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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너희가 진짜 민족주의를 알아?

[핫피플]〈청연〉의 친일논란, 그리고 감독 윤종찬의 직격발언

이번 인터뷰는 오리아나 팔라치 식으로 하자고 생각했다. 이른바 뉴저널리즘 방식으로. 인터뷰이의 생각과 함께 인터뷰어인 나의 생각을 함께 개진하는, 남들이 얘기하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인터뷰 방식 다 때려 치우고 나의 관점을 집어 넣는 인터뷰를 하자고 생각했다. 영화 〈청연〉을 둘러싼 친일 시비에 대해 나는 명백히 영화쪽 입장에 서있으니까. 영화를 만든 윤종찬 감독의 태도를 지지하니까. 영화를 보지도 않은 채 박경원의 친일행각을 명분으로 내세워(이것 역시 조금 더 역사적 평가 작업이 이루어진 후에야 판명이 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에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는 작금의 행태를 경멸하니까. 그러면서 그걸 민족주의라고 떠드니까. 그런데 그건 정녕 쇼비니즘일 뿐이다. 그러니 객관,중립,공정이란 말은 버리자. 그런 말은 때론 정치적으로 비겁한 용어일 수 있다. 저널리즘은 때론, 욕을 먹더라도 정치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관점을 지녀야 한다.

내가 아는 윤종찬은 이른바 친일분자도 아니고, 국수주의자도 아니며, 아무런 생각이 없는 단순무식한 영화 기능공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결점을 지닌 작가주의적인 상업영화 감독이다. 그의 전작 〈소름〉이 그랬다. 2001년에 그의 영화 〈소름〉을 보고 난 이런 글을 썼다.

"무섭고 잔인한 장면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섬뜩한 느낌에서 벗어나기가 힘이 들었던 이유는, 극 전편에 흐르는 폭력적인 정치의식때문이다. 난, 이상하게도 이 영화가 매우 정치적으로 읽혔는데,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폭발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사회 하층민들의 계급적 분노와 증오, 그리고 세상을 쓸어 버리고 싶어하는 극단적 태도들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을 만들었던 감독이 4년 만에,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있을 법한, 친일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다. 사람의 생각은 그리 쉽게 변하지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정치적으로 매우 정치한 이론을 갖고 있는 윤종찬 감독이 이번 박경원 영화를 만들면서 과연 지금의 논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거기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이데올로기적 함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때문에 그래선 안된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서 얘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됐는가?

한 영화사에서(〈친구〉 〈말아톤〉 등을 만든 씨네라인2를 말하는데 이 영화사는 결국 100억원에 이르는 제작비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하차하게 된다)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모니터링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리고 내가 만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나리오상의 몇 가지 문제, 영화적인 장치나 기법에 있어서의 오류 등을 지적하는 선에서 얘기를 전해줬다.

-그 몇가지 문제가 뭐였는가?

(윤종찬 감독은 여기서 오프 더 레코드라며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지금의 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를 다소 곤란하게 하더라도 그의 대답을 그대로 싣는 것이 낫다고 본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박경원이 정말 민족의 영웅처럼 그려져 있었다. 일제의 탄압을 온몸으로 견뎌낸 여성 영웅으로 말이다. 예컨대 영화 끝부분에 박경원이 일만친선비행을 떠나는 장면에서도 일본에 의해서 억지로 죽음의 비행을 떠나는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근데 그건 사실과 다른 얘기였다. 그 비행은 박경원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까지 친일부역 논란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그 시나리오대로 박경원을 그렸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더 큰 의미의 친일 행위일 수 있다. 그때의 행동을 마치 항일의 영웅담으로 채색해 내는 거니까. 나는 박경원의 당시 선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를 잘보면 박경원이 마지막 비행을 떠나는 장면이 흑백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옆에 일장기를 보다 빨갛게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장기옆에서 손을 흔들던 박경원은 그때 일본을 선택한 셈이었다. 매국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버릴 수 없는 비행의 꿈을 위해서였을까?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국가나 조국 같은 거대담론일까 아니면 그 이전의 무엇일까? 박경원의 영화를 만들면서 나 스스로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점이었다.

역사를 단선적인 입장에서 보면 애국과 매국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나 역사를 신축적으로 보면 애국과 매국은 종이 한장 차이일 수 있다. 비극적 역사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애국과 매국의 차이가 앞의 경우보다는 뒤의 경우일 때가 더 많다. 어쩌면 윤종찬이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박경원의 아슬아슬한 삶에 경도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경원이 매국노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꿈의 비행을 선택했듯이 윤종찬은 친일논란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영화감독으로서 스텍타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유혹을 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속 박경원은 영화 바깥의 윤종찬이다. 이 둘은 과거와 현실의 비극적 역사를 잇는 두 자아다.

-이 영화에 있어 최대 승부처는 박경원의 삶을 변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그래서 조선적색단으로 몰린 한지혁을 박경원이가 면회하는 장면이다. 거기서 한지혁은 박경원에게 일장기를 달고 일만친선비행을 떠나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지혁의 대사다. 한지혁은 박경원에게 '그렇다고 조선이 너에게 해준 것도 없잖아'라고 말한다.

이들도 시대의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만을 기억하거나 기억해야 한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아주 평범하고 때론 비겁하고 종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시대의 짓눌림은 존재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모든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지 모른다. 맞다. 박경원이 일본에 가서, 일본사람들의 도움으로 비행학교를 다니고, 시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이기적인 꿈만을 이루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 시대를 짓누르던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다. 박경원이 참가했던 비행대회 같은 것, 그 장면을 대규모의 몹씬으로 처리했던 것은 그 광기, 그 집단주의, 군국주의로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던 당시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대회에서 박경원이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으로 그걸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처리했던 것은 박경원이 실리를 얻은 대신 명분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극 후반에 가면 또 다른 조선 여인인 이정희(한지민)가 박경원에게 퍼붓는다. 네가 비행에 성공한다 한들 나중에 누가 널 기억해 줄지 아느냐, 너를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낱낱이 너의 비행(非行)을 까발릴 것이다,라고. 박경원의 행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그 양면을 영화속에 다 담아내려고 고심에 고심을 했다.

- 영화를 보면, 그 고민이 읽혀질 수가 있다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DJ정부 시절에도 박경원에 대한 애기가 '국내 최초의 여류비행사'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는 스크랩한 기사를 갖고 있었다.) 1970년대 기사는 비행기 옆의 일장기를 살짝 지웠다. 1980년대 기사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는데 두 기사 모두 박경원을 친일분자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박경원의 '청연'이 추락한 지점에 박경원 기념관을 만든 것은 DJ정부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내 영화는 박경원의 '친일문제'에 관한 한 예전에 비해 훨씬 앞으로 더 나아간 것이다. 이 영화가 박경원의 친일행각을 미화했다는 논리는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윤종찬의 이 같은 주장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 된다. 실제로 영화관람후 관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극히 일부만이 친일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박경원이 친일매국노였느냐 아니냐의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생애를 그린 영화 '청연'이 친일을 미화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지금 이 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그런 면에서 본말이 전도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 전도된 본말 때문에 윤종찬과 오랜 시간동안 나눈 얘기, 정작 영화를 만들면서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에게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고난도의 비행 신 촬영과정들, 고통스러웠던 CG작업들, 우여곡절을 겪여야 했던 중국 일본 미국의 로케 과정들 등등. 안타깝게도 그 얘기는 뒤로 미루어야 할 것이다.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를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진 김정민 프레시안무비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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