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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애 같다' 놀림받던 아이가 자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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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계집애 같다' 놀림받던 아이가 자살한 이유?

['학교폭력'을 말하다] 학교폭력 다큐 <불리>, 이렇게 봤다

"거의 매일같이 아이들이 머리를 쥐어박고 욕설을 퍼부었다. 한 번 괴롭힘이 시작되면 대체 언제 끝날지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초반까지 친구의 괴롭힘에 시달린 리 허쉬 감독은 미국 내 학교폭력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불리(Bully)>는 미국 백악관에서 상영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두 개의 왕따 방지법안에 서명했다.

<불리>가 던진 물음은 단순하다. 무엇이 평범한 아이들을 자살로 내몰았는가. 아이들은 왜 폭력을 행사하며 희생양을 찾는가.

'Bully'는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작품에는 불리가 아니라 불리에게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들이 나온다. 알렉스(14)는 매일 통학버스에서 친구들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지만,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이 친구가 아니면 누가 친구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폭력에 무감각해진 지 오래다. 역시 통학버스에서 늘 괴롭힘을 당하는 저미야(14)는 울컥하는 마음에 총을 내보이며 친구들을 위협했다가 구치소에 감금된다. 고등학생 켈비는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밝히자 학교에서 왕따 취급을 당한다. 또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타일러와 타이 필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불리>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불거진 왕따 및 학교폭력 문제와 다르지 않다. 허쉬 감독과 <불리>가 지난달 24일 폐막한 제9회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에 초청된 이유이다.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도 왕따 피해자다"라며 "'내가 왕따 당하는 이 상황을 찍어 아버지한테 보여 주면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텐데'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30일 인권교육센터 '들' 배경내 상임활동가, 서울시교육청 인권교육센터에 파견 근무 중인 조영선 교사, 쥬리 청소년성소수자모임 간사와 함께 <불리>의 사례를 바탕으로 학교폭력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학교폭력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미국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게 이들의 공통의견이었다. 다른 구조적인 문제들은 외면한 채 가해자-피해자만의 문제로 학교폭력에 접근하는 태도, 학교생활기록부에 가해 사실을 기재하는 것, 자살한 학생의 문제는 오롯이 가족의 몫이 되는 것 등. 다만 미국에선 이민자와 인종, 계급에 따른 '미국적 진실'이 학교폭력으로 드러난 듯 했다.

배경내 활동가는 "학교폭력 문제를 개별화된 접근으로만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학교폭력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접근방식이 "'싸우는 방식' 자체를 범죄화하고 있다"며 우려했다. 학교폭력은 '아이들끼리는 서로 건드려도, 싸워도 안 된다'라는 경고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조영선 교사는 "남편의 폭력을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여성이 있는 것처럼 폭력적인 관계도 친구 관계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있다"고 이야기 했다. 학교폭력에 대해 '맞으면 신고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볼 수 없는 이유다.

쥬리 간사는 "가정은 전적으로 아이들을 믿어주는 좋은 공간이고,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이라는 <불리>의 전제에 대해 의문을 드러냈다. 이런 의문은 한국의 학교폭력 담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학교폭력에 관한 숱한 논란 속에서 다른 폭력들, 예컨대 가정 내 폭력의 문제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는 것. 학교폭력은 다른 사회 영역에서 생기는 폭력과 떼놓고 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미 있는 지적이다.

이날 서울 서교동 프레시안 1층 강의실에서 이들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편집자>

▲ 미국 내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불리> ⓒEBS

"폭력적인 학교와 전적으로 안전한 가정…맞나?"

프레시안 : 다큐멘터리에 대한 인상이 각자 다를 것 같다. 어떻게 봤는가.

배경내 : 작품에 등장하는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읽어낼 것이 굉장히 많은 반면, 전체 스토리를 끌어가는 감독의 시선이라든가 아이들을 지켜주겠다고 나선 부모들의 인식은 아쉬웠다.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안전해야 한다'는 메시지 이상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조영선 : 학교 안의 구조적 문제가 학교폭력의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해 왔다. 그런데 <불리>가 이런 내 주장을 반박하는 텍스트로 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인권이 상대적으로 잘 보장되고 학급당 인원수도 적은 나라 역시 왕따 문제를 겪는다고 말이다.

