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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세안과의 FTA를 추진하라"

미래전략연구원 '지구촌, 분석과 전망' <29> 동아시아 경제협력의 수순

***세계화와 한국경제**

오늘날 한국경제는 그간의 개발전략 추진과정에서 도외시되었던 질적 측면이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발목 잡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특히 산업간, 기업간 생산 네트워크가 단절되고, 이는 고용 및 소득의 양극화, 부의 양극화로 귀결되는 '양극화(bi-polarization)'현상이 한국의 경제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간의 성장과정에서 좁은 내수시장을 탈피해 수출시장 확보에 주력해야 했던 우리에게 세계분업구조로의 편입은 불가피한 선택지였다. 이러한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은 첨단원천기술의 대일의존 심화를 낳았고, 90년대 이후 세계의 공장 중국의 급부상은 겹쳐 국내산업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더욱이 외환위기 이후 단기수익 극대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앵글로색슨형 경제금융 시스템의 급격한 도입, 이러한 환경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정책실기 등이 더해져 양극화 현상은 더욱 골이 깊어져 갔다.

한편, 양극화의 극복방안을 둘러싸고는 성장확대로 자동조절할 수 있다는 시각과, 이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대대적인 정책전환이 필요하다는 상반된 시각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양극화의 근본원인이 세계화에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세계화의 결과 우리는 국제금리, 유가, 환율 등의 국제거시경제지표의 등락에 일희일비해야 하고, 금융세계화에 따른 국제금융시장의 변동성 증대와 초국적 투기자본의 시장교란에도 무방비 상태가 되었으며, 중국의 급부상과 그로 인한 동북아 분업구조의 변화 전망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한국산업의 미래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는 국내경제 운용을 좌우하는 주요 외생변수가 이미 내생화되어 버린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으나, 국내대책만으로 세계화의 부작용을 치유한다는 것은 한계가 자명하다. 그렇다고 이를 적절히 조절할 글로벌 거버넌스도 존재하지 않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 나아가 국제연합이 강대국 앞에서 보여준 무기력함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물론 국내대책에 주력하되, 이와 병행해 역내국간 협력을 통해 한국경제의 당면과제인 세계화에 대처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동북아인가? 동아시아인가?**

그렇다면 경제협력의 주 공간은 어디인가? 이에 대해서는 동북아라는 시각과 동아시아라는 두 가지의 견해가 존재하나 필자는 양 공간이 상호 배타적·대체적 관계이기보다는 경제협력의 특성에 따라 보완적·중층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즉 우리를 둘러싼 외교안보현안을 해소하기 위한 경제협력의 주무대는 동북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북아의 안보지형을 고려하고, 외환위기를 계기로 진전되고 있는 동아시아 경제협력의 추진 현황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를 상정한다면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포함된 동아시아를 경제협력의 주요 공간이 된다. 따라서 양 공간을 적절히 선택하고 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하에서는 동북아의 두 가지 특성을 지적하고, 구체적인 경제협력과제를 제시할 때는 양 지역을 구분해 논하기로 한다.

