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중앙 높이 세워지거나 건물에 박힌 시계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이전, 유럽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서부터 야간통행금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소집을 알리는 신호 등 각종 다양한 종소리를 통해서 그 사회의 운행방식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전달된 셈입니다.
따라서 종탑이 없는 유럽의 마을이나 도시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권력이 통하는 수준과 범위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콰지모도가 어느 날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위해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은 채 스스로 이 종을 울리는 모습은, 따라서 이 종소리를 울리는 권력이 민중의 손으로 옮아간 사건의 상징이기도 한 것입니다.
종을 울리는 방식에 따라 그 메시지가 달라지는 것은 마치 훗날 무선전신용 모르스부호의 원조(元祖)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모르스 부호를 만드는 길고 짧은 단순한 기계적 음파와는 달리, 큰 종과 작은 종의 소리가 서로 조합을 이루면서 음악적 효과까지 내는 것에 주목하면, 여기에는 종을 울리는 이의 깊고 맑은 지혜가 함께 작동한 것을 알게 됩니다.
종을 만드는 방식도 땅을 파서 종의 내부형태를 만들고 흙을 둘러싸서 뜨겁게 녹인 청동을 붓게 되는데, 이 땅 밑에서 만든 종이 소리를 내기 위해 공중에 걸리는 모습을 보면 그건 흡사 땅과 하늘의 기운이 서로 만나는 현장을 목격하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게 따지고 나가면 종을 울리는 행위는 역시 하늘과 땅의 뜻이 하나가 되도록 기원하는 마음이 압축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것이 위압적인 종교제도나 권력의 질서 등에 동원되어 통제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본래의 의미가 소멸되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동양의 산사(山寺)에서 울리는 종소리 역시, 일상의 번잡한 사연들에 묶여서 이리저리 흩어진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을 그 영혼의 중심에 모아들이는 힘을 발휘한다고 여겨집니다.
이 종소리 대신 현대에 등장한 것은 사이렌이지만, 그것은 매우 일방적인 동원체제의 소산임에 분명한 듯하고 운치나 그 미학적 깊이, 또는 성찰의 여운 등으로 볼 때 종소리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종소리를 듣기는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사회의 운행방식에 대한 나름의 의미 있는 예고를 하는 종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런 판국이니 하늘과 땅의 기운이 스며 있는 종이 울리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바라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콰지모도 이후 역사는 그 종을 울리는 권한을 민중에게 넘겨주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 종을 울리는 시각과 방식은 권력자가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요즈음은, 종을 잡고 있는 손은 사람들이 종탑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종소리가 나게 하지도 않는 것만 같습니다. 자신들이 설정한 일방적 논리에 따라 오라는 식일 뿐입니다.
언제 노동이 끝나고 휴식이 시작되는지, 이제 안심하고 자도 되는지조차 예고하지 않는 권력의 종탑이 도심 한 복판에 걸려 있고, 그걸 새롭게 울려야 한다는 일깨움은 낡은 시대의 유물처럼 버려지고 있습니다. 압제의 시대에 자유의 종을 난타했던 마음들은 이제 노쇠해버리고 말았는지, 역사의 혼을 일깨우는 종소리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정작 필요한 종소리는 울리지 않고, 별로 논리적이지도 않고 별로 설득력도 없고 그다지 아름답지도 못한 주장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소음만 만들어 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오를 위대한 종탑은 어디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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