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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머리채 잡고 모텔 끌고가야만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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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머리채 잡고 모텔 끌고가야만 성폭력?

['성폭력', 제대로 이야기하기·①] 성폭력 피해자는 왜 신고를 망설이나

만취한 권모(26) 씨가 아침에 일어난 곳은 어느 허름한 여관방이었다. 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전날 사용한 걸로 추정되는 피임도구가 떨어져 있었다. 소지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날 만취 상태로 지하철을 탄 것 말고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말을 걸었던 남성의 얼굴만 언뜻 기억났다.

급히 여관방을 나와 지나가던 경찰차를 얻어 탄 뒤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흐릿하게 기억나는 남성을 경찰에 고소했다.

가해자 부모는 어떻게 피해자 전화 번호를 알아냈을까

어느 날 새벽 3시께, 경찰에게 휴대전화로 전화가 왔다. 술을 먹고 난동 피는 남성을 체포했는데 이 남성에게서 권 씨의 신분증이 나왔다는 것. 권 씨는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에 연행된 남성은 만취한 상태에서 봤던 남성이었다.

권 씨는 성폭행범으로 신고해놓은 남성이라고 설명했지만 경찰은 되레 권 씨에게 "그러게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먹고 다니느냐"고 훈계했다. 한 경찰은 "다 옛날 일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경찰의 심드렁한 태도에 권 씨가 몇 번이나 항의를 하고 난 뒤에야 경찰은 신분확인을 한 뒤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몇 주가 지나서야 그 남성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권 씨에게 알려왔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몇 주 뒤 가해 남성의 어머니가 권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부탁했다. 권 씨는 당황했다. 가해자 가족이 자신의 개인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이없었다. 권 씨가 자신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지자 가해 남성의 어머니는 "아들이 죄를 인정했는데 한 번만 봐달라고 경찰에 부탁했더니 경찰이 당신의 번호를 알려줬다"고 답했다.

결국, 권 씨는 더이상 수사를 촉구하지 않았다. 고소장도 취하했다. 나중에 가해자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성폭력 당한 여성 8명 중 1명만 경찰서 가는 까닭

피해자의 신원 보호 문제는 피해자 자신에겐 성범죄 해결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지만 수사기관은 이를 경시하는 경우가 많다. 권 씨의 사례가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까운 예로 지난 2008년 12월 민주노총 남성 간부 김모 씨가 전교조 여성 조합원을 성폭행하려고 시도했던 사건에서도 이 문제가 그대로 드러났다. 취재를 하려는 기자들이 피해 여성 집으로 몰려간 것이다.

기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피해 여성의 신원 정보를 알고 있는 법조기관에서 기자에게 정보를 줬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10월에는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법원과 판사를 처벌해달라는 진정서를 서울서부지검에 제출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정보 유출은 이처럼 손쉽게 이뤄진다. 자신의 신상 공개를 각오해야 법적 해결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상황에서 피해 여성은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여자가 부주의해서 성범죄를 당했다는 비난과 자신의 몸이 더럽혀진 듯한 수치심까지 더해지면 피해자임에도 사건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어지는 가해자의 2차 폭력에 저항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2008년에서 2009년까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58명의 피해접수사례를 분석한 통계에 의하면 '성폭력 2차 피해 유형'으로 72명이 '피해자 비난과 화간 의심'을 꼽아 1위를 기록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은 '부주의하게 행동하고 다녔다'거나 '남자에게 여지를 줬다'는 등의 비난에 시달린다.

이 때문에 많은 피해 여성들은 성폭행 신고를 망설인다. 2008년 여성가족부 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10만 명당 성폭력 피해율은 467.7명인데 이는 공식 통계의 8배에 달하는 수치다. 성폭력 피해 여성 8명 중 1명만이 신고를 하는 셈이다.

