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신문·방송사들이 이른바 'X파일' 사건의 의제를 의도적으로 불법도청이 부각되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주장이 현직 기자들에 의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언론노조 등 현업 언론단체들은 이같은 움직임을 '삼성 봐주기'로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대응에 나설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불법도청 띄우기=부정부패 물타기"**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회(위원장 신학림)는 17일 오후 서울 정동 성공회 성당에서 'X파일 이건희게이트, 진실규명과 공정보도'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각 신문·방송사의 보도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특히 각 신문·방송사 노조의 공정보도위원회 간사들이 토론자로 참석해 자본권력에 무기력한 언론의 실태와 기자들의 자기검열적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날 발제를 맡은 양문석 EBS 정책위원은 조선일보의 첫 보도가 있었던 지난 7월 21일부터 8월 10일까지 20일 동안의 신문·방송 모니터 보고서를 소개하는 가운데 "신문의 경우 보수신문은 불법도청이 본질임을 주장하며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우선시 하는 논조를 보인 반면 진보적 신문은 도청내용에 대한 진상규명과 테이프 내용 공개를 주장하는 등 확연한 시각 차이를 보였다"며 "방송은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시청자들이 정작 궁금해 하는 핵심은 번번이 비껴갔다"고 평가했다.
양 위원은 구체적으로 "대표적인 진보-보수 논조의 경향·한겨레, 조선·중앙 4개 신문을 대상으로 보도유형을 살펴본 결과, 전체의 54.8%가 불법도청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특히 중앙은 전체 보도의 71.3%가 불법도청과 관련한 기사였고, 도청내용에 대해서는 고작 7.2%만을 보도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양 위원은 이어 "신문의 X파일 보도에서 도청내용에 대한 문제제기가 확연히 줄어드는 대신 불법도청이 부각된 시점은 시기적으로 참여연대의 검찰 고발을 기점으로 대통령의 연정 발언과 국정원 불법도청 시인, 대통령의 '도청본질' 발언 때였다"며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는 고위층의 부정부패에 '물타기'를 하고 있는 정부와 검찰 등에 언론 역시 동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추론했다.
양 위원은 또 "애초 도청내용에 집중했던 방송 역시 점차 불법도청으로 눈을 돌리면서 55.7% 대 29.9%의 보도비율을 보였다"며 "이는 정부와 검찰, 보수언론 등 핵심을 무마하려는 세력에 부화뇌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양 위원은 발제문 끝에서 △내부 부패에 침묵하는 평검사 집단 △초기 X파일 이슈화에 나서지 못한 시민사회단체 △언론노조를 비롯한 MBC노조의 대응 미숙 등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쏟아 놓아 눈길을 끌었다.
***"남은 과제는 도청테이프 공개토록 하는 것"**
한편 토론에 참석한 각 신문·방송사 노조 공정보도위원회 간사들은 양 위원의 지적에 대체로 공감하며 소속사를 비롯한 언론계의 자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성주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민주언론실천위원회 보도부문 간사는 "X파일 사건은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지켜야 하고, 또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MBC는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며 "MBC 보도국 입장에서는 애초 제보자가 안기부 직원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보도할 경우 실정법에 정면 위배된다는 것 등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이 됐지만 돌이켜 볼 때 MBC가 공영방송이라는 점을 더 앞에 놓고 사고했어야 했다"고 자성했다.
김규원 한겨레신문 여론매체부 기자는 "한겨레 또한 X파일 사건 초기 고작 MBC와 접촉해 녹취록이나 녹음테이프를 확보하는 것에만 온통 신경을 쓰는 등 적절치 못한 대응자세를 보인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도 발굴보도, 특히 이건희 삼성그룹 일가에 대한 발굴보도가 미비한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김익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공정보도추진위원회 간사는 "KBS의 경우 MBC가 주춤하는 동안 X파일의 내용을 전격 공개하며 주목을 받았지만 마찬가지로 의지의 과잉만 있을 뿐 심층취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공영방송의 철학과 수신료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됐다"고 평가했다.
유희준 전국언론노조 SBS본부 공정방송위원회 간사는 "실정법을 어겨가며 보도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가 보여준 보도태도는 무척 지혜로운 자세였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지금 시점에서 언론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점은 도청테이프에 담긴 육성을 어떻게 하든 공개하도록 추동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제안했다.
신학림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X파일은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권력층의 부패고리를 확인시켜주는 '살아있는' 사건"이라며 "따라서 언론이 불법도청 쪽으로 의제를 몰아가는 것은 부정부패 범죄를 방조하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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