학교 여건이 좋던 나쁘던 결국 학교폭력을 보는 프레임은 똑같다. 가해자 행동을 적절히 조절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시각이다. 그런 면에서 아쉬웠다.

쥬리 : 가해자로 지목된 몇몇 학생을 불러서 "네 맘대로 때리고 괴롭혀 봐. 네 학생부 지도 파일에 다 적어줄게. 알겠니?"라고 경고한다. 한국과 같은 방식이다.

또 작품에서 가정은 전적으로 아이들을 믿어주는 좋은 공간이고, 학교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이라고 묘사된다. 여기에 엄마와 아빠가 죽은 아이들의 수호자로 등장하면서 아이들이 학교보다는 가정에 있어야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고 있다. 학교와 상대적 비교이긴 하지만, 가족이 있는 집은 정말 안전한 곳일까에 대해 의문이 남는다.

프레시안 : 이 작품을 본 오바마 대통령이 "학교폭력 없애겠다"며 호평했다고 하던데, 전반적으로 '실망스럽다'는 평인 것 같다. 오바마는 유색인종으로 미국 주류 사회에서 성공한, 일종의 경계인인 셈인데, 그가 공감했다면 뭔가 시사하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배경내 : 작품의 메시지가 울림이 있었다기보다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드러내고 있는 '미국적 진실-어떻게 희생자로 선택되고, 지목되는가' 하는 부분은 우리가 참고할 게 있는 것 같다.

피해자들은 계속해서 '호모' 또는 '계집애 같다'는 놀림을 받는다. 학생들의 실제 성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정상적 남성상에서 빗겨난 존재로 놀림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흑백의 분리나 차별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과 예전에 흑인을 대상으로 이뤄지던 방식이 동성애자에게 넘어갔다는 '미국적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미국 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폭력성이라는 게 여전히 약동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호평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아이들이 제 친구가 아니면 제 친구는 어디 있어요?"

▲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프레시안(최형락)
배경내
: 자살한 타이 필드의 친구가 "미국의 왕이라면 '인기'라는 걸 없애버릴 거예요. 모두가 평등해지게 할 거예요. 그게 옳으니까요"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는 곧 힘이다'라는 것을 보여 준다. '누가 매력적인 존재로 규정되는가'는 문화적·정치적 해석의 요소들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알렉스의 상황을 잘 아는 가족들 사이에서 그는 전혀 문제적 존재가 아니다. 자기감정이나 있었던 일에 대한 표현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동생을 잘 돌보는 배려심 깊은 인물이다. 그러나 학교에만 가면 그 세계에 없어야만 하는 존재처럼 취급받는다. 존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가 자리한 공간에 따라 문제시된다.

켈리도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정체성을 밝힘과 동시에 따돌림이 시작됐다. 관계가 파괴되는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이 시작된 셈이다. 그런데 26주 만에 미숙아로 태어난 알렉스나 발달장애아동의 경우는 기존의 관계성이 파괴되는 게 아니라 관계성을 형성하지조차 못하는, 관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가 그들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학교폭력의 피해자 각각의 사연이 있고, 차별과 폭력이 역동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학교폭력을 분석할 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구체성이 없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분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할 필요를 작품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 갖지 못한 텍스트라는 생각이 든다.

조영선 : 관계에서의 폭력 문제에 있어 성인과 학생은 차이가 있다. 성인들은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훨씬 넓다. 관계를 맺기 위해 자원을 찾을 수도 있고, 어떤 관계는 단절할 수도 있고 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일정 기간 꼭 학교에 있어야 한다.

"학교 갈 때 긴장된다"는 알렉스의 경우 오히려 학교에 안 다니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알렉스는 안정적인 생활을 한다. 동생들을 돌보는 등 자기 역할이 있어 '잉여'라는 생각이 안 든다. 그러나 학교에만 가면 자리를 못 찾고 돌아다닌다. 집에서 하는 환대의 습관들, 배려 등이 학교에서는 무참하게 거절당한다.

