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아직도 철벽같은 성채를 장악하고 있고, 새 것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거리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 혼돈의 지점에서 17세기의 유럽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확실한 것일까?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사유(思惟)하고 있는 자기 자신만큼 분명한 것은 우선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독백처럼 외쳤을 때 그것은 오래 전 보헤미아의 숲 속에서 자유의 꿈을 꾸었던 청년 데카르트가 내공을 쌓은 후 마침내 우뚝 서서 철학적 전투를 벌이기로 결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단호한 육성은, 중세 전체를 유령처럼 지배하면서 근대적 변화를 이제 막 겪고 있던 유럽의 영혼 또한 여전히 움켜쥔 채 좀체 물러서지 않던 도그마, 즉 교리적 신학에 대한 고된 진지전(陣地戰)을 선포하는 반란행위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이는, 바로 그 도그마를 절대 권력의 수단으로 삼고 있던 중세적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신사적(精神史的) 공세였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가진 것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나 기타 제3의 타자가 이미 대신 생각해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논리를 정면에서 거부했던 것입니다.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북-서 유럽을 두루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신적 전통과 만날 수 있었고, 그것은 그 어떤 틀로도 가두어 버릴 수 없는 자유의 정신을 데카르트 안에 길러갔던 것입니다. 훗날, '자유의 행진'을 역사의 필연적인 운명으로 갈파했던 헤겔의 역사철학은 이미 그 씨앗이 뿌려졌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해서, 기존의 권위가 내린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는 비판적인 질문을 통해 현실의 진상을 확인하고 진실에 접근해가는 근대적 사유의 싹이 그 안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던 셈이었습니다.
17세기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에 의한 사상적 탄압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러한 현실은 그 자신도 가톨릭 신자였던 데카르트에게 '질식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1633년,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관점, 즉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원리를 통해서 천체우주학과 물리학을 정리한 <세계(Le Monde)>를 출판하려다가,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가 교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출판을 결심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가 죽은 후 이 책이 나오긴 하지만 데카르트가 처했던 현실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무지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성역(聖域)과 같은 진리로 행세하는 독단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그는 진실을 가로막고 있던 세력에 대하여 혁명가처럼 나선 것은 아니지만, 허위의 논리를 하나하나 철학적으로 격파해나갔습니다. 그러한 데카르트에게 현실적으로 자유의 공간을 마련해준 곳은 네덜란드였습니다. 이미 당시에 활기찬 해상제국으로 세계를 누비고 있던 네덜란드는 기존의 교리적 속박에서 풀려난 단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시기 네덜란드는 초기 유럽 식민지 체제의 건설자라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절대주의의 유산에 짓눌려 있던 프랑스에 비해서는 내적 자유의 영역이 넓었던 상황이었습니다.
1641년 그가 라틴어로 출간한 <제1철학에 대한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일체의 지식에 대해 이른바 '방법적 회의', 즉 얼핏 자명한 것처럼 생각되는 지식도 실상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전제를 일단 내걸고 따져 들어가는 철학적 성찰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중세적 독단의 논리가 교회의 선언이나 교의에 대해 의심하거나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를 종교적 죄악으로까지 몰아갔던 것을 떠올리면, 이러한 그의 방식은 사실 매우 위험한 선택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대에 진리의 보루라고 주장되던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발적 항거이자 그 즉시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 있는 이단적 소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데카트르가 옳았음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그 무슨 독단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로 판단하며 의심 없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해가는 '생각의 자유'를 자신의 포기할 수 없는 권리로 믿는 시대가 인류를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대한 설득 역시 이러한 논리 회로 위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시대의 진정한 진전을 위해서는 이 생각의 자유를 봉쇄하는 모든 것이 파산의 기로에 처해야 했던 것입니다.
데카트르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숨을 거둔 지 이제 35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근대는 이미 완료되었고, 이제는 이른바 근대 이후의 시간을 논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지금 이 땅에서는, '제왕적 권력'을 자진해서 버렸다는 대통령이 하는 말이나 내세우는 논리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방법론적 회의의 기초적인 능력을 보이는 정치인들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혹시 데카르트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라틴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실로 이 나라의 대통령이 시대를 앞선 계몽군주도 아니고 민주적 논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절대 권력자도 아니며 중세의 성채를 지키고 있는 고루한 교부철학자도 아닐진대,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중세의 독단에 자기도 모르게 갇혀 있는 탓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말로는 아니라면서 사실은 은근히 일방적으로 제왕적 분위기를 만들고 있어서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어법에 대해 소통의 부재 내지는 장애를 느끼고 있는 국민들은 날이 갈수록 정치를 한껏 조롱하고 있는 사이에, 대통령 앞에 서 있는 오늘날의 여당 정치인들은 무엇이 두려워 그 무슨 대단한 책을 홀로 독방에서 쓰고 사후에 내놓으려고, 지금은 그 저작의 출간을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요? '생각의 작동이 멈추어버린 존재'는 데카르트 이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정도는 혹 알고나 있는지요.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www.ebs.co.kr )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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