 낯선 도시가 아니다. 이미 6번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16년 전에 썼던 『시베리아횡단열차』(한우리, 1990)를 꺼내 노보시비르스크 부분을 읽으며 하얀 겨울의 시베리아를 되돌아본다. 1989년 12월 31일 새벽 1시 노보시비르스크역에 내릴 때 제법 큰 눈송이들이 내리고 있었다. 현지 에스페란토협회를 대표해서 회장과 블라지미르 시비리체프 교수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렇게 처음 만난 블라지미르시비리체프 교수와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어 이 도시에 갈 때마다 큰 도움을 받았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춥기만하고 정지된 경치가 아니다. 하얀 설경 속에는 시베리아인들의 활기 찬 생활들이 열기를 느끼게 하고, 가는 곳마다 훈훈한 동양적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시베리아에서 "40도짜리 술은 보드카가 아니고, 영하 40도는 추위가 아니며, 400㎞는 거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시베리아 기후는 사람 살기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 밖에도 겨울에 시베리아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것은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처럼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노보시비르스크의 한 겨울에 1989년을 보내고 1990년의 새해를 에스페란토 회장 집에서 맞은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밤 11시 보드카와 푸짐한 음식으로 시작한 송년회가 밤 12시가 되자 1990년 새해 첫날을 맞는 축배를 들었다. TV에서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쵸프의 새해 인사가 방영되었는데 대통령의 똑같은 새해 인사는 10번이나 반복된다고 한다. 러시아는 시간대가 10개로 나뉘어 있어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새해 축배를 드는 순간 모스크바에서는 아직 저녁 8시이고, 맨 동쪽에 있는 캄차카에서는 이미 새벽 5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현지 방송국마다 현지 시간에 맞추어 10시간 동안 10번의 인사를 해야 러시아 전체가 한 번의 새해 인사를 듣는 것이다. 자정이 넘어도 이야기는 계속되고 새벽 2시가 되자 시베리아의 대표적 음식이라며 만두국이 나오고, 3시 반쯤 양고기와 감자로 만든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4시에 다시 새해맞이 축배, 모스크바 시간에 따른 새해 축배인 것이다. 5시가 되자 케이크가 나오고 얼마 있다가 차가 나온다. 차가 나오면 마지막이라는데 시간은 이미 7시를 가리킨다. 오랜 여행 중에 날밤을 꼬박 새면서 쉬지 않고 먹고, 계속해서 얘기하는 러시아인들의 저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당시 러시아 과학의 요람이라는 아카뎀고로독을 방문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고, 그 인연은 그 뒤 5번 더 갔을 때마다 반드시 들르는 필수 코스가 되어버렸다. '아카뎀'은 과학아카데미라는 뜻이고, '고로독'은 작은 도시란 뜻으로 문자 그대로 학술도시, 또는 연구소나 대학이 많은 도시라는 뜻이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동쪽으로 25㎞ 떨어진 이 도시는 1959년에 시작하여 1962년까지 3년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크지는 않지만 완전히 계획적으로 설계하고 배치하여 건설하였기 때문에 짜임새가 있고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룬 도시다. 이 도시에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가 있고, 20개가 넘는 학술연구소가 있으며, 대학과 재능 있는 학생들을 위한 물리ㆍ수학 특별 중고등학교처럼 러시아의 두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발해를 찾다가 알타이에 첫발을 내디딘 사연**
