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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그리고 장생이 줄을 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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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그리고 장생이 줄을 탄 까닭은…

김민웅의 세상읽기 〈178〉

"이(爾)"라는 말은 왕이 상대를 높여 친근히 부를 때 쓰이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 단어를 제목으로 하여, 연산군(燕山君)과 광대패의 기묘한 인연, 그리고 궁궐에서 벌어지게 되는 한판의 마당놀이와 정치적 유혈극이 서로 어우러져 전개되는 연극 〈이〉가 영화 〈왕의 남자〉로 환생했습니다.

연산군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유혹에 젖어 들어간 광대패 "공길"의 비애가 연극의 관심이었다면, 영화는 가혹한 시련을 각오하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생명력을 지켜낸 "장생"의, 무엇으로도 순치할 수 없는 원시적 용기와 힘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천하를 움켜쥐고 있으나 사실은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그 내면에는 기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최고권력자 연산의 피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독, 사랑의 숱한 유형, 권력의 유혹과 야만, 그리고 들판의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비극미를 담아 쏟아낸 이 작품은, 사극(史劇)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현대적 필치로 그려낸, 섬세하면서도 깊이 있고, 또한 역동적인 충격이 끊이지 않는 화폭이었습니다.

종으로 태어나 천대와 멸시를 받고 모함까지 겪은 장생은 광대패로 성장하면서, 그 무엇에도 주눅 들지 않는 거친 야성(野性)을 뿜어냅니다. 그가 이후에 펼치게 되는 왕궁의 기와 자락에 매단 줄타기의 극적 긴장은,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야인(野人)과 모든 것을 거머쥔 권력의 팽팽한 대치를 보여주는 압권이자 모든 시대를 향한 민중의 울부짖음이기도 했습니다.

친모가 사약을 받아 죽은 연산의 아픔이 애절하게 다가오고, 그렇다고 그의 폭정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나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헤아려질 때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환원되어 갑니다. 이와 함께 천하의 요부(妖婦)이자 냉혹한 권력의 화신인 장녹수는 그런 연산을 자신의 치마폭에 싸서 천하를 농단합니다.

그러나 광대패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장 남자인 공길에게 연산의 관심이 쏠리자 장녹수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공길의 제거 음모를 꾸미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 광대패들의 놀이가 연산을 압박해 오는 훈구파 대신들에 대한 정치적 살육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결국, 궁궐에 들어간 광대패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흥에 겨워 이루어내는 무대가 아닌, 권력의 노리개가 되어가는 비운에 직면하게 되고 여기서 장생은 자신을 던져 돌파구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으깨지고 눈이 멀고 포박되어버리는 장생은 모든 시대의 무력한 백성의 현실을 그대로 상징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생은 여기에 그대로 굴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권력의 단맛에 취해가는 공길보다는 순수한 공기로 일관함으로써 다소 극적 긴장이 떨어지는 듯한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장생과 공길이 줄 위에서 서로 만나 하나가 되어가는 것은 한발 헛디디면 저 땅 아래로 떨어지는 허공의 허무함이 아니라 그걸 각오하고 모든 것을 건, 허공의 자유를 향해 비상하는 자들의 눈부신 몸짓으로 다가옵니다.

오늘의 세상은 눈치를 보며 줄타기에 능숙해지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장생이 줄을 탔던 것은 혹여 가진 것이 없어도 세상을 아무런 꿀림 없이 내려다보며 허공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백이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난다면, 우린 보다 힘찬 세월을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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