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의 생김새와 그 산세(山勢)가 풍기는 기운은 서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넉넉하고 웅혼한 기품을 자아내는 지리산과, 화사하게 단장한 숙녀의 미모를 닮은 설악산은 각기 내뿜어낼 기운의 색깔이 아무래도 동일하지 않을 듯 합니다. 온통 기암괴석(奇巖怪石)의 기세로 거침없이 뻗친 금강산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절묘한 재주를 지닌 도인(道人)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산에서의 수행생활에 깊은 인연이 있는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에서는, 지리산에서는 사람을 크게 품는 마음을 가진 인물이 나오고 금강산에서는 특출한 도력을 가진 수도승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한답니다. 긴 세월의 풍파로 후덕하게 마모된 완만한 능선을 지닌 산과, 땅 속에 도저히 감추어둘 길 없이 힘차게 꿈틀거리며 솟구쳐 오른 바위절벽으로 둘러쳐진 산이 같을 리야 없을 것입니다.
초라하고 황폐한 산하(山河)의 풍경을 지겨운 일과처럼 대하기보다는, 보기만 해도 생명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자리에서 사는 것이 그 사람의 일상적 사유와 성정에 미치는 힘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속세의 무겁고 혼잡스럽기만 한 짐을 벗고 첩첩산중(疊疊山中)의 계곡을 따라 홀연 은거하는 이들의 선택에 자연 머리가 끄덕여지기도 하는 법입니다.
세상사의 풀기 어려운 번잡함에 시달려 어지러워진 마음을 닦고 헛된 욕망으로 흐려졌던 눈을 씻어 정신을 정갈하게 가라앉히는 수행(修行)에, 세속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산은 참으로 마땅한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일찍이 이 나라의 옛 도사들이나 고승들은 왕가(王家)의 청으로 도읍지(都邑地)를 고를 때에 산세(山勢)를 판별하는 작업을 그 중심에 놓았던 것은 필연적인 도리(道理)였습니다.
실로 산은 얼마나 많은 것을 그 안에 품고 있는지 도대체 짐작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설이나 민담에 등장하는 산신령(山神靈)은 수염이 허연 늙은 신선(神仙)이 아니라, 바로 이 산이 온통 담아내고 있는 기운의 총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하늘로 치솟은 나무가 바위틈에 굵은 뿌리를 내리고, 신비한 약초가 귀티나게 자라며 투명한 정기(精氣)가 시냇물이 되어 흐르는 그런 영험한 힘이 그 안에서 숨쉬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졸렬하고 편협한 산신령이란 없습니다. 무수히 다른 존재들에게 자기를 너그럽게 내어주지 못하고서는 산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내어줌이 그 자신을 야위게 하거나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산을 더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을 오르기도 하지만, 산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들어오는 우리를 향해 자기를 닫아걸지 않고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자신을 은근히 열어주는 것입니다.
서울을 후면에서 소박한 병풍처럼 싸고 있는 북악산은 한강으로까지 뻗치는 자락을 펴고 지난 세월을 단아하게 품고 있습니다. 다른 이름난 명산과는 대조적으로 무난한 능선과 그리 화려하지는 않은 자태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의 허다한 사연을 묵묵하게 끌어안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나라의 수도(首都)란 온갖 이질적인 마음과 생각이 부딪혀 들끓어도 그걸 차분하게 중화시켜야 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걸출한 산세라고는 비록 할 수 없으나, 남을 무모하게 압도하거나 주변의 고난을 돌보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 열중한다든지 또는 그렇다고 주눅이 들어 초라해지는 그런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속세의 헤아릴 길 없는 번뇌를 껴안은 너그러운 산세입니다. 그와 같은 산에 점잖게 들어앉은 서울과, 그 속 깊이 자리 잡은 "권력의 궁성(宮城)"은 따라서 이 나라의 민심(民心)을 편안히 다독거리며 일으켜 세울 신령한 지력(地力)을 아낌없이 뿜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선, 요사스러운 기운이 퍼지는 것을 막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궐내에서 자꾸 허망한 소란이 연거푸 일어나고 있다는 괴이한 풍문이 들리니, 아, 북악(北岳)의 정기를 비전(秘傳)으로 내려받은 절세의 도인(道人)이라도 불러 이 음산한 먹구름을 속히 거두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이라도 해야 될 모양입니다. 아무 타박할 까닭이 없는 산이 괜시리 아까워지고 있기만 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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