첫째, 동북아는 세계경제를 견인할 무한한 잠재력을 보유한 지역이다. 동아시아 지역을 주요 협력공간으로 삼더라도 이를 견인할 주도력은 동북아에 있다.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자 세계의 첨단기술 공급거점이다. 1980년대 이후 연평균 10%의 고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중국은 위협요인인 동시에 기회요인으로서 바로 그 중국도 동북아에 속해있다. 러시아 또한 세계적인 에너지, 산림자원 등의 풍부한 부존자원과 수준 높은 과학기술을 보유한 BRICs(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중 한 나라다. 한국도 고른 제조업 기반기술과 IT 경쟁력 등을 바탕으로 건실한 펀더멘탈을 유지하고 있다. 냉전체제 해체후 동북아의 경제협력 범위가 비약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이들이 협력한다면 동북아는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유럽연합(EU)과 더불어 세계경제를 견인할 3대 성장축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점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동북아 주요경제(한·중·일·홍콩·대만)의 199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세계평균(2.3%)의 두 배가 넘는 5.0%를 기록하였고 1997년 이후 세계경제에 점하는 비중은 20.0%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미래설계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남북경제통합의 또 다른 한 축인 북한이 속해있는 곳도 다름 아닌 동북아다. 이는 동아시아보다 동북아라는 공간이 안고 있는 안보지형상의 특수성이 우리의 경제협력의 설계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임을 뜻한다. 동북아에는 한국경제의 미래성장동력 확보 및 한반도의 지속발전에 필수불가결한 남북경제통합에 대해 밀접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 국가들이 속해있다. 즉, 남북경제통합의 일대 분수령이 될 수 있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참가국이 모두 여기에 속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미국 또한 지리적으로는 역외국이나 관계적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동북아의 이해관계자이므로 동북아 경제협력 설계시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내포한다. 그러나 동북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에게만 절실할 뿐인 남북경제통합에 주변국의 힘을 빌리겠다는 발상이 아니라는 점을 대내외적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핵문제 해결 등 북한변수의 안정적 관리와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북한으로 인해 단절되어 있는 동북아의 협력공간 복원과 동북아의 영구적 평화조성, 그리고 공동번영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동북아가 갖는 현안의 중요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동아시아에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왜 경제협력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북아에는 아직 무한한 잠재력의 발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적잖게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정치 및 외교안보 분야에서 끊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이 상존하고 있다. 점차 노골화되어가는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에 주변국은 폐쇄적 민족주의로 맞서고 있다. 북핵문제가 지난 9월 6자회담의 극적 타결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나 참여국간의 첨예한 이해대립을 감안할 때 아직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질서 구축으로의 노정은 험난해 보인다. 중국과 대만간의 양안갈등, 여전히 미수교관계의 북일관계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동북아는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근대사의 상처에, 미·중, 중·일간 패권경쟁마저 더해져 대립과 반목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북아 각국간 외교안보적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막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나라간에 우선적으로 이해관계 대립이 상대적으로 약한 경제분야의 협력에서 출발해 이를 점차 여타 분야로 확대시키는 신기능주의적 접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외교안보면에서의 협력에 비해 경제협력은 상대적으로 역내국간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기 용이하다는 특성을 갖는다. 때로는 경쟁관계에 놓여있는 기업이나 국가도 자신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전략적 제휴나 국제협력을 추진한다. 일국의 경쟁력 강화라는 목적함수에는 경쟁 뿐 아니라 협력도 종속변수로 존재하는 것이다. 동북아의 경제협력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동북아의 공공재를 구축하고 네트워크를 강화하여 그 결실을 각국의 내부역량 강화를 위해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유럽통합의 경험은 이러한 신기능주의적 통합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럽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상대적으로 추진이 용이한 경제협력을 통해 상호의존도가 높아지면 경제에 대한 '안보 외부효과(security externalities)'가 발생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외교안보적 안정성 증대에 기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유럽통합의 출발점은 군수물자인 석탄ㆍ철강의 공동관리를 목표로 하는 1952년의 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로서, 외교안보분야의 협력이 제도화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창설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75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전쟁의 승전국 프랑스와 패전국 독일이 더 이상의 전쟁재발을 막기 위해 시작한 것은 CSCE가 아니라 ECSC 창설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역내외 주요 이해관계자의 외교안보적 이해 뿐 아니라 경제적 이해도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ECSC의 창설은 유럽의 평화구축과 동시에 참여국들의 산업발전에도 기여하게 되었으며 장차 CSCE의 창설도 가능한 여건조성에 기여했고 오늘날의 유럽연합을 가능케 하였다.

***동북아 경제협력의 비전과 과제**

그렇다면 동북아 경제협력의 궁극적 비전은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와 번영,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동북아 경제공동체(1단계로는 경제협력체) 구현이라는 협력의 제도화라 할 수 있다. 즉, 첫째, 역내의 외교안보적 안정성 제고에 기여하며, 둘째, 역내국간의 정책공조를 통해 글로벌화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동북아적 거버넌스를 구축하되, 셋째, 경제협력과 통합의 이익 배분시 승자독점이 아닌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위 세 가지는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상호간에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선순환 구조를 창출할 경우 동북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현실로 바뀌어 진정한 경제공동체가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서는 이상의 목표 실현을 위한 과제를 간략히 언급해 보기로 하자.

첫째, 외교안보적 안정성 제고에 기여하는 경제협력의 추진이다. 이는 주로 동북아를 중심으로 역내외국간의 갈등과 대립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경제협력을 설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핵문제 해결과정에서 북한과 여타 관계국과의 경제협력을 적극 추진해 6자회담 참가국간의 경제적 상호의존도를 높인다면 이는 북한에게 항구적인 평화구축에의 유인을 제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경협사업으로는 남북·대륙철도망 연결, 에너지 협력, 기반 네트워크 구축을 골자로 하는 IT·과학기술 협력, 역내 대다수 농업국의 경쟁력 제고를 농업협력 등 동북아 사회간접자본 네트워크 구축 등을 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각 부문별 협력의 제도화를 이끌어 내되, 내용적으로 남북경협과 동북아경협을 연계시켜 북한이 동북아 경제협력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인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남북통합과 동북아통합의 연결고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동북아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기반마련이 될 것이다.

