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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활동 하시는 분, 갈수록 많아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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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봉사활동 하시는 분, 갈수록 많아지고 있어요"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12/08] 40년간 의료봉사활동 펼쳐온 유루시아 수녀

요즘 우리는 생명을 소중함을 잊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소식들, 몇 푼의 돈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는 일들이 하루가 멀지 않게 들려옵니다.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바친 슈바이처는 "선(善)이란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데 있다'고 했는데요. 오늘 집중인터뷰에서는 평생 아프리카 오지에서,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평생을 생명 사랑을 펼쳐온 분을 만나봅니다. 이 시대의 슈바이처, 오늘날의 테레사 수녀라 할 수 있는 분인데요. 케냐에서는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부른답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세계의사회가 '세계 참된 의사'로 선정한 유루시아 수녀입니다. 유루시아 수녀는 1931년생, 본명은 유우금씨입니다. 현 고려대 의대 전신인 수도 여자 의과대학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위스콘신 대학 성모병원에서 산부인과 레지던트를 수료했습니다. 1965년 필리핀 소재 메리놀 수녀회 수련원에 입교해 수녀가 된 뒤 의료 선교를 시작해 1968년부터 20여년간 아프리카 케냐에서 의료봉사를 해왔습니다. 1992년 귀국 후 현재는 서울 영등포의 요셉의원에서 노숙자와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수녀님, 안녕하십니까?

유루시아 수녀 :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바쁘신데 방송국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시는 데 힘드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힘들지는 않았는데 날씨가 추워서 조금은 힘들었지만, 불러주신 성의를 생각해서 열심히 왔죠.

박인규 :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보통 수녀님 하면, 검은 모자 같은 것도 쓰시고 제복을 입으시는데, 지금은 평상복차림으로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할머님 같은 모습이시네요?

유루시아 수녀 : 네. 우리 요셉병원에서 노숙자들이 술 좀 드시고 오시면, 저를 보고 할머니, 어머니라고..수녀라고 하면 잘 모르죠. 그게 더 좋은 거 같아요.

박인규 : 우선은 축하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세계 의사회가 선정한 "세계참된의사" 물론 한 분은아닙니다. 전 세계 55개국에서 65명. 우리 나라에서는 루시아수녀님과 연대의 김동수교수님이 하셨는데, 축하 드리고요. '참된 의사'.. 어떤 것 보다 명예스런 호칭인 것 같은데요. 어떻게 선정이 되고, 이 상은 어떤 겁니까?

유루시아 수녀 : 저는 어떻게 생각하면, 호랑이에 잡힌 거 같아요. 저는 할 일을 한 거 같은데, 금년 3월에 제약회사에 봉사상을 받았는데 그때도 제가 "자격이 없는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 대한의사협회에서 저를 추천을 한 것 같아요. 세계의사협회에. 그래서 제가 뽑혔는데, 지금도 "내가 뭘 했나.."라는 생각도 들고, 대단하다고는 느끼지 않는데 그렇게 뽑힌 거 같아요. 그런데 축하한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웃음)

박인규 : 봉사상도 받으시고, 참된의사로도 뽑히시고, 말하자면 올해는 상복이 터진 해이시네요?

유루시아 수녀 : 그렇다고 우리 친구들도, 동생, 언니들이 "와 이번에 루시아가 상 복이 터졌다"고 해요.

박인규 : 혹시 상금 같은 것은 없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보령제약에서 준 상은 상금을 제가 받았습니다.

박인규 : 어디 곳에 쓰셨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수녀원에 주죠.

박인규 : 그러십니까?(웃음) 연세가 만으로 일흔넷이시고, 우리 나이로 일흔다섯이신데, 아직도 활동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나누어 쓰고 계신가요?

유루시아 수녀 : 제가 요셉병원에 월요일에 나가죠. 월, 목, 금 그렇게 나가고, 제가 젊은 여성들이 혹시 외방선교 가겠다, 또는 수녀회에 들어오겠다, 자신들이 일생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방황하는 여성들이 오면 그 분들을 만나고, 가르쳐 주고, 인도해 주고, 그 일이 아주 저에게 보람이 있는데도 힘이 들어요.

박인규 : 외방선교라는 것은, 외국에 나가서 선교를 하는 거죠?

유루시아 수녀 : 그렇죠. 우리 나라가 아니고 외국으로 나가서…

박인규 : 이번에 수녀님께서 '참된의사'에 선정이 되신 것도 제가 알기로는 20년간 아프리카 케냐에서 의료선교를 하셨던 것이 큰 것 같은데요?

