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거침없이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절감하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조급한 마음을 가지게 되곤 합니다. 물살이 빠른 강 한 복판에서 저편 언덕으로 속히 건너가지 않으면,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치 길 모퉁이에 숨은 그림처럼 매복해 있다가 우리가 골목을 도는 순간 기습해오는 격입니다.
자신을 겨냥한 시간의 맹렬한 추격이라는 이 은밀한 적의 정체를 언제나 긴장하는 가운데 대비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우리는 단단히 조여 매었다고 믿고 있던 허리춤의 각종 무기들을 자기도 모르게 풀고 무방비한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 추격장치가 점차 가속도가 붙은 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초조해지게 됩니다.
그건 사방에서 점점 크게 들려오는 수색대의 발자국 소리에 은신처를 찾지 못하고 노출을 피할 수 없는 산꼭대기로 자꾸만 내몰리고 있는 도망자의 절박감이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보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막의 유랑자가 겪을 법한 영혼의 외로운 나침반을 닮아있기도 합니다. 인생이란 본래 목표는 단순한데 그리로 가는 경로는 너무나도 복잡한 절차와 예기치 않은 시달림의 연속이 불가피한 여정(旅程)인가 봅니다.
실로 혼자 등짐 하나 지고 소요 거리와 시간도 알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이나, 온갖 수발을 다 들어줄 시종(侍從)들을 대동하고 장관을 이루며 행렬의 선두를 차지하고 가는 이나 모두 가릴 것 없이 시간 앞에서는 결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패배와 후회의 뜻을 아직 모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겁니다.
한 때의 젊음도, 그리고 살아 있기만 하다면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반드시 오고야 말 늙음도 전부 시간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통과해온 격전(激戰)의 자취이기도 합니다. 그 싸움에서 겸손을 배운 자는 자신을 진정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그는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할 과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며, 인생을 진실로 사랑하는 법에 대한 깨우침을 가장 존귀한 영혼의 목표로 삼을 것입니다.
방금 인생의 무대에 등장한 것 같은데 몇 마디 의미 있는 대사도 채 마치기 전에 퇴장의 시각이 어느새 와버린 듯 한 우울함을 그 누구도 바라지 않습니다. 조명은 분명 켜져 있으나 배경으로 설치된 벽 속의 형체 없는 소리로만 연기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연극이 끝난 후 객석과 마주 했을 때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못하는 무명의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은 또한 없을 것입니다.
결국, 시간의 추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한 조명 아래 무대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고 진정으로 드러내는 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꿈에 온전히 몰두하여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취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이 깨어나면 현실이 날카롭게 우리를 압박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환각일지라도, 우리는 그로써 상상력 풍부한 생기와 때 묻지 않은 의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꿈보다 시간의 속도를 먼저 의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기 인생이 시들어가는 회한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위력을 이길 수는 없겠지만, 시간의 축복을 우리의 존재와 이 세계에 새겨나갈 있는 길은 무엇일까 성찰해보는 기쁨이 자라나는 계절이었으면 합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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