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이 뭐길래….'
"논술이 대체 뭐길래 이 난리일까. 요즘 고1 언니와 중2인 나, 초등학교 5학년인 남동생은 때아닌 '논술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방학인데! 지난 1학기 내신성적까지 별로여서 엄마의 불안을 샀던 언니는 '지금도 한참 늦었다'며 바로 논술과외로 들어갔고, 난 중학생 논술학원에 등록했다. 초등학생인 동생에겐 문학전집이 안겨졌다.
생물학자가 꿈인 언니는 국문과 출신 논술과외 선생이 들고 오는 시사이슈 정리집에 불만이고, 난 논술학원은 놔두고라도 학교 수업부터 불만이다. 오늘 배운 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국어 선생님은 옥희 어머니가 사랑방 손님에게 애정을 느끼면서도 옥희를 위해 재혼을 포기했다며 중요 대목에 밑줄 치고 '아름다운 희생 정신,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받아적으라 하셨다. 웃겼다. 뭐가 순수하나? 청승맞고 한심하지. 요즘 같으면 겨우 대학생 나이인데 평생 과부로 살라고 하는 인습은 거의 '인권유린' 아닌가? 내 친구는 엄마가 마흔 넘어 재혼할 때 새 아빠가 데려온 애랑 잘만 지내던 걸. 고리타분하다. 축구와 <해리포터..>에 열광하는 남동생은 오늘 엄마에게 잡혀서 약속 하나를 하고서야 나갈 수 있었다. 해리포터 대신 '초등학생의 창의력 향상을 위한 문학전집'을 하루에 한 챕터씩 꼭 읽겠다고…."
한 중학생의 시선으로 쓴 '가상일기'다.
서울대 본고사 논란이 일어난 지도 한 달. 김진표 교육부 장관이 '논술의 본고사 여부를 밝히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겠다는 8월 말이 다음 주로 성큼 다가왔다. '논술 파동' 이후 교육부가 논술교과서 개발, 중등교사 독서지도 연수 등 '혁신 수업' 방안을 연이어 내놓는 동안 사교육 논술시장은 시장대로 들썩이고, 출판계 또한 각종 창의력 개발, 논술 교재 출판으로 한층 분주해진 모습이다.
이 와중에 중등 문학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온 숙명여대 최시한(53) 교수가 수십년 간 이어져 온 이른바 '밑줄 치고 땡땡' 주입식 문학 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한 책을 내 눈에 띈다. <소설의 해석과 교육(문학과 지성사)>은 대학입시 위주의 주입식 소설교육이 우리의 청소년을 얼마나 문학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통렬하게 비판한다.
우리의 문학 교육이 충실한 작품 읽기을 통해 학생들의 감성과 사고력을 키우기는 커녕 오히려 작가 연보, 수사법, 문학사적 평가 등 잡다한 자투리 지식을 외우게 하느라 문학을 골치 아픈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직접 만나본 최시한 교수는 역시 '문학 교육과 읽기 능력', '독서에 대한 오해', '창의성과 논술' 등에 대해 할말이 많았다.
***"오죽하면 시인이 수능시험에 나온 자기 시 문제를 틀리나"**
-저서에서 수십년간 이어진 주입식 문학교육의 폐해와 국어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현재 문학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뭔가. '평가의 용이성'이 주입식 교육의 가장 큰 이유인가.
"문학뿐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그동안 지식 교육에만 치중하고 능력 교육을 소흘히 해 온 게 문제의 핵심이다. 문학에서 능력 교육이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능력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특히 사고력을 소흘히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얼마든지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데 관련 프로그램을 절대 개발 안 한다.(웃음)
비극은 그나마 주입되는 지식마저 부적절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나기'를 두고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딱지 붙이는 게 맞지도 않지만 작품 이해에 무슨 도움이 되나? 주입되는 지식 자체에도 깊이가 없다. 파편적이고 쓸모 없는 작품 관련 정보들을 학생들이 암호풀이 하듯 외워서 시험 보게 하니 문학을 싫어할 수밖에…. 오죽하면 어떤 시인이 수능시험에 나온 자기 시에 관한 문제를 풀고 틀렸겠나(웃음). 정해진 유형 앞에 오히려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틀리게 된 것이다.
***"선생이 다른 걸 물어야 하는데, 뭘 물을지 모르는 거다"**
주입식 교육이 된 이유는 우선 문학 교육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국어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생이 학생에게 다른 걸 물어야 되는데, 뭘 물을지 모르겠는 거다. 돈트(Don't)가 아니라 캔트(Can't)다. 또 현장에 가면 참고서가 교육을 지배하고 있어 이를 깨는 게 참 힘들다. 서울시교육청이 서술형을 시험의 30%로 의무화했던데 교사들이 이로 고민이 많다. 학부형이 학교로 달려온다는 것이다. 그만큼 적절한 평가 기준이 부재하다는 것이고 연구의 빈곤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해석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문화 수준이 낮은 거다. 학교 수업에서 작품 읽히고 줄거리 쓰는 교육활동이 없는 게 아니라 답의 기준에 대한 이론적 모색이 없는 거다.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답안을 평가하는 기준의 적절성이 필요한 것이다. 일률성이 아니라 다양성, 상투성이 아니라 참신성과 같은."