유루시아 수녀 : 아마도 그 부분의 비중이 컸을 겁니다.

박인규 : 그 말씀에 들어가기 앞서서 이력을 보면 원래 의대를 졸업하시고, 의사를 하시다가 제가 알기로는 조금 늦게 서른살이 넘으셔서 수녀님이 되셨는데, 어떻게 해서 의사를 하시다가 수녀님이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유루시아 수녀 : 그 것은 제가 쓴 책에 나오는데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구로서 나에게 가까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분들을 보고 제가 "이 사람들의 종교가 무엇인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사나?" 이렇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박인규 : 미국에서 만나신 분들이?

유루시아 수녀 : 네. 우리 한국 사람도 만나고, 미국 수녀들도 만나고, 미국 보통사람들도 만나고, 그래서 그 분들에게 제가 "당신들의 종교는 뭔데 이렇게 사느냐?"라고 질문을 한 날이 있었습니다.

박인규 : 그러시다가 카톨릭이라는 것을 알게 되시고, 수녀가 되어야겠다?

유루시아 수녀 : 네. 카톨릭의 교리를 받고 수녀가 되려고 했죠. 그런데 카톨릭 교리를 받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제가 의사이고 해서 힘들었는데 3년에 걸려서 받았습니다.

박인규 : 워낙 집안 불교집안이라고 하던데, 반대는 없었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아주 독실한 불교신자이셨는데, 특히 우리 아버지가 자선에 힘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옛날에 스님들이 오잖아요? 그러면 아버지가 쌀도 주시는 것을 제가 크면서 보고, 아마 거기서 비롯된 것 같아요.

박인규 : 종교는 다르지만 무언가 봉사하는 마음을 배우셨군요?

유루시아 수녀 : 봉사하는 마음은 부모님께 받은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제가 수녀님을 책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레지던트하실 때는 결혼하실 뻔 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유루시아 수녀 : 결혼까지는 그 때는 우리 한국 사람들도 한국 여성들이 외국 사람들과..국제결혼이 별로 없었지요. 그래서 결혼보다도 친구로서 같은 의사니까 나도 인간이고, 상대편도 인간이니까 시달린 적도 있었죠. 그러나 저의 갈 길이 너무 밝았기 때문에 제가 떠났죠. 마음이 아주 아팠습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박인규 : 지금도 만나십니까?

유루시아 수녀 : 지금은 만나지 않고, 내가 5년전에 가서 만난 적은 있습니다. 우리 교수들도 만나고, 그 분들도 만나고..같이 만났는데 아직 그 분은 혼자라고 말씀하셨어요.

박인규 : 수녀님이 되신 지, 3년만에 1968년에 케냐로 가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케냐를 가야겠다?라고 생각을 하셨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우리 회에서는 선교 할 나라를 토의합니다.

박인규 : 회 라는 것은 수녀님께서 속해 계신 메리놀 수녀회를 말씀하시는 거죠?

유루시아 수녀 : 네. 우리는 장상들과 대화를 해요. "왜 가고 싶은지" 그 때 메리놀회와 케냐정부에서 수녀의사를 보낼 수 없냐..는 편지가 왔다고 해요.

박인규 : 그냥 의사가 아니고, 수녀의사를 말인가요?

유루시아 수녀 : 네. 수녀의사를..왜냐하면 제가 갔던 곳이 뭄바사라는 곳이었는데, 뭄바사주교님이 편지를 하셨겠죠? 그래서 그 수녀님이 저에게 편지를 하기를, "케냐에 병원이 생기는데, 의사수녀가 없다고 하는데 네 이름이 내 혀 끝에 돈다."라는 편지가 왔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갔죠. 제가 간 것은 조금은 예외로 갔습니다.

박인규 : 가셔서 20년을 계셨는데, 20년 동안 계실 생각으로 가신 건가요?

유루시아 수녀 : 평생 있겠다는 생각으로 갔죠. 제가. 예전에는 한 번 나가게 되면 일생 동안 집에 못 왔대요.

박인규 : 어떻습니까? 68년이면 상당히 오래된 얘기인데, 처음 가셨을 때는 그 곳이 오지라고 들었는데, 처음에 가신 곳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전기도 없고, 물도 없고, 덥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제가 가게 됐는데, 그 이유는요?아주 정치적입니다. 그 곳에서 출마한 분이 "우리 부족들은 너무 원시적이다. 누구 하나 와서 가르치고, 질병을 고쳐주고 치료해 줘야 한다" 이렇게 크게 말을 했나 봐요. 그래서 정부가 주교님을 통해서 독일에서 돈을 받아서 지었죠.