프레시안 : 통학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알렉스는 친구들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점심시간에도 혼자인 알렉스는 "전 여기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도 자신이 학교라는 공간과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또래집단에서 소외된 '왕따'인 셈인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광경이다.

# 알렉스와 엄마의 이야기 장면

엄마 : 언제부턴가는 너도 집단 괴롭힘에 적응을 한 거야. 엄마는 깜짝 놀랐어. 까맣게 몰랐거든. 엄마는 앞으로도 적응이 안 될 것 같아. 아이들한테 맞고 차이고 쿡쿡 찔리면 기분이 좋니? 그럼 기분이 좋아?

알렉스 : 아뇨. 뭐랄까. 저도 그냥 무감각해진 것 같아요.

엄마 : 엄마는 이해가 안 돼. 친구라면 너를 기분 좋게 해줘야지. 그래서 친구를 사귀는 거잖아? 친구는 너하고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야. 그 아이들은 너를 때리기 좋은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아.

알렉스 : 그 아이들이 제 친구가 아니면 제 친구는 어디 있어요?

"아이들에게 억지로 친해지라고 할 필요는 없다"

조영선 : 학교에서는 무조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남편의 폭력을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여성이 있는 것처럼 알렉스도 친구들 간 폭력적인 관계도 관계의 일부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또 학교는 청소년기에 일정 기간 머물어야 하는 의무적인 공간이 돼 있다. 따라서 정상성에서 벗어난 친구들에게는 강제로 적응해야 하는 곳일 수밖에 없다. 적응을 미덕으로 여기게 하는 이런 시스템은 미국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쥬리 청소년성소수자모임 간사 ⓒ프레시안(최형락)
쥬리 :
학교 반 배정은 전적으로 교사들에 의해 결정된다. 자기가 선택한 인간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인기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반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확보하느냐가 괴롭힘을 당하느냐, 당하지 않느냐의 기준이 된다. 주제가 없는 만남이고, 싫든 좋든 관계를 맺어야 하는 구조다 보니까 아무 이유 없이 따돌림을 당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배경내 : 성냥갑 같은 교실에서 다닥다닥 붙어지내는 아이들로서는 관계에서의 실패, 혹은 배제가 어른 사회보다 더 치명적이다.

조영선 : 아이들이 억지로라도 서로 친해져야만 한다는 강박을 깨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반 아이들에게 '네가 1년을 보낼 때 이 반 안에 꼭 누군가 너랑 친한 친구를 만나게 되는 건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다. 사람으로서 단짝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고 대부분은 그런 친구를 못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서로 단짝 친구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도 '함부로 친구라고 얘기하지 마라'라고 충고한다. 담임인데도 그렇게 말한다. '너희는 아직 친구가 아니야. 관계가 그렇게 쉽게 맺어지는 게 아니야. 예의를 갖춰'라고 강조한다.(웃음)

뻔히 보이는 관계라는 게 있다. 이런 식의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는 인성교육방식은 오히려 개인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거리'이기도 하다. 서로 간의 '거리'를 존중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괴롭힘 당한 아이에게 주는 교훈이 고작 '총 들면 안 된다'뿐?"

배경내 : 알렉스가 학교에 안 가는 것이 차라리 행복할 수도 있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학교 바깥의 다른 사회는 어떤가' 하는 질문이 동시에 떠오른다.

알렉스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괴롭힘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겠지만, 알렉스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지 않는 한 또 다른 다양한 폭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이후 사회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사회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려면 학교에서도 함께 지내야 한다. 그런데 알렉스의 정체성이 '나는 호모가 아니야', '난 바보가 아니야'라고만 규정된다면 폭력이 결코 줄어들 수 없다.

# 알렉스와 교사의 상담 장면

알렉스 : 방석을 들어 올리고 제 머리를 끼운 다음 깔고 않았어요.

교사 : 어째서 선생님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알렉스 : 잘은 모르지만….

교사 : 나한테 말한 뒤에도 테디가 그랬니? 선생님이 테디한테 얘기했어. 그 뒤로는 너를 깔고 앉지 않았지?

