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수메르의 <길가메쉬 신화>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매우 원초적인 깨우침이 기록된 구전(口傳) 문학의 일종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5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 근방에 세워진 수메르 문명의 건설과정에서 어떤 인간적 쟁투와 고뇌, 그리고 역정이 있었는가를 이 신화는 우리에게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의 기원을 이룬 고대 중근동 지역의 설화와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지는 이 이야기는, 수메르 점토판에 남겨진 고고학적 흔적을 통해 오늘날에도 그 역동적인 문학성과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순례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 결말이 일깨우는 바는, 제 아무리 위대한 영웅적 존재라고 할지라도 죽음은 끝내 찾아오는 법이며 '주어진 현존(現存)의 시간'이 갖는 소중함을 놓치지 말고, 영원 앞에서 겸허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경우, 이 권력자의 신화를 노예의 집단적 고백으로 전환시킨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말이지요.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 길가메쉬는 그 용기와 힘, 그리고 지혜를 당할 자가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가 직면했던 여러 전투들과 괴물과의 싸움 등은 고대 수메르 문명의 건설과정에서 수메르 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승리, 그리고 전우애와 사랑 등이 압축되어 표현된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말하자면 수메르 인들은 실존했거나 또는 상상의 인물인 길가메쉬에게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냈던 것입니다.
여신 이쉬타르의 사랑마저 거부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던 길가메쉬는, 본래 그를 멸망시키기 위해 신이 보냈으나 결국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자신도 피할 수 없이 마침내 봉착할 운명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는, 이쉬타르 여신을 숭배하는, 한때 그가 대단하다고 여겼던 주변 국가들에 비해 이제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문명의 수준에 도달한 수메르의 영광에 찬 현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문명의 능력으로도 돌파할 수 없는 인간 운명의 절대적 한계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대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고 알려진, 그래서 마치 성서의 노아를 연상하게 하는 우트나피스팀을 찾아나서는 길가메쉬는 그로부터 영생의 길을 배우고자 합니다. 모든 전쟁의 승리와, 모든 성취의 완결 그리고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얻어 하늘의 신들과 대적하는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어느 날엔가는 자신이 이승에다 놓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허망하다고 여긴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스팀에게 6일 7야를 잠들지 않고 있을 수 있다면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오랜 여정과 전투, 그리고 시련에 지쳤던 그는 쏟아지는 잠을 어쩌지 못하고 6일 7야를 단숨에 잠들고 맙니다. 길가메쉬는 자신의 몸 안에 이미 잠과 같은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를 통해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우트나피스팀은 불로초(不老草)를 알게 하지만, 돌아가던 길에 맑은 연못에 몸을 씻고 있는 동안 아뿔싸 그 풀은 뱀이 먹고 사라지고 맙니다. 에덴동산의 뱀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수메르 문명은 이미 사막의 바람처럼 아득한 그 옛날 사라졌지만, 그 문명의 기운은 그 뒤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 아랍과 그리스 로마만이 아니라 동으로는 아시아로 건너와 그 정신적 유산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것은 영원하지 못할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오만과 과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가장 찬란한 문명의 정점에 우뚝 서 있던 영웅 길가메쉬의 이 수도자 같은 고백 앞에서 겸손해지는 지도자들이 있는 나라는 마음과 생각이 더욱 깊어지는 곳이 되어갈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6일 7야의 잠은 길가메쉬에게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영원을 잠시 경험하는 평화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면 아마도 그는 현존의 시간 속에서 더욱 행복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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