박인규 : 처음 가신 곳의 지명이 어디죠?

유루시아 수녀 : 기낭고입니다. 그 곳에서 제가 원장으로 있었습니다.

박인규 : 원장으로 계셨습니까? 그 곳에 혹시 한국인이 계셨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한국인은 제가 15년동안 본 적이 없습니다.

박인규 : 15년동안? 한국말을 하시고 싶으셔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유루시아 수녀 : 입에서 어떤 때는 나오지만, 그런 일은 적은 일이었어요.

박인규 : 원장이라고 하시더라도, 진료는 하셨겠죠?

유루시아 수녀 : 진료는 늘 했죠. 매일 했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의 얘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케냐사람들을 볼 때, 기가 막혔죠. 그 분들이 너무 가난하고, 우리 한국의 6.25때보다 더 가난했어요. 그리고 의료상식도 없고, 그래서 가르치면서 치료를 한다는 것이 어려웠는데, 그 분들이 참 단순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20년이 빠르게 흘러 간 것 같습니다.

박인규 : 현지 의사들은 없었나요?

유루시아 수녀 : 제가 갔을 때는, 1968년이었는데 의과대학이 있었고, 1년에 14명이 해마다 졸업을 했어요. 그 것이 아마 4년 과정인데, 제가 갔을 때는 이미 1,2,3회 졸업생이 있었는데 큰 도시로 가죠. 의사들이나 자녀들이 큰 도시에서 공부하고 싶으니까요. 이 오지로는 아무도 오지 않으려 했죠.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죠. 지금도 농촌에 가라고 하면, 의사들이 우리 자식들 공부를 시켜야 할 텐데..하고 자녀들 생각을 먼저 하게 되니까..

박인규 : 한 번 가시면 평생을 있으신다고 하셨는데, 20년 후에 나오신 것은 어떻게 해서 나오시게 된 거죠?

유루시아 수녀 : 우리가 3, 5년 만에 나왔습니다. 그것들은 옛날이고 요즘은 3, 5년만에 나오죠.

박인규 : 외방선교로 가면, 3, 5년후에 나온다는 말씀이시죠?

유루시아 수녀 : 네.

박인규 : 88년도에 선교를 끝내시고 나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유루시아 수녀 : 네. 그 때는 우리가 선교를 10년하고 모원에 가서 일을 해줘야 합니다.

박인규 : 모원이면 어디입니까?

유루시아 수녀 : 뉴욕입니다. 그 모원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병원을 두고 빠져 나올 수가 없어서, 20년만에 나와서 우리 모원에 가서 일을 해 주었죠.

박인규 : 그래서 88년도에 나오신 거군요?

유루시아 수녀 : 그렇죠.

박인규 : 그래서 92년에 우리 나라에 다시 들어오셨는데, 그렇다면 거의 20~30년만인데, 그 동안 자주 들르셨는지는 모르지만 어떻습니까? 많이 달라지지 않았던 가요?

유루시아 수녀 : 많이 달라졌죠. 제가 많이 놀랐어요.

박인규 : 어떤 정도로 많이 달라졌던 가요?

유루시아 수녀 : 휴게소나 지하철, 우리 젊은 분들 화장이나 미국 사람들에게 지지 않겠죠. 젊은 사람들의 화장을 보면..

박인규 : 국내에 돌아오신 다음에, 책을 내셨습니다. '마마웨뚜 가지 마세요' 라는 제목인데 이 '마마웨뚜'가 케냐말이죠? 무슨 뜻입니까?

유루시아 수녀 : '마마웨뚜'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박인규 : 떠나시기가 상당히 가슴이 많이 아프셨겠어요?

유루시아 수녀 : 가슴이 많이 아팠는데 그래도 우리 수녀회도 생각해야 하고, 그 분들이 또 그랬어요. "수녀님 가지 말고", 내가 그랬거든요. "우리 어머니도 보고 싶고, 우리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가야겠다." 고 했더니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 자신들이 집을 지어서 양도 주고, 소도 준다고 하면서 저를 가지 말라고 했어요.

박인규 : 지금 그 당시 케냐에 계셨을 때 알고 지내시던 분들과도 연락이 되십니까?

유루시아 수녀 : 연락이 가끔 오는데, 보통 자신들의 일을 부탁합니다. 아직도 어려우니까..

