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김식은 아침 일찍 숯쟁이 아낙이 올린 밥상을 받았다. 구역질이 나고 목이 칼칼하여 넘기지 못할 것 같던 시커먼 보리밥이었지만 무청 시래기 국을 곁들이니 속이 서서히 풀렸다. 감식초와 간장으로 버무린 오이무름과 묵은 고추장에다 절인 더덕과 도라지는 혀를 자극하여 미각이 돌아오게 했다. 오이무름을 씹어 삼키는 순간 단명했던 아버지가 생각나 숟가락을 놓기도 했다. 몸이 약하여 생원에 머물고 말았던 아버지 숙필(叔弼)은 오이무름 같은 무른 반찬을 즐겼던 것이다.
병약하기도 했지만 김숙필은 본래 벼슬에 뜻이 없었다. 땅꼬마 시절에 김식이 행랑채의 하인 말구종을 앞세워 텃밭에 나가 오이를 한 아름 망태에 따오던 날도 아버지 김숙필은 이렇게 말하며 김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튼다 해도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면 그만이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 偃鼠飮河不過滿腹). 이 애비도 욕심 없는 장자(莊子)의 생각에 동감이다. 사서오경 공부해서 생원이 됐으니 자족하고 살아야지 더 높은 데를 왜 힘써 올라가려고 애를 쓰겠느냐. 먼저 오른 사람은 반드시 먼저 내려와야 하는 법이다. 요 임금이 친구인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무어라 하고 강물에 귀를 씻었는지 아느냐. '때 맞추어 비가 내리는데 여전히 물을 대고 있다면 또한 헛수고가 아니겠느냐?'고 거절하지 않았더냐."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김식도 진사시만 합격한 뒤 과거급제에 연연하지 않았다. 서울 집에서 가까운 성균관에 입학은 했으나 유생 조광조 등과 동지가 되어 과거공부보다는 도학을 실천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할 뿐이었다. 당시 성균관에는 훗날 기묘명현으로 추앙받는 김구, 박훈, 기준, 박세희, 윤자임, 양팽손 등의 유생이 있었다.
생진사시에 합격하거나 입학 자격을 취득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면 유생이라 불렀는데, 선발된 200명의 유생들 중에는 음주가무를 좋아하여 삼삼오오 작당하여 한밤중에 성균관 담을 넘어 기방을 기웃거리며 술을 몰래 마시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조부나 부친의 벼슬을 내세워 은근히 과시하며 우쭐거리는 사람도 있고, 배타심이 강하여 고향 사람끼리만 몰려다니며 지방색을 조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사교나 친화력이 부족하여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도 있었다. 전라도 능주에서 올라온 양팽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초라한 옷차림의 양팽손을 보면 퀴퀴한 냄새라도 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저만치서 걸음을 멈추는 유생도 있었다. 헝겊으로 덕지덕지 기운 무명 바지저고리를 사철 내내 입고 다니니 외모만 보면 영락없이 한미한 집안의 시골뜨기 서생이었다. 그러나 깡마른 얼굴에는 강기가 흘러넘쳤고, 퀭한 두 눈에서 뿜어지는 눈빛은 어리어리한 유생들을 압도했으며 눈썰미가 남달라 그림을 잘 그렸다.
시골뜨기 양팽손이 전라도 관찰사이자 청백리로 향리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송흠(宋欽)의 제자라는 것을 안 사람은 조광조뿐이었다. 성균관 입학 전에 6살이나 어린 양팽손이 물어물어 용인에 살던 조광조의 초당을 찾아가 패기 있게 도학을 논하며 며칠 동안 초당 사랑채에서 기숙했던 적이 있고, 더구나 두 사람은 같은 해 양팽손은 생원시 1등으로, 조광조는 진사시 1등으로 합격했던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김식 일행은 길라잡이가 된 숯쟁이의 안내를 받아 영산으로 향했다. 장독(杖毒)으로 하체가 부실해진 김식은 마른 칡넝쿨을 짚신에 둘둘 말아 감발을 했는데도 눈길에서 자꾸 비틀거리며 미끄러졌다. 그때마다 우음산이 달려와 부축했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어제까지만 해도 장독이 퍼진 엉덩이에서 피고름이 나왔는데, 지금은 상처 부위 중 절반쯤 딱지가 달라붙어 상처 안살이 근질근질했다. 장독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생살이 돋는 느낌이었다. 김식은 소나무 설해목(雪害木)이 드러누운 산길에서 앞서가는 숯쟁이를 불러 세웠다.
