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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 미국 양심의 심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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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 미국 양심의 심판자"

김민웅의 세상읽기 <115>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던 시기, 카리브 해의 '산 도밍고(San Domingo)'는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서 인도 제도(諸島)의 한 식민지였습니다. 당시 이 섬의 동부는 스페인, 그리고 서부는 프랑스 영(領)이었는데, 특히 이곳은 유럽 노예무역 최대의 단독 시장이었고 프랑스 해외무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년 뒤인 1791년, 이곳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흑인 노예들의 반란과 혁명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아이티(Haiti)의 출발이었습니다. 그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카리브 바다에 프랑스의 혁명정신과 결합한 아프리카의 정치적 축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들 노예들의 투쟁은 무려 12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혁명적 투쟁의 중심에는 뚜쌍 루베르뛰르(Toussaint L'Ouverture)라는 사람이 지도자로 나섰습니다. 나이 45세에 이르기까지 노예였던 그가 이제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로 이 투쟁은 역사상 최초로 승리한 노예 혁명이었고, 이들은 프랑스를 비롯해 스페인과 영국 등 당시 최대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연속적인 침략을 이겨냈습니다. 찢기고 밟히면서 인간 이하의 처우를 받았던 노예로부터, 자신들의 운명을 자신들의 손으로 주도해나갈 수 있는 주인 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씨 엘 알 제임스(C. L. R. James)의 저작 <검은 자코뱅(The Black Jacobins)>은 이 혁명의 기록으로서, 흑인은 본래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복종에 익숙한 인종이라는 식의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대해 일격을 가한 작업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들 흑인은 애초부터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치열하게 투쟁했고, 어떻게든 노예적 처지에서 해방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이 노예무역업자들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생포돼 이곳 카리브 해로 실려 오는 과정에서도 워낙 격렬하게 저항해, 결국 이들을 긴 막대에 일렬로 사슬로 묶지 않고서는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섬에 도착한 뒤에도 이들에게는 여전히 저항의 기질이 완강하게 남아 있어서 고문과 폭행 등으로 노예적 복종을 강제화하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예가 된 흑인들은 자신들만의 모임을 비밀리에 가졌고, 거기에서 춤과 노래를 펼치면서 서로 격려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을 열망했습니다.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불려진 노래를 <검은 자코뱅>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에 에 봄바 휴 휴 캉가 바피오 테. 캉가 무네 드 레. 캉가 도 킬라 캉가 리!" 번역하면 이러한 뜻이 됩니다. "백인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우리는 마침내 부수어버리겠다. 이 맹세를 지키지 못하면 차라리 죽으리라." 묵묵히 순종하는 노예로 남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백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섬뜩한 이 노래는 뒤집어 보자면, 이들 흑인 노예들이 겪고 있던 삶의 비극에 대한 항거를 의미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산 도밍고 흑인 노예의 후예들이 있는 미국의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고향이 됩니다. 그 재즈는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흑인 영가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음악이었습니다. 고난과 슬픔, 그리고 백인들의 지배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깊고 깊은 염원이 그러한 음악적 표현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뉴올리언스가 지금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변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약탈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약탈 행위는 단지 범죄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지금껏 빼앗기면서 살아 왔던 이들의 격분과 결합하면서 미국 사회의 도덕적 양심을 맹타하고 있습니다. 백인사회가 이들에게 빼앗아 온 것은 없었는가 하는 질문이 던져지는 것입니다.

부시 정권은 군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수습의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이들 흑인들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내연하고 있던 좌절과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지 않을까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채 가난과 모멸의 역사를 살아 왔던 이들이 자신들의 피와 땀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백인들만의 나라'를 향해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여 년 전 산 도밍고의 울분은 아직 말끔히 사라지지 않은 셈입니다.

언젠가 말콤 엑스는 '백인들의 패권(white supremacy)'을 질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 백인들의 꿈은 우리의 악몽(Your dream is my nightmare)"이라고. 아메리칸 드림의 저 밑바닥에서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현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 자신들의 꿈 속에 있던 악몽의 정체와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이라크에서도, 그리고 뉴올리안스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하고 폭력을 앞세우는 역사는 더 이상 존립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이 너무도 분명해지는 듯 합니다. 뉴올리언스는 지금 미국의 양심과 미래의 심판자가 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 )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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