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고 가지요."
대선 전략을 논의하고 있던 아무개 보좌관은 유력한 여당의 대선 후보인 가나다 의원에게 마치 중대결심이나 한 듯 말했다. 그 말로는 부족했던지 다소 목소리를 낮게 깔고 "냉정하게"라고 덧붙인다. 그 말에 가나다 의원은 그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민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여당 내 경쟁 상대인 마바사 의원이 어떤 식으로 나올까 계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요즈음 정부와 여당의 인기는 곤두박질치려고 해봐야 더 이상 곤두박질 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당은 정치적으로 파산 직전의 형편이다. 지난 번 대선 때 패배로 거의 정치적 생존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야당은 이제 거의 집권당이나 된 듯한 수준의 지지를 얻고 있다. 야당 대선 후보들은 누가 나와도 된다는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쪽은 그와는 전혀 반대였다. 누가 나와도 깨진다는 예측이 모두를 우울하게 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여당 내부에서는 "이제 뭐 야당 하지", 하는 식의 패배주의가 알게 모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재집권의 열망이나 국가적 비전에 대한 뜨거움은 사라지고 국회의원 자리 하나 다시 꿰차는 것이 당장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싸움을 하기도 전에 지고 있는 것이다. 여당은 오합지졸이 되고 있다. 맹장이 절실한 상황이다.
가나다 의원은 가만히 손을 꼽아 보았다. 첫째, 당내 경선에서 수로 이겨야 한다, 둘째, 돈이 필요하다, 셋째, 폭발적인 인기를 모을 건수가 있어야 한다. 그 세 가지 모두가 충족될 경우 잘만 하면 승산은 있다. 물론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면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 명함도 못 꺼낸다. 경선 불복은 영원한 정치적 멍에다. 대선자금은 천문학적이다. 혼자서 모을 수 없다. 아무리 레임 덕이라도 대통령이 지원해주면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다.
문제는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는 작업과, 당내경선/대선자금 지원망 구축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경선에서 승부를 걸자면 독자적 승리는 어렵다. 중간지대에 있는 대통령 친위조직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대선 자금의 충분한 확보도 마찬가지의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순간, 자신은 대통령과 동일시되는 후보로 낙착된다.
대통령이 인기가 높다고 한다면 그건 득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지금은 명백히 독이다. 대중들의 외면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경선에서 이기면 무엇 하나? 본선에서 깨질 텐데. 그건 애만 잔뜩 쓰고 헛수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경선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러나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적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확신으로 심으려면 그건 짧은 시간이다.
"정말 털고 갈까?" "혹 기회주의적 배신이라고 여기지는 않을까?" "대세 앞에서는 친위조직이라도 결국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점점 계산이 복잡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자신이 계산에만 너무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만의 소신의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대중들은 다름 아닌 그런 그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 그거야. 계산이 아니라 소신." 바로 그 시각, 가나다 의원과 경쟁상대인 마바사 의원도 똑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털고 갈까?"의 문제는 어느새 그 해답을 운명처럼 찾아가고 있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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