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라는 우리말은 "높은 곳"을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은 높은 산(山)을 뜻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산마루"가 산의 높은 곳을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금세 확인이 됩니다. 백두산(白頭山)도 산을 뜻하는 "뫼"가 들어 있는, 아침 태양이 밝게 떠올라 빛을 맞이하는 "흰/마루/뫼", "밝/마루/뫼"의 한자표기가 아닌가 하고 짐작되고 있습니다.
또한 "마루"는 고관대작(高官大爵)에 대한 명칭으로도 나타나 "으뜸가는 자리"를 일컫기도 해, 한자로 우두머리 종(宗), 위를 말하는 상(上), 머리를 뜻하는 수(首)로 표시된 것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두머리"도 "으뜸머리" 또는 "웃머리"의 변형이며 그 "머리"도 높다는 "마루"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증언하는 신라의 왕에 해당하는 마립간(摩立干)도 "마루/한" 내지는 "마루/칸"의 한자어 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이나 칸이 북방 아시아를 걸쳐 통용되는 군왕의 뜻인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가령 신라의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도 그 한자가 온 누리를 밝히는 존재라는 뜻인 동시에 그의 직위를 삼국사기는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했습니다.
이 "거서간"은 "갓/한"의 한자음 표시인데, 즉 "이제 막 시작된 처음을 의미하는 <갓>"과 "왕을 의미하는 <한> 아니면 <칸>"이 붙어 시조왕(始祖王)을 뜻하는 것이 됩니다. 한편, "마루"가 붙은 관직의 다른 한 예로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도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幕離支)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있습니다. 이는 "마루/치"에 해당되는 한자임을 <고가연구(古歌硏究)>의 탁월한 스승 양주동 박사가 밝혀놓고 있습니다.
"마루/치"는 철기문명의 주도자 "다루하치", 온 세상을 다스리는 군왕이라는 뜻의 "누르하치"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강력한 권세를 가진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치"는 만주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계열의 언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지도자가 그 말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마루/한" 내지는 "마루/칸" 또는 "마루/치" 이라는 우리가 만들어낸 말은 듣기에도 멋집니다. 이번 APEC 정상회담이 있었던 자리도 "누리/마루"라고 지었다는데 "온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이라는 뜻을 우리말로 담았다는 점에서 그 발상은 칭찬할 만 합니다.
그런데 산마루는 그냥 절로 산마루가 되지 않습니다. 마루/치 또한 홀로 마루치가 되지 않습니다. 높은 곳은 그 높은 곳을 받쳐주는 바닥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 바닥이 든든하지 않을 때, 마루는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바닥"은 "바탕"입니다. 따라서 바닥, 또는 바탕을 무시하는 마루는 이미 마루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농민들의 절규, 노동자들의 탄식을 외면한 채 눈부신 조명과 호화로운 잔치에 취해버리는 "누리마루"는 바닥이 무너질 모래 위에 지은 집,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됩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마루/치나 마루/칸은 바닥의 소리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역사의 바탕으로 삼아 나가는 존재일 것입니다. 마루/치는 그렇게 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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