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림(那林) 이병주의 소설은 우리의 근현대사가 헤쳐온 격동의 폭풍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작가로서는 다소 늦게 40대 중반에 문단에 등장한 그가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우리 앞에 내놓았던 1960년대에 독자들은 한국의 빅토르 위고나 발작, 또는 알렉산더 뒤마를 닮은 면모를 그에게서 발견했습니다. 그 자신도 그리 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가 실제로 그런 대문호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와 인간의 그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엮어나간 솜씨는 당대의 절창에 속할 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진화과정도 변화무쌍해서 결말이 어찌 될 것인지 짐작하기가 사뭇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병주의, 그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의 그물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경지에 있었습니다.
이병주의 <지리산>이 1970년대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서사적 놀라움이었습니다. 냉전의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어려웠지만, 소설 <지리산>의 인물들은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해방투쟁의 여러 곡절 속에서 뒤엉켜갔던 사연들을 이 땅에 절절하게 뿌렸던 이들이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사회적 전기(傳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글 속에서 우리는 어떤 고비고비를 넘어왔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그가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에서 유학하고 다채로운 어학실력으로 동서고전을 섭렵하면서 쌓은 문명적 집대성의 능력은 훗날 이 땅의 역사를 문학화하는 데 뛰어난 기본적 내공이 됩니다. 하준규, 박태영 등의 인물을 통해 빨치산 투쟁사과 지리산 영남자락의 인간사를 그린 <지리산>에 이어 해방공간의 분열과 제1공화국의 일그러진 역사를 담아낸 작품 <산하>는 급변하는 세월의 흐름을 타고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서로 갈 길이 달라지긴 했어도 혁명기의 시인 김수영,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의 대명사가 된 리영희 선생 등과도 인간적 교분을 나누었던 이병주는 젊은 시절 일종의 혁신계 지식인으로서 문명을 날렸습니다. 그러던 중 노동관계 논설로 필화사건이 일어나 군사정권에 의해 2년 여간 투옥되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다소의 안전한 변신을 통해 유랑자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기질적으로 타고난 자유주의자였으나 먹물이 들어간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진보적 이상은 소멸되지 않은 채 이런저런 모습으로 그의 작품 속에 녹아나게 됩니다. 일각에서는 <지리산>이 빨치산을 앞세운 교묘한 반공 교과서라느니, 그의 삶이 퇴폐적인 허욕에 차 있다느니 하는 지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이병주가 보여준 소설적 능변의 탁월함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권력이나 역사의 모순에 대해 격렬하게 투쟁했던 유형의 지사적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묘사한 역사의 현실들은 당대의 가려진 이면의 진실에 대한 폭로이기도 했습니다. 하여 당대의 권력과 법이 그의 작품을 문제 삼아 걸고자 들면 걸리지 않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병주의 묘한 처신이 그런 족쇄에 걸리지 않도록 해주기도 했지만, 문사(文士)의 호방함을 나름대로 인정한 권력의 자세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이병주가 자신의 회고담처럼 생생하게 다루었던 이념과 격동의 세월이 지난 지 벌써 반세기인데, 우리의 <산하>는 아직도 제1공화국 성립 전야(前夜)의 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사상의 자유를 대하는 검찰 권력과 이 땅의 보수 정치세력의 형편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가 제대로 진화하기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고개가 더 있나 싶기만 합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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