알렉스 : 하지만 그 뒤에도 다른 방법으로 저를 계속 괴롭혔어요.

조영선 : 이 작품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과 해답이 굉장히 엇박자라는 생각이 든다. 소년원에 수감됐던 저미야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인데도 가해자인 양 취급받았다. 또 자살한 타이 필드의 친구는 '자기가 맞서 싸우니까 친구인 타이 필드가 희생양이 됐다'고 말한다. 폭력의 피해를 입었지만,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센 척'을 해야 학교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결국 폭력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고 권력 관계의 문제임에도, 이 작품은 '부모들은 폭력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학생들이 방어해줄 것', '친구가 놀림을 당할 때 놀리지 말라고 말해줄 것' 등을 호소하며 집회를 연다. 수많은 보호자를 세우는 방식인데, 보호자를 촘촘히 세우는 것만으로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결론이다.

괴롭힘에 시달리다 통학버스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소년원 생활을 한 저미야는 법원에서 정상참작이 돼 집으로 온 후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 행동은 너무 심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상처받은 기억은 삭제된 채로 본인의 가해 행동만 기억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한다. 문제 해결이 이런 식이면 또다시 폭력에 노출됐을 때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다. 그냥 '총을 들면 안 된다'라는 의식 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답답했다.

"아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고정되기 전에 문제 해결해야"

# 학생과 교사의 대화 장면

교사 : 선생님 말 좀 들어봐. 그 애는 사과하려고 했어.

콜 : 사과는 전에도 받았지만, 진심이 아니었어요. 계속 저를 괴롭혔다고요.

교사 : 너도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 때 진심이 아니었잖아. 너도 그 애하고 똑같다는 얘기야. 안 그래? 네가 싫어하는 일은….

콜 : 저는 남을 괴롭히지 않아요.

교사 : 악수를 거절했으니 너도 똑같아.

콜 : 제가 다른 애를 벽에 밀어붙이고 팔을 부러뜨린다고 협박을 하고 찔러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나요? 쏴 죽인다고 협박했어요?

교사 : 사과했잖아. 그런 일 당하고 신고는 했니?

콜 : 네.

교사 : 그럼 뭔가 조치가 있었겠네.

콜 : 경찰관도 걔한테 제 옆에 가지 말랬어요. 하지만 듣지 않았다고요.

교사 : 잘 지내려고 노력해봐. 언젠가는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

콜 : 예전에는 친했죠. 그러다 절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배경내 : 교사가 운동장에서 투닥거리다 들어온 학생들을 불러 억지로 악수를 시키는 장면이 있다. 교사의 지시에 가해자가 냉큼 손을 내밀고, 그동안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호소는 묻힌다. 그저 악수하고 빨리 화해해 끝내라는 식이다.

학교폭력 문제를 개별화된 접근으로만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가 진정으로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불리>는 어른들과 학교가 얼마나 유능한지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영선 : 성인이 개인 상담을 할 때 기본은 그 관계의 어려움에 대해서 제삼자가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상담하면 그런 상담을 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는데, 학교폭력 문제를 상담할 때는 학생들을 불러놓고 대뜸 '너 사과해'라고 한다. 관계를 더 어그러지게 할 뿐이다.

프레시안 : 아이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역학관계가 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런 관계를 무시한 채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 같다. 아이들이 정치적 진공 상태에 있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조영선 : 세상도 마찬가지이고, 학교도 마찬가지인데 정치적 역학관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아주 역동적이다. 그래서 관계가 고정되기 전에 문제를 터트려 주는 게 필요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테일러나 타이 필드처럼 아이들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정된 권력관계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누구도 구해주기 어렵다. 아이들 사회에서 그대로 아웃(out)되기 십상이다. 학교폭력, 왕따 등에 대한 어른들의 역할을 이야기한다면, 아이들 사이에서 권력관계가 고정되는 바로 그 지점을 어느 순간, 어떻게 포착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개입하고, 어떻게 분위기를 만드는지에 대해 보다 풍부하게 논의해야 한다.

