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동, 신중행보, 거북이걸음, 은인자중…. 지난 1년여 간 고건 전 총리를 꾸며온 단어들이다. 자칭 '백수적 행보'를 통해 '다음 대통령감'으로 자신을 지목해온 일부 여론을 무색케 해온 셈이다.
그러나 최근 몇 달 사이 고 전 총리의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한 지인은 이를 두고 "아직 토끼는 못 되지만 거북이 치고는 잰 걸음"이라고 말했다. 그가 덧붙인 "봄이 오면 토끼처럼 뛰지 않겠냐"는 말은 고 전 총리의 '정식 데뷔'를 5.31 지방선거 전후로 점치는 정가의 일반적 관측과 닿아있다.
***'기자단' 만난 고건, '백수탈출' 신호탄?**
고 전 총리는 2일 저녁 각 언론사 '고건 담당 기자'들과 호프미팅을 가졌다. 고 전 총리가 지난 2004년 5월 총리직 퇴임 후 기자들과 공식 모임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고 전 총리는 "내가 바로 호프미팅의 원조"라며 이날 모임에 정치적 의미는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정치인이 아니라고 손사레를 쳐오던 그가 자신을 유력 대권주자로 간주하는 기자단을 인정한 셈이니 '백수 탈출'에 시동이 걸린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자리를 함께한 그의 한 측근도 "지난 일년 동안 1센티미터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는 고 전 총리로서 오늘 모임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고 전 총리는 특히 이날 있었던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예비경선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열린우리당 출입 기자들에게는 "누가 의장이 될 것 같으냐", "정말 정파별로 표들이 몰리고 빠지냐"는 등 '민감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고 전 총리는 열린우리당 김근태 고문이 주장하는 '범양심세력 대통합론'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있으며 연락이 오면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는 "다만 아직은 내가 정치적 입장을 정하지 못한 상태로, 구체적인 입장이 정해진 뒤에나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공식 제의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입당 제의를 받았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전화가 왔느냐고 물으면 좀 머뭇거렸을 텐데…"라며 자신의 '몸값'을 은근히 과시했다.
***'증세-감세 논란'에도 적극 훈수 **
고 전 총리는 최근 쟁점인 '증세-감세 논란'에도 적극적으로 훈수를 뒀다. 그는 "증세보다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우선"이라며 "공공부문의 경우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이 항상 있으니 정부가 공공지출 축소, 공기업 민영화 등의 자구노력을 보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원론적인 수준의 입장표명이었지만, 정부 정책에 대한 평가를 물으면 "정부가 하는 일에 내가 뭘…"하며 말머리를 돌리던 6개월 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고 전 총리는 1~2인 가구 근로소득 추가공제 폐지 방안에 대해서도 "세금은 더 많이 내느냐 적게 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이 세금을 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런 논란을 촉발시킨 양극화 문제에 대해서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성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성장은 어디까지나 양극화 해소를 위한 필요조건일 뿐으로, 고성장과 함께 교육, 고용, 복지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가난의 대물림을 막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준비된 모범답안도 곁들였다.
고 전 총리가 현 정부와 각을 세운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고 전 총리는 유시민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것을 두고도 "통합의 리더십에 맞지 않고 정상적인 인사시스템을 따르지 않았다"고 혹평한 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고 전 총리가 하나둘 여권을 향해 대립각을 늘리는 데는 대권을 향한 일종의 전략이 녹아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등장했다.
***2~3월 빡빡한 대학 강연…젊은이들과 스킨십 늘리기에 부심 **
올해 68세인 '고령'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노력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 전 총리는 젊은이들과 스킨십을 늘리기 위해 작년 5월부터 '싸이질'을 시작한 데 이어 강연을 통해 오프라인 접촉에도 열심이다.
오는 22일에는 고려대에서, 24일에는 연세대에서 '대한민국 희망의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을 할 예정이고, 3월에도 성균관대, 충북대, 전북대의 강연 일정이 잡혀 있다.
기자들과의 호프미팅에서도 체력을 과시하는 듯한 그의 제스처들이 돋보였다. 예전에 앓았던 '목 디스크' 얘기가 나오자 "하도 여기저기 절을 많이 하고 다녀서 목에 디스크가 있었다"면서도 "자가치료로 다 나았다. 이제는 아픈 데가 없다"고 장담했다.
또한 그는 3000cc짜리 맥주잔을 한 손으로 들고 테이블 이쪽저쪽의 빈 잔들을 채우는가 하면, 식사 대용으로 나온 주먹밥 대신 피자를 두 조각이나 들며 "이렇게 식성이 좋은데 아픈 데가 있겠냐"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대권도전 선언'과 연관된 직접적인 질문에는 아직 "언론들이 너무 성급하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이미 '거북이 보다는 잰걸음'으로 대권경쟁의 전장에 다가가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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