"이보게. 몸이 가벼워진 것 같네. 하룻밤을 잘 잔 덕분이야. 돌아가거든 안사람에게 전해주게나.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말이네."
"나으리. 소인은 정식 의원이 아닙니다만 숯으로 병을 낫게 한 적이 여러 번 있사옵니다. 숯이 해독하는 데 아주 그만입니다. 나으리께서 뒤가 불편하시다는 것을 알고 이부자리 밑에 참숯가루를 미리 깔아놓았사옵니다. 아마도 간밤에 주무시는 동안에 조금이나마 해독이 된 것 같사옵니다."
"허허. 정녕 그러한가."
"돈이 없어 의원을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숯을 구워 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이 많사옵니다."
"숯은 어떤 병을 낫게 하는가."
"오장육부에 독이 생겨 난 병이라면 다 영험합니다. 속병의 독으로 염증이 생기면 숯가루를 마셔야 되고, 상처가 나 고름이 생기면 숯가루를 발라야 합니다. 피곤하여 혀가 헌 데도 좋고, 고열을 가라앉히는 데도 숯가루가 으뜸입니다. 위장이 안 좋아 입에서 악취가 날 때나, 변이 흙덩이처럼 단단해진 변비에도 숯가루가 그만이옵니다."
"무슨 나무를 태운 숯가루의 약효가 좋은가."
"참외 먹고 체한 데는 참외껍질을 태운 잿가루, 고기 가시가 걸린 데는 고기를 태운 잿가루, 심지어 소나무를 태울 때 나는 그을음까지 송연묵(松烟墨)이라 하여 의원들은 구슬처럼 환(丸)을 짓습니다만 소인은 언제 어디에서나 구하기 쉬운 상수리나무나 소나무 숯가루를 상비약으로 지니고 다니옵니다."
김식은 자신이 지금 효험을 보고 있으므로 숯쟁이의 얘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숯쟁이는 자신의 허리춤에 찬, 돼지 오줌보처럼 생긴 숯가루 쌈지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숯쟁이의 상비약이자 비상약이었다.
선산 보다 영산 지방 쪽에 폭설이 더 심하게 내린 모양이었다. 영산으로 갈수록 폭설에 찢긴 생가지들이 산길을 덮고 있었다. 숯쟁이는 대학자인 김식이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것 같아 신바람이 나 있었다. 대사성이라 하면 성균관 유생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정3품의 높은 벼슬이었다. 눈 덮인 산길인데도 힘이 덜 든 것은 김식도 마찬가지였다. 숯쟁이의 숯 얘기를 듣다보니 고개를 하나 넘고 산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았는데도 견딜 만했다. 숯쟁이의 얘기에 빠져 자신이 지금 영산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숯쟁이가 영산 초입의 마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에야 김식은 뒤늦게 긴장했다.
"나으리. 저 집이 바로 생원 어른 댁이옵니다."
생원시에 합격한 이중은 스승인 김식이 사화를 당하자 벼슬길을 포기한 채 낙향해버린 제자였다. 김식이 이중의 집을 찾은 것은 그만큼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졸들이 이중의 집에 잠복하고 있는지 모르므로 김식은 숯쟁이를 불러 당부했다.
"먼저 가 살펴보고 오게. 만약 이생원이 있다면 노천이 왔다고 전하게. 전언이 있을 것이네."
"나으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은 숯 지게를 지고 들락거렸던 터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김식은 우음산이 숯쟁이를 따라가려고 나섰으나 만류했다.
"믿을 만한 양인이다. 그러니 안심해도 될 것이야."
김식 일행은 산자락 끝에 자생하는 산죽 뒤로 숨었다. 산죽도 묵은 밭에 퍼진 것이어서 키가 삼대처럼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승려 행색으로 변장한 이신은 산죽 숲 사이로 보이는 숯쟁이에게 눈길을 떼지 않고 경계했다. 이중의 집은 김식 일행이 머문 곳에서 훤히 내려다보였다. 숯쟁이는 좀 전에 자신이 말한 대로 스스럼없이 문지기를 뒤따라 행랑채 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았다.
