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작은 마을에 들어서는 길목을 걷는 기분은 오래 동안 잊고 있던 풍경을 만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번잡한 도심(都心)에서 약간만 벗어나면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일본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이 그저 평범한 촌락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국적(異國的)인 풍치는 어디나 다, 스쳐 지나는 나그네에게는 매력적입니다.
낮은 울타리와 오래된 목조건물, 그리고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들의 모습은 전후 50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은 고장의, 변절하지 않는 애틋함처럼 다가왔습니다. 동네 어귀의 뭇 가게들은 일본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글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고, 왠지 꼭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드는 솜씨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작고 허름한 초밥식당도 제법 자신의 목소리를 뚜렷이 갖추고 있습니다.
기묘한 것은, 주택가의 담장은 높지 않지만 그러기에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창문마다 커튼을 드리운 경치였습니다. 지나가는 만인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거리낌 없이 노출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집의 구조물은 밖에서 쉽게 들여다 볼 수 있어도 그 안은 꽉 닫아 놓은 듯한 습관은 일본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어렵지 않게 자신을 여는 것 같지만, 그 이상 다가서는 것은 바짝 경계하는 몸짓.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의 경우와는 대조적입니다. 그 당장에 삭힐 수 없는 분노가 치미면 그대로 쏟아내고, 좋으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매우 극적인 기질의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 온 내력을 보면, 속마음을 잘못 내비쳤다가는 단칼에 목숨을 앗기는 경험이 쌓여 왔다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건 일종의 절박한 생존방식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해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 그래서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실수로 자신이 살고 있는 번(藩)의 성주의 눈에서 벗어나면 어찌 될지 모르는 판국을 오래 겪은 종족의 슬픈 마음의 빛깔이기도 합니다.
그걸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마음과 진솔하게 만나는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건 다만 일본사람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도 그렇게 담장은 낮은 듯하지만 속은 꽁꽁 얼어붙어 닫고 사는, 마음의 벽은 높기만 사람도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시비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이들이 있다면 아마도 인생 사는 것이 훨씬 기뻐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작은 마을들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정겨움과 함께 자신의 고장이라는 뿌듯함과 그리고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온갖 기억과 역사를 하나로 엮어 마련해주고 있는 현장이라면, 그 작음은 마침내 큰 울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때로 자신의 속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보듬고 지켜주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한결같이 자신을 맞아주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곳이 될 겁니다.
인간마다 살아 온 사연이 다르고 마음의 틀이 서로 같지 않습니다. 어느 것이 낫다 아니다로 평할 문제는 아닙니다. 익숙한 길목이 정겹지 않거나 가게 푯말이 더 이상 매력적이 아니라면 그곳은 늘 상 보아 오던 곳이나 낯선 곳이 될 수 있습니다.
그와는 거꾸로, 외견상으로는 매우 낯설지만 사실은 친숙한 곳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타인(他人)에게, 정겹게 들어설 수 있는 길목이 있는 작고 푸근한 마을을 닮은 그런 행운이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삶은 타인에게 축복이 될 겁니다.
* 이 글은 프레시안의 편집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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