두 번째 노보시비르스크를 찾은 것은 1997년 발해를 찾기 위해서였다. 1994년 고구려연구회를 설립해 한참 고구려에 미쳐 있을 당시 발해 문제는 고구려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해는 바로 고구려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발해가 건국한 지 1300주년이 되는 것이 바로 1998년이었다. (사)고구려연구회에서는 발해 건국 1300주년을 기리기 위해 국제학술대회, 전시회, 강연회 같은 여러 행사를 마련하고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발해의 유적 발굴이 불가능했다. 발해 유적이 대부분 중국, 북한, 러시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시베리아 고고학계의 대부로 꼽히던 경희대 황용운 교수의 제자 신복순 박사로부터 아카뎀고로독에 있는 러시아아카데미 시베리아분소 고고ㆍ민족학연구소에 아직 발표하지 않은 발해 유물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서시베리아에 발해 유물이 있는 것인가? 러시아에서 발해 유적은 모두 연해주에 있으나 이곳 고고ㆍ민족학연구소는 전 시베리아를 커버하기 때문에 이곳 학자들이 연해주까지 가서 발굴을 한 것이다. 또 하나, 러시아에서는 발굴하여 아직 보고서를 내지 않은 유물들은 대부분 발굴 책임자인 교수들이 자기 연구실에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유물을 보기 위해서는 서시베리아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발굴이란 반드시 땅에서만 파내는 것이 아니고 발굴되었으나 발표되지 않은 것을 찾아 책으로 내는 것도 발굴이라고 생각하고 단국대 정영호 박물관장과 함께 시베리아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6월 29일 노보시비르크 공항에 내리자 영국에서 먼저 와 있던 신복순 박사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호텔로 가지 않고 바로 시비르체프 교수 집으로 갔다. 당시 호텔이 안전하지 않다는 말들이 많아 보다 안전한 친구 집으로 숙소를 정한 것이다. 딸 하나를 데리고 단란하게 살고 있는 시비르체프 교수 집은 바로 미술관 옆 시내에 위치하고 있어 편리할 뿐 아니라 완벽한 에스페란토로 무료 통역까지 해 주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직 사회주의 색채가 강했던 1990년에 비해 시내는 훨씬 활기차고 미국의 콜라를 선전하는 요란한 판촉전이 열리는 등 역동적인 시베리아의 수도로 바뀌고 있었다. 마침 시내는 축제가 열리고 있어 자동차 없는 중심가를 거닐며 새로운 시베리아의 기운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이때 고고ㆍ민족학연구소와 계약을 맺고 발해의 불상, 토기, 수막새 같은 유물들의 사진을 찍고 그 해에 『러시아 연해주 발해 절터』라는 책을 출판했다. 아울러 이 때 처음으로 바루나울에 있는 알타이대학을 방문하게 되면서 알타이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본격적인 알타이 탐사**
2002년 여름 세 번째 노보시비리스크를 찾았다. 1990년에 쓴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새로 쓰기 위해 여름방학 60일간을 모두 투자해 캄차카에서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을 감행했다. 거의 1년간의 철저한 준비를 거쳐 단독으로 속초에서 배를 타고 떠나 20일간 기차에서 자고 19일간 개인 집에서 민박을 하며 책을 쓰기 위해 많은 경험과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노보시비르스크에 오시면 반드시 알타이를 보셔야 합니다. 그 자연의 아름다움은 아마 캄차카보다 절대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노보시비르스크 현지의 정헌준 씨가 추천한 이 한마디가 그 뒤 4년간 열병을 앓듯 알타이를 찾아간 계기가 되었다. 그다지 크게 기대를 걸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내가 알타이에 빠지게 된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바로 알타이가 갖고 있는 신비한 역사유적들 때문이었다.
2003년 네 번째, 2004년 다섯 번째, 그리고 2005년 여섯 번째의 노보시비르스크 방문은 모두 알타이를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였고, 알타이 탐사를 위한 사전 준비 장소였다. 2002년은 20일 동안 주로 알타이공화국을 거쳐 몽골로 가는 추야도로 주변의 역사유적을 탐사하였고, 2004년에는 주로 2003년에 못 가본 우스트-칸 → 우스트-콕사 → 튠구르 → 쿠체를라 호수로 이어지는 지역의 유적을 답사했다. 이때도 2003년처럼 20일 동안 야영을 하면서 힘든 일정을 보냈다. 반면에 2005년은 정말 화려한 알타이 여행을 즐겼다. 일주일 동안 거의 3분의 2를 헬리콥터를 타고 차로 다닐 때는 생각해 볼 수도 없던 알타이 최고봉 벨루하산은 물론 북추야산맥의 악뚜르까지 설봉들을 감상할 수 있었고 찾아가는 데만 며칠씩 걸리던 우코크 고원이나 엘란가쉬 바위그림에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디럭스한 여행은 수개월 동안 현지 여행사와 정말 어렵게 절충한 결과였고, 제법 높은 가격을 감수한 17명 단체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앞으로 이 답사기는 이 3년간 답사한 내용이 으뜸을 이룰 것이다. 3년간 답사하는 동안 상당한 지역이 중복된 곳이었지만 주로 가는 길을 따라 3년간의 내용을 종합해 설명하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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