이중의 집은 규모가 작은 초가일 뿐이지 담을 대신하는 행랑채와 정원과 연못이 파진 마당과 손님들이 드나드는 사랑채, 그리고 대문에서 깊숙한 뒤쪽에 안채와 사당 등이 조촐하게 잘 자리잡고 있었다.
"나으리. 저 자를 믿어도 되겠사옵니까?"
"왜 그러느냐?"
"저 자가 길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한 것이 수상하옵니다. 누가 이 엄동설한의 눈길에 길라잡이가 되겠다고 나서겠사옵니까? 더구나 저 자는 어젯밤에 나으리의 지체를 음산에게 다 들었사옵니다. 그래도 안심하겠사옵니까?"
김식은 우음산을 가까이 오게 했다.
"네가 이 처사 말대로 얘기를 했느냐?"
"나으리 처지를 다 얘기했습니다요."
옆에 있던 이신이 어깨를 바싹 땅에 엎드리며 우음산을 나무랐다.
"이런 멍청한 놈 봤나. 그 얘기는 숯쟁이더러 나으리를 고발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 처사 말이 맞다. 음산이는 어디를 가든 입을 조심해야 할 것이야. 업(業) 중에서도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이 가장 크다고 했다. 경거망동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우리는 쫓기는 몸이다."
순간 세 사람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어리었다. 김식은 난처해했고, 이신은 낭패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고, 우음산은 울상을 지었다. 이윽고 우음산이 김식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나으리. 죽을죄를 졌습니다요.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요."
"알았으니 일어서거라. 네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은 것뿐이다."
잠시 후, 김식이 앞에서 경계하고 있던 이신을 불러 말했다.
"이 처사는 이곳의 지리를 아는가. 일이 여의치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다행히 이곳의 지리를 좀 알고 있사옵니다. 산중에서 살 때 탁발을 다녔사옵니다. 무주로 가는 지름길을 훤히 알고 있사옵니다."
김식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주에도 제자 오희안(吳希顔))이 있었다. 오희안도 이중과 마찬가지로 김식의 집에서 기거하며 사서오경을 배운 적이 있는 제자였다. 아직도 생진시에 합격은 못하였으나 학문이 날로 깊어지고 있는 산촌의 서생이었다. 이신을 따라 나서려는 김식의 다리를 우음산이 붙들고 말했다.
"나으리. 쇤네는 간밤에 숯쟁이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요."
"어디 그러한 연유를 말해 보거라."
"나으리 사정을 소상히 얘기하자, 숯쟁이가 움막 뒤에서 보자기를 하나 들고 오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요. '이 숯가루를 이부자리 밑에 골고루 까시오. 반드시 나으리 병에 차도가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요."
"그 말에 마음을 놓았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요. 해코지할 사람이 어찌 나으리 병환을 걱정하겠습니까요."
"듣고 보니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그러자 이신이 또 나서 말했다.
"나으리를 안심시키려는 데 무슨 수작인들 못하겠느냐."
"이럴 때일수록 바로 보아야 한다. 군자가 세상을 보는 법이다. 머리 위로 봐도 안 되고, 띠 아래로 봐도 안 되고, 더구나 곁눈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특한 일이다."
그때 숯쟁이가 행랑채를 나오더니 김식이 숨어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의 날렵한 걸음걸이로 보아 잠시 동안의 의혹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일이 해결된 것처럼 큰소리로 말했다.
"생원 어른께서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고 하옵니다. 하오나 나으리께서 오실 줄 알고 임시처소와 시중 들 사람을 정해 놓고 떠났다고 하옵니다. 생원 댁은 위험할지 모르니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처소를 마련해 놓았다고 하옵니다."
"이생원은 언제 돌아온다고 하던가."
"열흘이나 삭망 후에 내려오신다고 하옵니다."
"처소는 얼마나 먼 곳에 있는가."
"저 산중 계곡 양지바른 곳에 있사온데 생원 어른께서 가끔 묵으시는 별채라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별채로 가보자구나. 음산이 앞서거라."
"나으리. 그곳에는 나으리밖에 갈 수 없다고 하옵니다. 안방마님 부탁이옵니다. 그러니 두 분은 생원댁 행랑채에 머물러야 할 것이옵니다."