둘째, 글로벌화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동북아의 거버넌스 구축에 기여하는 경제협력을 추진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역내 자유무역지대(FTA) 체결,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의 진전, 아시아채권기금(ABF) 설립을 중심축으로 하는 동아시아 금융통화협력의 제도화, 아시아 프리미엄 제거를 위한 에너지 구매·비축협력 및 친환경에너지 개발 협력, IT·과학기술 관련 동북아의 실제적 표준(de facto standard) 마련, 역내의 공정한 거래질서 구축과 각종의 배타적 비관세장벽 해소를 위한 무역규범 및 경쟁정책 협력 등이 이러한 성격의 경협사업이라 할 수 있다. 단, 동북아의 중·일간 갈등구도와 극심한 소득격차 등의 제약조건을 감안할 때 당분간 FTA 체결과 금융통화협력의 주무대는 동아시아로 상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동아시아 주요국은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역내차원의 협력과 정책공조 없이 자국의 경제정책을 운용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후 급진전되고 있는 역내국의 FTA 체결은 최종적으로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실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동아시아 FTA 논의의 장에 북한이나 러시아, 몽골 등을 초청해 그들의 체제전환을 돕고 장기적으로는 그들도 통합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동아시아 FTA 체결의 목표는 역내국간 공동번영과 통합을 추구하는 경제공동체 형성이다. 지금과 같이 FTA를 다분히 자국의 내적 역량 강화를 위한 대외여건 조성 수단으로 인식하는 한 FTA 체결 자체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실현되더라도 그것은 일국 차원의 양극화를 지역차원에서 확대 재생산하거나, 세계화의 폐해를 지역차원에서 고스란히 축소 재현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EU의 15개 회원국 중 최빈국의 1인당 GDP는 최부국의 약 70%를 차지하는 반면, 동아시아의 경우 그 비중은 1.4%에 불과하다. 현재 동북아의 막대한 외환보유고 및 저축이 역내에서 마땅한 운용처를 찾지 못해 역외로 환류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이러한 자금을 '동북아개발은행'이나 '동북아투자회사' 등을 설립해 낙후지역 개발에 활용한다면 이는 역내의 개발수요를 역외로 유출되던 과잉자본의 역내순환으로 충당하는 것이 되며 이는 투자국의 금융산업 발전에도 기여하게 된다. 또한, 동아시아 FTA 체결에 따른 산업구조조정 및 사회통합 촉진을 위해 산업기술협력 및 역내 공동기금을 마련하고, EU의 「구조기금(Structural Fund)」을 원용한 가칭 「동아시아구조기금」조성도 고려해 본다면, 역내 약소국은 동북아의 경제통합에 적극 참여할 유인을 갖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FTA 실현을 위한 추진전략과 추진동력 확보와 관련해 전략적 동반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유럽의 사례에서 보듯이 역내 경제협력과 경제공동체의 성공여부는 역내 강대국의 역할이 좌우하나, 동북아의 강대국은 그런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대승적인 태도변화가 없는 한 한·일 FTA를 역내 FTA의 교두보로 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한일 FTA가 국내 제조업계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중 FTA도 국내 농수산업계의 반발에 부딪혀 상당한 조정비용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한미 FTA는 역외국이자 세계최강국과의 FTA인 만큼 그것이 역내 FTA에 미칠 파장과 협력 파트너로서의 미국의 적절성 여부에 대한 매우 신중한 판단이 요청된다(사실상 NAFTA의 FTAA로의 심화·확대 추세 속에서 NAFTA의 중핵을 이루는 미국과의 FTA 체결이 우리경제에 어느 만큼 기여할지, 역내 FTA가 별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미 FTA 체결에 얼마나 관심을 보일지는 미지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간 등한시해 온 ASEAN을 역내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전략적 동반자로 상정해 볼 것을 제안한다. 유럽통합시 베네룩스 3국이 수행했던 것처럼 한국이 ASEAN과 중소국(middle-power)간 연대를 구사해 중국과 일본에 공동대응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ASEAN도 한국과의 협력을 통한 강대국 견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으므로, 한-ASEAN FTA 협상논의가 진전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이를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의 교두보로 삼는 것은 매우 전략적인 대응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올 12월 태동하는 '동아시아정상회의'라는 장(場)에서 양측이 협력해 지금의 역내국간 FTA 체결경쟁을 지양하고, EAVG(동아시아비전그룹), EASG(동아시아스터디그룹) 등에서 천명한 동아시아경제통합에 대한 비전과 추진방향을 재확인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 협력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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