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쓴 희곡 <옛날 옛적 훠어이 훠어이>는 우리의 전래 설화를 소재로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광장>이 남과 북의 대립이라는 냉전 현실에서 그 어느 쪽도 자신의 선택이 될 수 없다고 여긴 존재의 고뇌를 그렸다고 한다면, <옛날 옛적 훠어이 훠어이>는 민중들이 고대하고 있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그 축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작가 최인훈의 평생을 관통하는 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광장>에서 이명준은 권력의 욕망이 이상을 질식시키고 있다고 본 남과 북, 그 어디에서도 새로운 내일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여기며 좌절하는 한 지식인의 유형을 보여줍니다. 역사의 광장에서 정면으로 제기되어야 할 문제를 껴안고 침몰해 간 사나이의 운명은 당대를 살아가고 있던 모든 이의 숙제이기도 했습니다.
<옛날 옛적 훠어이 훠어이>는 민생을 돌아보지 않는 권력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 속에서 출현한, 시대를 구원할 장수에 대한 민담의 각색입니다. 장차 커서 장수가 될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일면서 어느 산골 마을은 홀연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혹시라도 조정에 들어가면 그 마을은 반역의 근거지로 지목되어 어떤 피바람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민중의 기원과 그 기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빚는 모순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세상이 오기는 해야 되겠지만, 정작 그런 세상을 이뤄내는 일은 대단한 용기와 의지를 요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애초에 그런 역모의 싹을 틔울 이유가 없다고 여긴 아기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기를 살해하고 맙니다. 이는, 민중이 자신의 꿈과 희망을 스스로 알아서 제거해버리는 비극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늘이 내린 인물의 출중한 기운이 그냥 사라지는 법은 아니었습니다. 용마를 타고 내려온 아기장수의 넋은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를 안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현실에서는 달성되지 못했던 염원이 하늘에서는 필연이 되는 곡절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하늘로 돌아가는 그 길을 "훠어이 훠어이" 하고 떠나보내며 조정에서 자신들을 모반세력으로 몰아 토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훠어이 훠어이'는 한편으로는 조정의 타격대상이 되지 않은 안도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다렸던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에 휩싸인 민중적 정서의 이중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력한 민초들이 직접 나서서 들고 일어나지는 못해도, 자신들을 대신해서 시대의 기류를 일거에 바꾸어줄 영웅의 등장을 기원하면서도 선뜻 그 걸출한 인물과 함께 하지 못하는 비운의 역설이 그의 작품 속에 스며 있다고 하겠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좌절해간 지식인 이명준, 그리고 스스로 그 역사적 열망을 꺾어버린 민중의 현실을 조명해간 최인훈은 이들 작품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런 꿈을 용납하지 않는 현실의 권력에 대한 비탄과,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꿈의 정체에 대한 자기고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3세계로 가는 바다에서 종적을 감춘 이명준은 수평선 위의 비둘기로 나타나고, 아기장수는 용마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니 말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 권력 실세의 누군가가 "이 시대는 영웅을 기대하지 않는 시대"라며 권력자에 대한 비판의 과잉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일견 맞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영웅이기를 바라는 시대는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고통과 좌절을 이겨내는 혜안과 의지를 바라는 것조차 권력의 질타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비판의 과잉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의 꿈이 사정없이 꺾여가고 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이걸 보지 못하고 있다면 이 나라의 권력은 방향타 잃은 배가 될지도 모릅니다. '훠어이 훠어이'가 그 옛날 옛적에 겁도 없이 꾼 꿈이 정작 현실이 되려하자 주저했던 민중의 무력한 몸짓이었다면, 이 시대의 '훠어이 훠어이'가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견고하게 집단화되어갈 때 이를 어찌 감당하려는지 걱정이 깊어집니다.
세월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내는 권력의 지혜와 성실함을 그래도 여전히 바라고 있는 것이 순진하다면 순진할진대, 이런 민초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리도 문제삼는 것은 도대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6시/www.ebs.co.kr )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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