"허허허. 이 자들은 비록 신분은 다르다고는 하지만 나와 피를 나눈 사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생원 어른께서 엄히 지시해 놓고 떠나셨다는 안방마님 말씀이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내 제자라 하더라도 이곳의 주인은 이생원이니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구나."
우음산과 이신은 이중의 행랑채로 마지못해 갔고, 김식은 숯쟁이를 앞세우고 계곡의 별채로 올라갔다. 이중의 별채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울 위쪽에 은폐되어 있었다. 외딴집처럼 부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중의 독서당이 분명했다. 이중은 도학자답게 부산한 마을을 떠나 적적한 자리에 두 칸 초가의 독서당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심수당(心修堂).
독서당은 마음을 닦는다는 뜻의 당호를 내어걸고 있었다. 숯쟁이가 사복시(司僕寺)의 하인 거덜이 고관이 행차할 때 길을 비키라고 소리치듯 큰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없소! 아무도 없소이까!"
그러자 대답 대신에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놀랍게도 고개를 숙이고 나온 사람은 젊은 여인이었다. 숯쟁이가 더 묻지 못하고 있자, 여인이 고개를 더 숙이며 김식을 향해 말했다.
"생원 나으리께서 시중을 들라고 보내서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심신이 지치신 나으리를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잘 모시라는 안방마님의 엄한 당부도 계셨사옵니다."
"나를 시중들라 했다고? 그렇다면 낭자는 의녀(醫女)인가."
"아니옵니다. 의녀도 아니옵고 차를 달여 올리는 차모(茶母)도 아니옵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생원 어른의 소첩이옵니다."
"헌데 어찌 나를 시중들겠다는 것인가."
"허울만 소첩이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생원 어른께 술 한 잔 올린 적이 없고 옷깃 한 번 스친 적이 없사옵니다. 생원 어른께서는 소녀가 이곳으로 처음 온 날부터 나으리만을 기다리고 사는 것이 제 할일이라고 했사옵니다. 그러니 소녀는 오늘부터 나으리의 소첩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이름이 무언가."
"소옥이라 하옵니다."
물러설 때를 기다리고 있던 숯쟁이는 허리춤에서 숯가루가 든 쌈지를 꺼내어 김식에게 내밀었다.
"나으리. 이 숯가루를 상처 난 곳에 며칠 동안만 직접 바르신다면 거동하시는 데 조금도 불편이 없을 것이옵니다."
김식은 여인에게 쌈지를 대신 받도록 하고는 숯쟁이의 하직 인사를 받았다. 숯쟁이는 눈을 치운 별채 마당에 넙죽 엎으려 인사를 하고 있었다. 김식은 숯쟁이가 떠난 뒤에도 마당에서 서성였다. 몸을 숨겨 쫓기는 신세를 면했다고는 하지만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효직(孝直; 조광조의 자)은 아직도 용인 선산(先山)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능주 쌍봉사 동쪽 계곡의 동토에 묻혀 있다지. 억울하고 통분할 일이로다.'
김식이 별채 마루로 오르지 않는 동안 소옥도 옆에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다소곳이 서 있었다. 하늘이 흐려지고 찬 바람이 불어오자 겨우 모기만한 소리로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날이 차옵니다. 방으로 드셔야 하옵니다."
"알았으니 들어가거라."
"이 마을에는 요즘 알 수 없는 병이 돌고 있사옵니다.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그래도 김식은 자신의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적소(謫所; 귀양살이 처소)에서 울분을 삼키는 동지들이 생각나 이를 악물었다. 입 안에서 맴도는 탄식을 씹었다.
'부끄럽게 마지못해 살아 있는 동지들도 절해고도가 아니면 위리안치(圍籬安置; 적소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쳐 출입을 폐쇄시키는 유배형) 유배로구나. 가혹하고 가혹하도다. 부제학 대유(大柔; 김구의 자)는 개녕에서 남해 섬으로, 형조판서 원충(元沖; 김정의 자)도 금산에서 제주도로 보내 가두었다지. 승지 중경(仲耕; 윤자임의 자)은 온양에서 추운 북청으로 올려 보내졌고, 승지 이회(而晦; 박세희의 자) 역시 상주에서 강계로 쫓아버렸고…. 승지 형지(馨之; 박훈의 자)도 성주에서 의주로, 응교 자경(子敬; 기준의 자)은 아산에서 온성으로 보냈으니 동지들 모두가 숨은 붙어 있으나 산송장이 따로 없구나.'