-소설 읽기가 말하기·듣기·쓰기 등 다른 언어능력과 연계돼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가능한가. 또 문학이 주입식이 아닌 체험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활동을 해야 한다. 1인칭을 3인칭으로 바꿔쓸 수 있고 또 소설을 소재로 논술도 할 수 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옥희 엄마의 선택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술하라는 거다. 학생들이 자연히 작품을 깊이 읽을 수밖에 없다. 선생님이 밑줄 쳐주는 게 아니라 의문을 던져야 한다. 언어능력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훈련받아 커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활동이 이뤄지려면 교육자는 학습자가 그 글을 읽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학습자의 눈높이에서 철저히 이해해야 하고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현재 국어 교과서에도 심화학습이 있지만 뭘 심화하려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학습의 명분과 실제가 괴리된, 가장 큰 이유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지 않은 데에 있다."
***문제제기 1. 독서·논술교육은 꼭 국어·사회 교사가 맡아야 하나?**
-저서에서 '독서의 개념'을 문제 삼았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인식행위'인데 독서지도를 꼭 국어 교사가 전담하는 것은 문제라고. 그러나 교육부는 현재 국어·사회 과목 교사 중심으로 독서교육 연수를 준비하고 있다.
"독서라는 말에 대한 관습과 고정관념이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독서 대신 '읽기'라고 하자. 이 교육을 왜 꼭 국어·사회 선생만 맡아야 하나. 읽기는 미술, 체육, 과학 선생도 다 한다. 화학 선생은 화학 선생대로 학생들에게 읽을 책을 안내해야 한다. 화학 분야를 국어 선생이 안내할 순 없다. 읽기 지도는 기본적으로 모든 교사가 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왜 '국어'에 집중하나. 이는 우리의 뿌리박힌 문학 중심의 독서관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읽기라고 하면 문학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읽을 책 중에 문학은 극히 일부다. 그런데 물론 아이들일수록 정서함양과 재미를 위해 문학 비중이 높긴 하다. 그러나 고등교육과정으로 올라갈수록 현저히 떨어진다. 대학에서 국문과 말고는 누가 소설을 교육자료로 쓰나.
또 하나는 감상문 쓰기 중심으로 독서지도를 생각한다는 거다. 제가 교사 연수 때 묻는다. 파브르곤충기 독후감이랑 이광수의 <무정> 독수감 양식이 같을까요? 다르면 어떻게 다르게 써야 한다고 지도한 적 있습니까? 묵묵부답이다. 이건 폭력이다. 이 세상에는 글이 아주 다양하고 글 읽고 공부하는 방법도 많다. 왜 하필이면 독후감만 쓰라고 하냐. 그냥 읽고 얘기해도 된다. 왜 자꾸 쓰라고 하냐. 선생도 못 쓰면서. 억지로 시키니깐 다 베끼는 거다.
***문제제기 2. 문학책, 어렸을 때부터 그저 많이 보면 좋다?**
모 신문사가 중학생 논술대회를 열던데 중학생이 논술을 왜 하나. 물론 논리적 사고는 필요하다. 그러나 논술은 양식이다. 소설에도 얼마든지 논리적 사고가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비판적 사고력에 필요한 논리가 부족하다. 그냥 작문하면 된다. 논술은 고등학교에 와서 해도 된다. 그런데 요즘은 뭐든지 논술 붙여야 장사되니까 초중등학생들까지 논술로 밀어넣는데 애들한테 부담만 줄 뿐이다."
-현재 출판시장은 '우리 아이 창의력 기르기'라는 이름 하에 '고전 읽기 시리즈' 등 독서교육과 창의력 기르기 시장이 활황세를 맞고 있는데, 이런 '독서 범람'을 어떻게 보나.
"안 읽히는 것보다 낫지만 낭비가 심하다.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곧 교육적으로 중요한 작품은 아니다. 게다가 책 읽기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가공하고 프로그램을 짜서 주지 않으면 억압일 뿐이다. 학생에게 읽혀야 할 자료의 선정에도 여러 기준이 있는데 무작정 문학전집을 아이들에게 던져주면 어쩌자는 거냐. 영국에서는 햄릿을 초등학교용, 중학교용, 고등학교용으로 각각 출판해서 읽힌다."
***문제제기 3. 대학 입시에는 꼭 배운 게 나와야 하나?**
-논술 도입 등 '대학 입시 변화'가 '공교육의 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나, 아니면 모순을 심화시킨다고 보나.
"원론적으로는 대학 입시가 중등 교육을 개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비관적이다. 왜? 선생도 학생도 학부형도 우리나라에서는 시험에는 꼭 '배운 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에 꼭 배운 게 나와야 되나? '배운 것'이라는 게 뭘까. 대부분의 한국인들 생각은 '지식'이다.
물론 너무 동떨어진 것을 물어선 안되지만 똑같이 물으면 안 된다. 응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암기형 시험만 양산할 뿐이다. 문제를 틀어서 능력을 물어야 한다. 얘가 비판할 줄 아나. 추리력이 있나. 상상력이 있나. 가치의식이 적절하고 탄력적인가. 대학에서 그런 걸 묻겠다고 하는데, 학교에서는 그런 교육을 해 오지 않았으니,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새로운' 문제 유형을 익히겠다고 사교육 기관으로 몰려가고, 학교 선생님들이 그걸 눈뜨고 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 선생님들의 재교육이 우선이다. 물론 이것은 하루 이틀에 안 된다. 교육부가 논술대비 교과서를 개발한다던데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학생들의 수학능력을 테스트하겠다는 시험을 본 지가 10여년이다. 그러면 그동안 실제로 수학능력을 기르는 쪽으로 교육이 바뀌어야 되는데, 바뀔 힘이 없는거다.
우선 대학에서부터 교사를 양성할 때 그런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참고서가 지배하고 있는 학교 현장도 같이 바뀌어야 한다. 뜻있는 교사들이 있어도 옆 선생이 관행대로 참고서에서 시험 출제하면 도로묵이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문제는 대학들조차 아직 답을 못내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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