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에 나와 그 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 은곰상을 받은 영화 〈마부(馬夫)〉는 주인공 김승호의 무언가 어눌하게 머뭇거리는 듯하면서도 정감 깊은 연기로 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작품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천시 받고 사는 마부나 그 마부가 끌고 다니는 말이나 모두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표상이라는 점은 영화의 호소력이 어디에 집중해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늘 빚에 쫓기며 사는 홀아비 마부 하춘삼에게는 폭력 남편에게 시달리다가 집으로 몰래 도망쳐 온 벙어리 큰 딸과, 가난한 집안의 희망을 홀로 잔뜩 지고 있는 고시생 큰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러워하면서 어떻게든 신분상승을 꿈꾸며 연애에 몰두하는 작은 딸,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껄렁패로 돌아다니는 작은 아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춘삼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과부 수원댁이 이 영화의 인간관계를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높은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도시를 점차 채워나가고 근대적 살림살이가 모두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때에 〈마부〉란 이미 낡아버린 존재인 동시에 소멸되어갈 운명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빈곤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불길한 예감과 같은 것이며, 속도와 기능으로 보자면 폐기처분될 경계선에 서 있는 박물학적 유산처럼 보입니다.
벙어리 큰 딸은 마부 하춘삼에게 벗어던질 수 없는 말 못할 인생의 고뇌이며, 사랑에 부푼 작은 딸은 몰락해가는 아버지 세대와 결별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현실이며, 망나니 작은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변화입니다. 그 틈에서 큰 아들은 고시를 통해 입신출세의 돌파구를 열 하춘삼의 희망이고, 절박한 지경에 몰려 있을 때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수원댁은 늙은 마부가 돌아갈 유일한 안식처입니다.
자칫 뿔뿔이 부서질 수도 있는 마부의 가족은 결정적인 지점에서 수원댁의 사랑으로 재구성됩니다. 그녀는 그녀가 연모하는 하춘삼에게 그간 고생해서 모아둔 돈으로 잃어버린 말을 사다줌으로써 다시 마부 노릇을 하게 해주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삶을 마침내 자랑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 안에 숨쉬고 있는 눈물과 아픔, 그리고 사랑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오후, 큰 아들이 말을 끌고 수원댁과 자식들은 한 덩어리의 따스한 가족이 되어 아버지를 에워싸며 도시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 갑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된 도시 속의 마부는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건 산업의 경쟁논리가 가져온 냉혹한 질서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 작품은 더 이상 마부를 요구하지 않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무수한 무명의 낙오자들을 위한 안타까운 진혼곡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하춘삼이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마부〉가 주는 감동은 시대가 외면하려는 "마부의 삶"을 모두가 정겹게 끌어안고 함께 가려는 따뜻한 의지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낡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일으켜 세워야 할 우리들의 힘인 것입니다.
스크린쿼터 축소 앞에서 우리 영화의 현실은 자칫 마부 신세가 될 지경입니다. 경쟁력 운운으로 마부의 직업을 버리라고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욕 맨하탄 중심가 센트랄 파크에는 여전히 마부가 있습니다. 우린 마부와 말 모두를 죽이고 하춘삼까지 죽이려 드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수원댁이 다른 곳으로 재가를 해버려서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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