박인규 : 혹시 20년 계셨으니까, 기억에 남으시는 케냐사람들이 있나요?

유루시아 수녀 :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하루는 젊은 어머니가 아기를 데리고 왔는데, 헝겊 같은 것으로 싸서 아기를 데리고 왔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 아기가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 수녀님들과 우리가 열심히 도와서 그 아기가 살아났어요. 그 후에는 저는 환자가 많이 오니까 잊어버렸죠. 제가 두 번째 선교지에 갔을 때, 기씨라는 곳에 가서 환자를 보는데, 여자 한 분과 학생 한 명이 가지도 않고, 제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않고해서 제가 사무실 문을 닫으면서, "당신은 어디가 아프십니까? 어머니?", "아닙니다. 수녀님 우리를 기억하십니까?", "나는 기억 못합니다."라고 했더니, 하시는 말이 "내가 예전에 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 아이가 죽을 것 같았는데 수녀님이 열심히 도와주셔서 이 아이가 살아나서 오늘은 이 아이를 수녀님을 위해서 정장을 시켜서 데리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저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났죠.

박인규 : 그 갓난 아이가 컸군요? 말하자면.

유루시아 수녀 : 네. 그렇죠. 대략 8년이 지나서 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 분이 제가 두 번째 선교하는 곳에..버스로 8시간은 족히 와야 할 거예요. 그 분이 어떻게 찾아왔는지..찾아왔어요.

박인규 : 굉장히 많은 환자들을 그 때 치료하셨나봐요?

유루시아 수녀 : 하루에 대략 300명 정도 왔었는데, 그런데 제가 다 보는 것은 아니고, 그 케냐정부에서 의사조수를 교육시켰어요. 그래서 그 분들 중에 7명을 제가 데리고 있었고, 그 분들이 외래에서 환자들을 보죠. 말라리아, 설사병환자들을..저에게는 그 분들이 어려워서 치료 못하는 환자들을 보내고..제가 하루에 서너명의 환자를 보고, 수술하고, 수술을 많이 했습니다.

박인규 : 모자도 있지만 수천 수만명의 케냐사람들이 루시아 수녀님에 대해서 고마움을 많이 가지고 있을 거 같습니다. 아직도.

유루시아 수녀 : 아마 그럴거예요.

박인규 : 처음에 외교를 다니신 게 50년대 초반이실 거 같은데, 지금까지 50년을 의사로 일해 오셨는데 어떻습니까? 그 당시 한국 의술과 지금의 한국 의료계와는 엄청나게 달라졌죠?

유루시아 수녀 : 비교할 수가 없죠.

박인규 : 예를 들면, 어떻게 달라진 것 같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CT, MRI 그런 것들이 제가 졸업할 때는 없었습니다.

박인규 : X-RAY 정도?

유루시아 수녀 : 네. X-RAY정도 밖에 없었죠. 그것이 많이 발달하고, 모자보건도 많이 발달하고 엄청나게 발달됐죠.

박인규 : 요즘 나가시는 병원이 요셉병원이라고 들었는데요? 주로 노숙자들도 많이 치료하셨다고 하는데 어떤 병원인지 소개해 주시죠?

유루시아 수녀 : 요셉병원은, 우리 서울 대교부 사회복지회에 속하는 병원이고, 우리 원장선생님은 선우경식선생님이예요. 그 분은 카톨릭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아직 결혼은 안 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생을 살겠다고 결심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병원에는 600명의 자원 봉사자가 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 모두 합해서 옷 주는 사람, 밥 주는 사람, 목욕시켜주는 사람, 모두 합해서 600명. 그리고 우리가 의료보험이 있는 사람은 받지 않습니다.

박인규 : 진짜 어려운 사람들만 해 주시는 거군요?

유루시아 수녀 : 네.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 그리고 소외된 여성들이 많이 오죠. 요즘은 조선족들이 많이 옵니다. 중국에서..그래서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 갈 곳이 없는 사람, 우리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해 주죠.

박인규 : 요셉병원에서 13년 가까이 진료를 하셨는데, 요셉병원의 주로 어려우신 분들을 진료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분들이 공통적으로 앓고 계시는 질병들이 있을 거 같은데요? 알코올중독이라는 말도 있던데요?

