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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누구를 위한 배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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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누구를 위한 배신인가?"

김민웅의 세상읽기 〈183〉

2차대전 독일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과정에서 살아남은 한 피아니스트의 비운과 생존의 열망을 그려낸 영화 〈피아니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사실 어떤 시대적 절박함이 드러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1946년에 데이비드 린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와도 비교대상이 되는 처지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폴란스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고아 소년 올리버의 억울한 불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들지 않는 그의 선천적인 착함,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주변 인물들과 마침내 이들의 손아귀에서 그를 구해내는 선한 부자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에만 집중해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찰스 디킨즈이 고발하고 있던 당대 영국 자본주의의 계급적 모순이라든가 빈민들을 만들어내고 있던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조명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년 올리버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고난을 겪게 하는 자들은 빈민굴에서 살아가고 있던 악당의 무리들이었고, 올리버를 구해내는 한 선한 부자는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상류사회의 비만과 독점, 그리고 욕망은 영화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 올리버는 빈민굴에서 마침내 빠져나와 생존에 성공하고, 급기야는 상류사회에 합류하게 된 운 좋은 소년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구성은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의 서투른 반복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그가 만든 〈올리버 트위스트〉는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예술가로 복귀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지는 〈피아니스트〉의 영화적 구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찰스 디킨즈의 현대적 해석이나 새로운 조명이 아니라, 찰스 디킨즈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지기조차 합니다.

폴란스키의 작품 속에서는 찰스 디킨즈이 묘사했던 사회적 풍자도 사라지고 당대 영국 지배계급의 야만에 대한 폭로도 도리어 은폐되며 빈민굴의 악당들은 그들의 불운한 운명을 피해갈 도리가 없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올리버가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어 행복한 소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됩니다. 인생에서 제비를 잘못 뽑은 자와 제비를 잘 뽑은 자의 구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정책도 표류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문제의 해결을 정치적 인기의 소재로 삼아 활용하려는 세력들의 움직임마저 감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의 정치사회적 발언권과 권리 주장이 먹혀들지 않고 있는 것에 가장 크게 기인하고 있으나, 이들은 다만 정책적 적선과 동정의 대상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숙제이자 미래에 대한 전망의 근본입니다. 한때 불행했던 올리버가 상류사회의 깨끗한 귀족소년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는 걸로 사태를 종결지으면 다 되는 그런 상황이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 소외되어 있던 이들에게도 특권을 선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특권의 독점구조를 타파해나가는 것, 그것이 무수한 올리버 트위스트들을 구출하는 길의 진정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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