게다가 어렵게 신고를 한다 하더라도 기소율이 낮아 피해 여성들은 경찰에서 처음 좌절하고 법원에서 두 번째로 좌절하게 된다. 2011년 대검찰청이 발표한 성폭력 사범처리 현황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기소율은 47.5%에 불과하다.

성폭력 책임도 피해자에게

결국,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피해자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지난 10일 발생한 충남 서산 피자집 아르바이트생 자살 사건도 마찬가지다. 1차 성폭행이 피해 여성을 협박하는 빌미가 돼 수차례 성폭행으로 이어졌다. 결국, 여대생 이모(23) 씨는 아르바이트 가게 사장 안모(37) 씨의 성폭력과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차에 연탄불을 피우고 자살했다.

하지만 피해 여성의 자살을 두고도 말들이 많다. 피해 여성은 유서를 통해 "아르바이트하는 피자가게 사장으로부터 협박을 당했다. 협박이 무서워 내키지 않았지만 함께 모텔에 가서 관계를 갖게 됐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피해 여성이 모텔을 따라간 것도 문제가 있다는 식의 '피해 여성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 모 대학 익명 게시판에서는 유서 내용을 두고 갑론을박도 벌어졌다. 한 학생이 '여대생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애초에 모텔에 간 것이 부주의했던 것 같아 안타깝다'는 글을 쓰자 피해 여성을 비난하는 후진적인 발상을 버려야 한다는 비난 댓글과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말을 비난하지 말라는 댓글이 대립했다.

남성이 여성 머리채 잡고 모텔 끌고가야만 성폭력?

성폭력 전문가는 성폭행을 바라보는 잘못된 사회 시각이 피해 여성에게 2차, 3차 폭력을 가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한국사회는 이런 왜곡된 시각을 가지게 된 걸까.

이미경 이화여대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가 올해 발표한 논문 '성폭력 2차 피해를 통해 본 피해자 권리'를 보면 한국 사회에 성폭력 2차 피해가 만연한 이유 중 하나로 '정조에 관한 죄의 망령'이 꼽힌다.

이미경 이사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에서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하던 법이 사라진 지 16년이 지났지만 정조를 여성의 의무로 강요하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정조를 지키려 필사의 힘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당한 여성'과 '당할만한 여성'으로 피해자를 이분한다. 제3자가 보기에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다면 그 피해 여성은 '성폭력을 유발한' 존재로 낙인돼 졸지에 피해자면서 동시에 범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의 역할도 요구받는다.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소장은 피해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 시각을 비판했다. 이 소장은 서산 사건의 피해자 관련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까지 할 정도의 사람이 오죽하면 모텔에 갔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소장은 "가해 남성이 '오라'고 말만 해도 피해 여성이 자기도 모르게 공포심에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했다.

흔히 남성이 물리적인 힘으로 여성을 제압해서 끌고 가지 않는 이상 여성이 충분히 저항할 기회 또는 자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 범죄에서는 말만으로도 여성이 완전히 제압되기 때문에 굳이 물리적 폭력까지 행사할 필요도 없는 경우가 많다고 이 소장은 강조했다.

게다가 서산 사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고용주-고용인 관계다. 이런 경우 이미 권력관계가 확립돼 있어 가해 남성이 조금만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도 피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엄청나게 위축돼 공황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 소장은 성폭력을 당한 과정을 곱씹으며 죄책감을 느끼는 여성들을 자주 봐왔다고 했다. 이 소장은 "여관 주인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청했는데 외면당한 경우가 있었다. 그 순간 피해 여성은 '저 사람도 나를 돕지 못 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저항을 포기했지만 후에 자신을 탓하며 몹시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남자가 물리적인 힘으로 여자를 제압해 머리채를 잡고 모텔로 끌고 가야 성폭력이라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일 오전 충남 서산YMCA와 서산·태안 환경운동연합, 서산 풀뿌리 시민연대 등 4개 시민사회단체가 최근 서산지역에서 피자집 아르바이트 대학생 성폭행 사건과 관련, 경찰의 엄정한 수사와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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