배경내 : 다큐멘터리 속에 피해자 부모들이 만든 '침묵하는 아이들을 지켜라'라는 단체가 나온다. 그런데 이 단체의 메시지가 명확하지는 않다. 학교폭력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학교의 무능을 경고하는 역할로는 충분하지만, 여러 가지가 혼재된 느낌이다.

가해학생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기도 하는 것 같고, 부모들이나 시민들이 나서서 아이들을 지켜달라고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해서 저 상태로 어떻게 해결된다는 말인지 좀 갸우뚱하게 된다.

"반장이 ○○대학 가야 하니까 마무리하자"

프레시안 : 학교폭력이 사회적 의제가 된 건 최근이다. 그러나 아주 익숙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은 '아이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학교폭력의 양상은 과거부터 늘 그래왔던 부분과 최근 새롭게 나타난 부분이 섞여 있다. 사회·경제적 조건의 차이가 차별과 따돌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늘었다는 점은 확실히 새로운 양상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를 잘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서울시교육청 인권센타에서 파견 근무 중인 조영선 교사 ⓒ프레시안(최형락)
조영선
: 우리 사회가 학생들을 각자의 정체성을 가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있다. 10대 안에도 다양한 정체성이 있는데 '10대'라는 성장기의 한 단계로만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는 폭력적인 행동은 성장기 한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

소위 '잘 나가는' 아이들 집단을 보면 여러 가지 정체성이 합쳐져 있다. 공부도 잘하고, 집이 잘 살기도 하고, 또 놀기도 잘하는 등 모든 요소가 들어가 있다.

최근 상담사례인데, 한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을 멘토와 멘티 관계를 맺어줬다. 그런데 멘토인 공부 잘하는 반장이 금품갈취와 폭력을 행사하는 등 멘티를 괴롭혔다. 문제가 불거지자 학교는 '반장이 ○○대학에 가야 하니, 여기에서 마무리하자'는 식이었다. 이는 계급적인 문제가 학생들 사이에 폭력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학교폭력 문제가 해결되려면 학생인권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해 왔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선언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냥 막연히 옳은 말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아예 이해 자체를 못하는 것이다. 학교폭력과 학생인권이 서로 무슨 관계냐고 한다.

개인이 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해 주는 것이 학교폭력 해결의 전제 조건이다. 직장 내 왕따 문제와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성인이건 아이들이건 폭력 문제를 제대로 풀려면 개인의 권리, 개인의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학교라는 특수성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엉뚱한 대책이 나온다.

"성적 나쁜 아이에 대한 멸시, 혐오도 학교폭력이다"

쥬리 : 학교폭력 가해자의 이미지는 대체로 '날라리'다. 교칙을 잘 안 지키고 반항하면 학교폭력 예비 가해자인 '날라리'가 된다. 날라리들은 주로 가난하거나 부모가 맞벌이인 경우여서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모범생으로 불리는 아이들은 집이 잘 사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부모가 시키는 공부 덕에 모범생이 된다.

그런데 모범생과 날라리에 대한 고정 관념이 최근에는 많이 깨지고 있다. 모범생이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고, 날라리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배경내 : 학교폭력의 주요 가해자 군이 기존의 성인들의 고정 관념을 끊임없이 이탈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잘 나가는 집안의 학생이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연루됐을 때 이들의 행위가 기록에 남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부모가 재력이나 인적 자원을 활용해 문제를 축소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다.

학교폭력 논의가 물리적으로 때리는 것에만 국한돼 있다보니, '멸시', '혐오' 등과 같은 다른 정신적 폭력은 아예 사건 취급도 못 받는다. 예를 들어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 대한 멸시 또는 혐오, 이런 폭력 말이다.

"'순정한 폭력'은 없다"

조영선 : 학생들의 삶 속 폭력적 양태라는 게 '맞으면 신고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단순하지 않다. 가해자라고 해도 어느 날은 피해자에게 잘해줬다가, 어느 날은 위협하기도 하고를 반복한다. 그러다 한순간, 피해자가 신고할 수 없는 순간에 폭력을 행사한다. 일종의 가정폭력과 비슷하다. 피해자 입장에선 매를 맞으면서도 '이것은 사랑이다'라고 믿었다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등 계속 헷갈린다.

