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하는 것 같아 뭣하지만 배우 황정민은 솔직히 내가 발굴한 인물이다. 아니 그건 좀 아무래도 지나친 표현이다. 그럼 이렇게 고치겠다. 내가 발굴한 인물이나 마찬가지다. 그게 그건가? 사연은 이렇다.
***배우의 발견**
2002년 말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지금은 감독이 된 배우 방은진이 와인파티를 열었다. 아마도 연말 망년회로 마련한 자리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그때 그사람들〉의 임상수 감독과 당시 막 첫 작품을 찍은 김인식 감독이 있었는데, 실은 두 사람은 방은진을 캐스팅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임상수 감독은 〈그때 그사람들〉 전에 〈바람난 가족〉을 준비중이었고 방은진을 주연으로 쓰고 싶어했다. 임상수 감독의 친구로 시나리오 각색작업을 함께 한 김인식 감독은 지원사격차 같이 온 것이고. 하지만 방은진은 최종적으로 두 감독의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주연은 문소리에게 돌아갔고 문소리는 이 영화로 칸과 베니스 등에서 〈오아시스〉 이후 다시 한번 크게 주목받게 됐다.
만약 방은진이 이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여배우가 됐을까? 하지만 지금처럼 〈오로라 공주〉로 훌륭한 감독데뷔전을 치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인생은 늘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어쨌든 다시 황정민 얘기로 돌아가자. 이번 호는 황정민을 위한 것이니까.
방은진과의 대화가 안되는 방향으로 거의 일단락되는 분위기가 되자 별로 할 얘기가 없던 임상수 감독은 내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오 기자, 이 친구(김인식) 영화 봤어요?" "아직 공개가 안됐는데 어떻게 봐요?"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영화가 너무 흉측해서 보기 힘들 거에요." 그러자 김인식 감독이 발끈했다. "뭐가 흉측해! 아니 지는 유부녀하고 고등학생하고 하게 만드는 주제에 누구보고 뭐라는 거야!"
결국 영화가 개봉되기 전, 내 사무실로 김인식 감독이 보낸 비디오 하나가 날아왔다. 절대 흉측하지 않다는 설명과 함께. 비디오를 켰다. 오프닝 장면이 시작됐다. 시작하자마자 두 사람의 격한 정사 신이 나왔다. 이게 뭐… 흉측하다는 거야…조금 격렬하긴 하네…하지만 다음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거벗은 두 사람은 바로 두명의 남자였던 것이다. 영화제목을 다시 들여다 봤다. 〈로드무비〉. 그때 〈로드무비〉를 본 '충격'으로 쓴 기사가 '한국영화, 위험한 섹스의 반란을 꿈꾼다'였다. 그랬다. 내게 있어 황정민과 그의 첫 주연작품 〈로드무비〉는 그렇게 발견됐다.
***영화에 미쳐서, 연기에 미쳐서**
장황한 얘기였으나 여기까지 와서 앞의 글을 다 뭉개고 황정민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로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 배우는 그가 연기한 영화로 얘기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큼 황정민에게만큼 잘 어울리는 얘기도 없을 듯 싶다.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시작으로 〈로드무비〉와 〈YMCA 야구단〉 그리고 〈마지막 늑대〉와 〈바람난 가족〉, 〈여자, 정혜〉 〈달콤한 인생〉,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너는 내 운명〉 등등.
2001년, 비교적 늦깎이로 데뷔한 황정민은 만 4년간 단편을 포함해 모두 13편의 영화에 전광석화처럼 출연했다.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렇고 그런 작품들이 아니라 모두 다 개성있고 의미있는 작품들이다. 배우에게 그런 일은 흔한 것이 아니다. 흔히 올 수 있는 기회도 절대 아니다. 그건 다시 말해서, 황정민이 흔한 배우가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그는 작품들마다 각각의 다른 이미지를 훌륭히 소화해낸다. 예컨대 〈달콤한 인생〉에서의 백 사장을 기억하는가? 황정민은 이 무식하고 잔인한 조폭 연기를 위해 이마 앞부분을 머리카락을 깨끗이 뽑아 내기까지 했다. 체육관에서 이병헌에게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 떨어대는 그 호들갑 연기는 배우들이란 영화에 미쳐야 하는 것이고 연기에는 더욱더 미쳐야 한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로드 무비〉에서는 치렁치렁 뒷머리를 기르고 홈리스로 살아가는 터프한 동성애자로, 〈바람난 가족〉에서는 모던한 이미지의, 그러나 위선적인 변호사로, 〈여자, 정혜〉에서는 우유부단하지만 부드럽고 착한 이미지의 소설가로, 〈너는 내 운명〉에서는 AIDS든 뭐든 죽어도 좋아라며 사랑을 외치는 순박한 남성으로, 황정민은 시시각각 껍질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영화계에는 황정민 때문에 설경구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얘기까지 흘러 나온다. 아마도 그건 황정민이 설경구를 잇는 대형스타로 성장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충무로에서는 황정민을 '황배우'라는 닉 네임으로 부른다. 그래도 그 말은 정정하는 것이 좋겠다. 설경구씨가 들으면 갑자기 역도산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새로운 사람은 계속 나타나는 법이다. 지금은 명실공히 황정민의 시대다. 그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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