유루시아 수녀 : 알코올중독자들이 많고요. 배고픈 사람들, 영양부족이고 또 사회에서 실직 당하고, 사업 실패하고 해서 잘 안 먹고, 병에도 많이 걸리고, 우리 한국 아이들 같으면 영양실조죠. 그리고 당뇨병도 많고..자꾸 술을 드시니까..혈압도 높고 또 서로 싸우더라고요.

박인규 : 그 분들의 어떤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정신적인 그런 고통들도 많이 얘기하시나요?

유루시아 수녀 : 네. 남자들이 와서..처음에 환자가 우는데 한국 남자가 제 앞에서 우는 것은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깜짝 놀랬죠.

박인규 : 그 분이 왜 그렇다고 하셨나요?

유루시아 수녀 : 자식들도 없고, 일도 안되고, 돈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저를 어디든 넣어 주세요."라고 하시면서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런데 요즘은 제가 보니까..우리 환자들이 영양도 많이 좋아졌고, 건강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알코올 환자들이 많아지네요. 점점..

박인규 : 말씀을 듣고 보니까 요셉병원이 단순히 개인의 질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을 보듬어 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식의 병원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을텐데요? 어떻습니까?

유루시아 수녀 : 많으면 더 좋겠죠. 그런데 의사들이..글쎄, 그렇게 봉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수녀니까..내가 만약 결혼했으면 우리 자녀들 때문에 그냥은 일을 못하겠죠? 월급을 달라고 하겠죠?

박인규 : 지금 말씀하신 중에, 요셉병원의 자원봉사자가 의사와 간호사 모두 600명이라고 하시는데 어떻습니까? 젊은 의사분들도 많이 오십니까?

유루시아 수녀 : 오십니다. 여의도 성모병원에서도 오시고, 또 개인병원을 하시다가 오시는 분, 이 분들이 하루 종일 7~9시까지 오십니다.

박인규 : 저녁 때요?

유루시아 수녀 : 네. 저녁에 와서 환자들을 봐 줍니다.

박인규 : 연세도 상당히 되셨고, 예전 같으면 집안에서 자손들의 봉양을 받으실 연세이신데, 진료하시면서 힘들다거나 하는 것은 아직 느끼지 않으십니까?

유루시아 수녀 : 힘들다고는 느끼지는 않는데, 이분 들에게서 받는 것이 많습니다. 이 분들은 살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노력을 하는지, 예를 들면 알코올중독자들..술을 끊고 싶어도 안 끊어집니다. 우리 인간성의 약함..재활원에 17번을 들락날락하신 분도 계십니다.

박인규 : 알코올중독 재활원에 17번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셨다는?

유루시아 수녀 : 네. 또 한 분은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우리 병원도 잘 찾아오지 못하고 아기처럼 그렇게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사람들은 참 좋죠. 그 분들도.(웃음)

박인규 : 착하시겠죠. 50년 이상을 의사와 수녀님으로 일을 해오셨는데, 혹시 후회되는 일이라든가, 이런 일은 꼭 해보고 싶었는데 못했다라는 일이 있으신가요?

유루시아 수녀 : 후회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제가 개업을 해서 우리 가족들에게 돈을 흠뻑 주지 못한 것은 제가 아쉬워합니다. 그것 밖에 없어요.

박인규 : 가족들에게 소홀했다?

유루시아 수녀 : 소홀했다기 보다는 우리 가족들을 저의 꿈과 목적을 위해서 우리 가족들이 희생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박인규 : 우리가 4~50년 되면서 먹고 살기는 굉장히 좋아졌다고 하는데, 사실은 어려운 사람들은 더 많아 진 것 같아요? 의료혜택에 더 멀어지는 분들도 계시고 해서 혹시 마지막으로 사회에 대해서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 수 있는 조언이랄까? 그런 말씀이 있으십니까?

유루시아 수녀 : 제가 보기에는 한국이 많이 좋아졌어요. 그 분들을 도와주는 것도요. 사회복지가 점점 진보되어 나가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박인규 : 앞으로 말하자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다?

유루시아 수녀 : 네. 우리들에게 송금하시는 분들, 옷을 갖다 주시는 분들,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괜찮을 것 같아요. 우리 나라가..

박인규 : 말씀 듣고 보니까, 루시아 수녀님은 세상을 아주 낙관적이고 희망적으로 보고 사시는 것 같습니다. (웃음) 그래서 더 젊어 보이시는 것 같고요.(웃음)

유루시아 수녀 : (웃음)그래야겠죠. 우리가..

박인규 : 앞으로 더 건강하게 사시면서 좋은 일 많이 해 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유루시아 수녀 : 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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