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이집트의 국왕 이스마일 파샤는 수에즈 운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한 오페라 공연을 작곡가 베르디에게 부탁합니다. 1871년 카이로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베르디의 작품 <아이다>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고대 이집트 제국의 장수 라마데스와 이집트가 점령한 이디오피아의 공주 아이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고뇌, 그리고 죽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들 두 남녀의 사랑이 애절해지는 까닭은 하나는 정복자요, 다른 하나는 피정복민이라는 점에 있었고 이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양편의 국가권력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어찌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양쪽 집안이 서로 반목하고 대결하는 가운데 그 자식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버린 비극적 사연을 닮아 있기도 합니다. 풀 길 없는 증오의 경계선을 넘는 이들의 사랑에 대한 치열한 자기헌신이 동일한 주제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국가적 제전에 베르디가 어찌해서 이러한 소재를 가지고 오페라를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무장 라마데스가 궁내에서 벌어지는 왕에 대한 음모를 막아내고 정복전쟁보다는 사랑에 목숨을 걸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수에즈 운하를 통해서 오스만 터어키 제국 이후 아랍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싶었던 국왕 이스마일 파샤의 마음에 들어맞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파라오의 딸 암네리스가 사랑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매우 현명한 여자로 그려져 이집트 제국의 영광을 빛낼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작품 <아이다>는 세상에 선전하고 싶은 이집트 왕조의 이미지에 일치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집트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제국의 품위 등으로 베르디의 작품이 표현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었지 않나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다>는 보다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메시지도 발견됩니다. 즉, 이집트 제국의 영광보다는 이들에 의해 침략당한 이디오피아의 민중들이 노예로 끌려와 살다가, 절망과 좌절로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대목이 눈에 띄는 것입니다. 거대한 제국은 이들의 삶을 하찮은 것으로 멸살하고 말지만, 이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자신들이 떠나온 나라의 재기와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칠 열정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디오피아 공주 아이다는 이러한 민중들의 꿈과 열망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라마데스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녀를 붙잡고 있는 것은 이들에 대한 또 하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그녀 앞에서 라마데스는 자신에게 주어질 권력의 영광과 장래의 기득권 모두를 포기하고 맙니다. 제국의 법도를 어기는 죄인이 되더라도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일에 칼을 썼던 장수 라마데스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베르디가 <아이다>를 통해서 정작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는지 논란이 될 것입니다. 이 시기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었던 때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우리의 눈은, 베르디가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아이다>가 정작 누구의 꿈을 대변하고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라마데스의 마음에 있었던 권력에 대한 모진 야망도 녹여내는 그런 아이다, 민중의 희망은 그런 모습의 여인에게서 역사의 여신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요?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 )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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