방에 들자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소옥은 방문 앞까지만 안내하고 물러나려 했다.
"나으리. 이 물건은 어디에 두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비록 숯가루가 장독에 좋다고 하나 어찌 내 몸만 위할 생각이 나겠는가."
김식은 방에 들자마자 술상을 끌어당겨 놓고 두세 잔을 자작으로 마셨다. 그의 심사를 알고 달래주는 것은 술뿐이었다.
잔에 담긴 술은 언제 어디서나 그 무슨 탄식이건 묵묵히 받아주고 들어주었다. 사람이 술을 물리칠 뿐, 술이 먼저 사람을 물리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술은 '왜 빨리 돌아와 내 벗이 되지 않았는가' 하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작년 가을, 남곤과 심정의 모함으로 금부(禁府)에 갇히던 날에도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술이었다. 금부 마당에 늘어앉아서 필경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자포자기하고 있던 날 밤이었다. 달이 뜬 밤하늘에 기러기들이 나타나 금부 마당에 구슬픈 소리를 떨어뜨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에 주고받은 술은 살아생전에 서로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슬퍼하며 마시는 이별주(離別酒)였다. 마시실수록 술은 눈물로 변해 흘러나왔다. 김정이 먼저 비통하게 피울음을 뱉어냈다.
오늘밤 황천으로 갈 사람들
속절없이 밝은 달만 남아 인간을 비치네.
重泉此夜長歸客
空照明月照人間
김구도 술이 가득한 잔을 들고 옛 시를 토해냈다.
흰 구름 속에 백골을 묻으면 영원히 그만
공연히 흐르는 문만 남아 인간으로 향하네.
埋骨白雲長己矣
空餘流水向人間
너무나 원통하여 김구가 다시 시 한 구절을 목울대 밖으로 넘기려 하였으나 목이 메어 '긴 하늘 밝은 달밤(明月長天夜)' 하고 말았다. 이에 김정이 김구를 대신하여 '추운 겨울 작별 애석히 여기는 때(嚴冬惜別時)'라고 맞받았다.
조광조는 차가운 감옥 벽에 등을 기댄 채 '우리 임금을 만나고 싶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고만 있었다. 김식이 손을 뻗어 조광조에게 술을 권하며 '조용히 의(義)로 죽어야지 어찌 울기까지 하는가' 하고 거짓으로 책망하는 척해도 소용없었다.
"노천, 조용히 의롭게 죽어야 할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만, 우리 임금님을 만나고 싶을 뿐이네. 우리 임금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말이네."
그날 밤의 술은 금부에 갇힌 모두에게 비통한 시를 읊조리게 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으므로 술은 곧 피눈물이자 피울음이나 다름없었다.
소옥은 발을 동동 굴렸다. 김식 어른의 시중을 잘 들라고 자신을 과천의 기방에서 데려왔는데, 김식은 저녁도 마다한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소옥은 술과 함께 안주로 호박나물과 고사리나물을 두 번이나 들여보냈지만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못하고 말았다. 김식이 너무나 참담한 얼굴을 하고 있어 감히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소옥이 용기를 내어 방을 다시 들어간 것은 김식이 술에 떨어져 코를 곤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소옥은 방문에 귀를 대고 김식의 코고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소옥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사내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다. 방을 도망쳐 나오고 싶을 만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래도 소옥은 이중의 엄한 명을 떠올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부자리를 깔고 쓰러진 김식을 뉘였다. 김식이 잠결에 뒤척이는 순간 소옥은 깜짝 놀랐다. 김식의 엉덩이에 달라붙은 옷에는 피고름이 묻어나 있었다. 소옥은 용기를 내어 숯가루를 꺼내 피고름이 묻은 그의 옷 위에 듬뿍 뿌리고는 자신의 손수건을 덮고 나왔다.
소옥은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심장이 다시 뛰고 얼굴이 달아올라 달빛이 밤이슬처럼 내린 마당을 빙빙 돌았다. 찬 바람을 쐬고 나서야 소옥은 자신이 방금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해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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