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녀들/당신이 죽여버린 여자들/당신이 저버린 여자들~
맨발을 움찔거리며/허공에서 춤추었네/너무너무 억울했네~
당신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여신도 여왕도 암캐도 안 가리고/원없이 욕정을 채웠으면서~
당신에 비하면 우리 잘못은/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당신은 참 모질게도 심판하셨지~
당신은 창을/당신은 칼을/마음껏 휘둘렀고~
우리는 죽어버린/연인들의 피를 닦아야 했네/방바닥에서, 의자에서~
계단에서,문짝에서/흥건한 물 속에 무릎을 꿇고/당신이 우리 맨발을~
지켜보는 앞에서/너무너무 억울했네/당신은 우리의 공포를 핥으며~
즐거워하고/손을 들어올리며/떨어져내리는 우리를 구경하셨지~
우리는 허공에서 춤추었네/당신이 저버린 여자들/당신이 죽여버린 여자들~
"내가 누군지 아시오?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요. 오디세우스 그 작자가 트로이 전쟁에 나간 뒤 난 참 청승맞게 살았소. 말썽꾸러기 아들을 홀로 키워 온 이십 년 동안 수많은 남자들의 구혼을 거절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소.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고작 한 일이 뭔지 아시오? 내게 청혼한 남자들과 열두 명의 시녀를 무참하게 죽인거요! 내가 이 한을 어찌 잊을꼬…."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후보로 거론되는 캐나다의 능청스러운 이야기꾼, 마거릿 애트우드가 서양문학의 영원한 스테디셀러 오디세이아를 다시 썼다. 그의 아내와 시녀들의 관점으로 그린 <페넬로피아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를 넘기다 보면 페넬로페의 이러한 독백이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지칠 줄 모르는 역마살과 여성편력, 영웅 콤플렉스 등 아내의 관점에서 본 오디세우스의 숨겨진 이야기가 동요, 연극, 비디오 테잎으로 녹화한 재판 장면 등으로 통쾌하게 까발려지는 통에 영웅의 스타일은 한없이 구겨지지만 독자들은 거장이 다시 쓴 21세기 신화에 더없이 즐겁다.
***전세계 문학 거장들이 다시 쓴 '21세기의 신화'**
이는 세계 각국의 대표적 작가들이 각지의 신화를 현대적 시각으로 다시 써보자는 야심찬 출판 프로젝트 '세계신화총서'의 결과물이다.
20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의 기자회견을 신호탄으로 전세계 31개국에서 동시 출간된 '세계신화총서(문학동네)'는 1999년 스코틀랜드 케넌게이트 출판사의 수석편집자이자 발행인인 제이미 빙이 기획했다. 우선 팡파레를 울린 3권을 시작으로 2038년까지 모두 100권을 만드는 거대 프로젝트다.
출판사는 그리스, 이슬람, 남미, 아프리카, 힌두, 켈트 신화 등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을 채택해 작가들을 섭외하고 200쪽 가량의 원고량만 정해줄 뿐, 내용이나 형식은 전적으로 작가에게 맡긴다.
카렌 암스트롱(영국), 마거릿 애트우드(캐나다), 재닛 윈터슨(영국), 빅토르 펠레빈(러시아), 데이비드 그로스만(이스라엘), 치누아 아체베(나이지리아), 도나 타트(미국), 밀튼 하툼(브라질), 이언 매큐언(영국), 키리노 나츠오(일본), 수 통(중국) 등의 필진이 확정됐으며, 올해 노벨문학상 후보 오르한 파묵(터키)과 이사벨 아옌데(칠레), 주제 사라마구(포르투갈), 토미 모리슨(미국) 등의 쟁쟁한 작가와도 계약이 진행중이다.
이번에 출간된 <신화의 역사>(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감수), <페넬로피아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마거릿 애트우드 지금, 김진준 옮김), <무게, 아틀라스와 헤라클레스>(재닛 윈터슨 지금, 송경아 옮김)은 이 시리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신화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종교 연구가인 카렌 암스트롱이 첫 문을 열어제친 <신화의 역사>는 1만2000년의 인류 역사 동안 신화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리고 왜 지금 우리에게 신화가 필요한지 간결하게 설명한다.
"신화란 본질적으로 안내자이며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곤경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에게 세상 속 저마다의 위치와 진정한 방향을 찾아준다. 그리하여 신화란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유효하기 때문에 진실인 것이다. 우리에게 삶의 한결 깊은 의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주지 않는 신화는 실패작이다."
사냥하고 도구를 발명했던 구석기 시대 수렵민에게 필멸과 생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했던 신화가 종교의 시대와 영토 확장과 산업 발전을 미친듯이 좇아온 서구 문명을 거치며 인간과 어떻게 멀어졌는지를 통찰한 저자가 신화가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 극복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지적한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21세기의 버지니아 울프로 칭송받는 재닛 윈터슨은 고대 그리스의 두 영웅 아틀라스와 헤라클레스를 다시 불러냈다. 올림포스 산의 신들에게 반항했다가 영원히 지구를 떠받들어야 하는 벌을 받은 아틀라스, 그에게 접근해 자신이 잠시 세계의 무게를 떠맡을 테니 헤스페리데스 정원의 황금 사과를 따오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헤라클레스.
저자는 이 두 영웅을 통해 누구도 짊어질 수 없는 무게를 견디면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침묵하는 자의 숙명과 선택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 구속과 자유 등에 관한 철학적이며 시적인 사유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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