프레시안 : 폭력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교육의 목적은 아닐 게다. 약자를 향한 폭력은 안 되지만, 불의를 봤거나 폭력을 당했을 때 싸울 수도 있어야 한다. 불의 앞에서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 어쩌면 그것도 교육의 한 목표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싸움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학교폭력 대책이 우려스러운 것은 그래서다.

조영선 : 최근 학교생활기록부에 폭력 여부를 기록하는 문제 때문에 말이 많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방어적인 폭력도 폭력으로 기재된다는 데 있다.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이 학교폭력자치위원회에 올라간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폭력 앞에서 저항하느라 발을 걸었는데, 가해자가 주변 사물에 맞아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봐야 하나. 가해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봐야 하나. 세상에 '순정한 폭력은 없다. 폭력은 몹시 복잡한 현상이다.

프레시안 : '순정한 폭력은 없다'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수학시험 점수는 객관적인 기록일수 있다. 그러나 폭력을 그렇게 객관적으로 기록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센 척'해야만 살아남는 학교"

배경내 : 우리 사회는 '싸우면서 큰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말이 한편으로는 이상하면서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생을 싸우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방식은 '싸우는 방식' 자체를 범죄화하고 있다. 폭력에 대항하거나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책상을 치고 일어나거나, 위협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것들까지 모두 폭력이라는 범주에 묶는 것은 잘못이다.

조영선 : 우리 사회는 인간이 살만한 환경을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고, 살아남은 인간만 대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쓰는 모든 수단들을 합리화하려 한다. 학교가 바로 그런 공간이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센 척'해야만 한다. 상당수 폭력은 그 과정에서 생긴다.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식으로든 '센 척'하는 것이다. 폭력을 쓰는 교사들도 사실은 '센 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교에 의한 폭력도 학교폭력이다"

프레시안 : 우리 사회, 그리고 학교에선 오랫동안 '극기'가 미덕으로 통했다. 고통을 잘 참아야 훌륭한 인간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다 보니, 억지로 '센 척'하는 아이들도 생겨난다. 학교폭력이 문제가 된 김에, '극기', '인내'를 강조하는 학교 문화에 대해서도 한번쯤 짚어봐야 할 것 같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작은 괴롭힘은 도저히 드러낼 수 없다. '센 척'해야 살아남는 곳에서 '나는 나약하다'라고 선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은 괴롭힘이 이렇게 감춰지면, 결국 큰 괴롭힘도 마찬가지다. 폭력이 곪을대로 곪은 뒤에야 드러나게 된다.

배경내 : <오늘의 교육> 7·8월 호에 공현이 쓴 "무지의 시스템"이라는 글이 있다. "감옥은 랜덤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몇 시에 운동을 하게 될지, 어떤 크기의 옷이 주어질지 모든 것이 랜덤이다'라고 한다. 또 '랜덤은 무지다'라면서 수용자들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체계로 감옥이 움직이고, 수용자에겐 철저한 무지가 강요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무지'가 시스템으로 작용한다는 게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감옥과 학교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무작정 참기만 하라고 강요하는 학교체제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자신과 맞지 않는 게 있는데 왜 참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곳, 그게 감옥과 다를 게 무엇인가. 학교폭력이 학생 간력 또는 교사와 학생 간 폭력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학교체제에 의한 폭력까지 아우르는 개념으로 정의되야만, 학교폭력을 둘러싼 이야기가 제대로 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 <프레시안>은 지난달 30일 쥬리 간사, 배경내 활동가, 조영선 교사와 함께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다큐멘터리<불리>를 바탕으로 '학교폭력'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학교폭력'을 말하다

"'일진' 솎아내면 학교폭력 해결?…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
"폭력과 섹스 말고 놀 줄 모르는 아이들,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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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의 '밥상머리 교육'? 밥 먹다 체할라"
"2주에 한번씩 자살…학교는 폭력의 숙주"
전학 학생 첫 마디, "어느 아파트 살아?…그런대로 사네"

"아빠, 자살하면 기분이 어떨까?" 묻던 아들, 실제로…
합기도 7단 일본 지성이 말하는 '학교 폭력'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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