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인가 저녁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전도연과 일행들은 이미 한 순배의 잔이 돈 후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전도연이 맥주잔에 소주를 콸콸 붓더니 오빠! 후래자 삼배,한다. 그리고 배시시 웃는다. 그것도 눈웃음으로. 윽. 저 눈웃음을 어떻게 당해. 그래 까짓 거, 이 한잔 쯤이야. 차가운 소주를 꿀꺽꿀꺽 마신다. 크아. 이젠 됐겠지. 설마 삼배까지야 할라고. 그러나 천만에. 전도연은 내가 다 마신 술잔을 다시 휑하니 낚아 채더니 또 다시 한잔을 콸콸 따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진짜 삼배라니깐!을 외친다. 그리고 또 배시시 웃는다. 그래서 다시 한잔을 꿀꺽꿀꺽. 정말 설마설마했지만 다시 마지막 잔까지 꿀꺽꿀꺽. 이날 난 전도연 때문에 도착하는 즉시 새가 되고 말았다. 전도연은 그런 여자다. 살짝 눈꼬리가 들리는 배시시 웃는 웃음으로 사람을 휘어 잡는 여자다.
***화끈하고 직설적인 여자**
전도연은 스크린에서와 달리, 예컨대 초기작이었던 '접속'이나 비교적 최근작이었던 '스캔들'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매우매우 터프하고 화끈하고 직설적인 여자다. '스캔들'에서 배용준의 배신을 알고 그 자리에서 스르르 무너지는 청순한 여인? 그 장면을 보면서 실제의 전도연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쩜 저렇게 여우처럼 연기를 해댈까 싶었다. 전도연은 술도 잘 먹고 화도 잘내며 자기 의견이 분명한 여자다. 순간순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게 상당한 매력을 준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서 최고의 스타를 앞에 앉혀 놓고 괜스레 주눅이 들어 있을 법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준다. 그것도 확.
자신의 본래 이미지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캐릭터는 아마도 정지우 감독의 데뷔작 〈해피엔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가 거기에서 어떤 설정의 캐릭터로 나왔는지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싶다. 다만 뚜렷하게 기억이 남는 건, 남편이 됐든 애인이 됐든 관계를 리드하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실제의 전도연은 그게 맞다. 남의 의견과 행동을 따라가는 쪽이 아니라 그게 잘못됐든 잘됐든 일단 자기의 생각이 잡히면 그 방향으로 밀고 가는 쪽, 주도하는 쪽이다. 그래서 늘 그녀에게서는 자신감, 당당함이 느껴진다. 사람들과 얘기할 때 늘 코를 오똑 세우는 느낌을 주는 건 그때문이다.
***스타가 아닌 배우**
전도연은 단순한 스타가 아니다. 그건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알 수 있다. 청순하고 자분자분한 이미지로 살며시 다가오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처럼 얼굴에 칼자국 죽 한 줄 긋고, 이 세상 밑바닥 인생 거칠게 살아가는 모습을 선보인다. 조그맣고 가냘픈 표정에서 쌍소리와 욕설이 난무해도 그게 오히려 오호 전도연, 인생의 진국을 알고 있구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저자 거리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는 건, 배우로서는 그 연기의 폭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도연이 영화마다 능숙한 자기 변신을 해낼 수 있는 건,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의 깊이를 마음 안에 담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뭐? 그건 나도 잘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배우의 실제 삶이 어떻든 우리는 그를 스크린에서, 혹은 배우로서만 만나면 될 뿐이다. 과도한 관심은 금물. 자칫 다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연 이 여자, 진짜 배우가 다 됐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부터다. '인어공주'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영화에서 전도연은 1인2역을 해냈는데, 한꺼번에 두 인물을 연기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두가지 중의 한쪽의 배역이 스스럼없이 '망가지는' 역이라는 데에 있었다. 배우가 진짜 배우가 되는 길은, 자신의 기존 이미지를 180도 뒤집어서 스스럼없이 볼품없는 인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인어공주'에서 전도연은 도심의 세련되고 당당한 현대여성의 이미지를 버리고 새까만 얼굴에 촌스럽게 머리를 땋아 내리고는, 몸빼 바지를 입고 다니는 해녀 역을 정말로 정말로 충실하게 해냈다. 〈인어공주〉에서 전도연의 연기는 그래서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박진표 감독의 신작 '너는 내 운명'에서 전도연은 다시 한번 '망가진다'. 몸을 파는 데다가(과거이긴 하지만) 이제는 AIDS까지 걸렸다. 이 영화에서 전도연은,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남자 황정민을 향해 처연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난 당신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에요, 라고. 비극이란 것도 끝까지 끝까지 가다 보면 아름다움과 진실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전도연은 바로 그런 여자다. 비참한 상황에도 내 옆을 지켜줄 것과 같은 여자. 함께 펑펑 울어주고, 그 중간중간 배시시 웃으며 차라리 웃자라고 얘기해 줄 것 같은 여자, 그래서 왕창 소주 한잔 같이 하고 싶게 만드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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