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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의 이런 감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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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의 이런 감상법"

김민웅의 세상읽기 <104>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는 '친절하지 않고서는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비밀'을 일찍, 아니 깊고 깊은 고통 속에서 불현듯 깨우쳐 버린, 얼핏 섬뜩하면서도 실은 슬픈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녀가 멸시와 냉대를 받으며 끝내는 아무렇게나 버려지지 않을 수 있었던 비범한 선택에 대해, 우리는 도저히 놓칠 수 없는 밧줄을 맹렬히 잡고 있는 자마냥 거의 사력을 다해 주시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잠시도 숨 고를 여지없이 고강도의 긴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줄기찬 긴장은 대단히 성찰적인 시선을 또한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주문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혼자였던 그녀의 일이 결국에는 모두의 전혀 피할 이유 없는 뼈저리고도 당연한 과제로 되어가는 과정을 소리없이 추격해가면서, 관객은 냉혹하도록 화사한 여인의 미소 뒤에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통제해 온 절규의 표정을 소스라치게 마주하게 됩니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살아 온 시대의 감추어진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찰나적 느낌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골목길 가로등을 애써 비켜서는 그림자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열아홉, 스물의 어린 나이에 생각지 못했던 불운한 임신, 이로 인해 악연을 맺게 된 한 영어학원 선생 백아무개, 그리고 그의 유괴범죄의 과정에서 금자씨는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13년의 옥살이를 하고 출소하게 됩니다. 자신의 딸이 백 아무개에게 인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13년은 자신을 죄수로 만들어 청춘을 허무하게 소멸시킨 자에 대한 복수와 응징을 준비하게 하는 매서운 세월이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기력만 소진시킬 뿐인 비탄으로 허비해버린 시간만은 아니었던 셈이었습니다.

금자씨가 감옥에서 생존하는 방식은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윽박지르며 군림하는 자와, 다른 이의 필요를 친절하게 채워주고 자신을 나누어줌으로써 이기는 자의 차이를 영화는 적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해서 출소 이후의 세상에서 탄탄한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그녀를 알게 된 거의 모든 이가 그녀의 협력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비책(秘策)이 따로 없었던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이번 작품은 전작인 <올드 보이>가 영문을 모르게 갇혀버린 자의 혼란스러운 비극에서 출발했던 것과는 달리, 그 보복의 논리에 현실적 설득력과 구성의 치밀함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다시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잔혹한 현실을 암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보고난 이후에도 여전히 끈끈한 아픔으로 남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역사의 정의로운 응징을 해본 적이 없는 우리 자신의 역사를 은밀하게 되돌아보게 하고 있기도 합니다.

감독 자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영화는 곳곳에서 우리 사회의 허구를 깊숙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허영에 찬 영어교육으로 자신의 아이들의 영혼이 정작 어디론가 유괴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부모들. 돈맛에 찌든 종교지도자들의 비루한 몰골, 더 이상의 진실규명을 포기한 채 결론을 이미 내리고 허술한 각본에 꿰맞추는 엉터리 수사, 인간을 오염된 욕망의 해결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폭력적인 성, 소비적 쾌락에 몰두하는 위선적인 권력, 그리고 생명의 비극 앞에서도 여전히 돈 타령으로 굴절되는 병든 인간관계.

그러면서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마치, 야수(野獸)의 심성을 가진 권력에 의해 저질러졌던 무수한 의문사와, 진상을 고발한 자가 도리어 죄인으로 몰리고 국가 폭력에 의해 무기력하게 희생자가 되어 갔던 이들의 모습을 '유괴 살해되는 아이들의 최후'와 겹치게 하는 듯 했습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을 연상하게 하는 장기수 할머니가 금자씨에게 넘겨준 <법구경>의 뒷면에 비밀스럽고도 정교하게 그려진 사제 권총 설계도는, 하여 지난 시대가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금을 그어놓았던 어처구니 없는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는 '혁명적 이탈'과 '아무도 감히 막아서서는 안 될 거룩한 응징'을 상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이 유괴살인'이라는, 그 어떤 정상도 참착할 수 없는 사회적 공분(公憤)의 대상이 되는 범죄를 통해서 영화는 그와 다를 바 없는 아니 그 이상의 무수한 역사적 죄악 앞에서 어느새 침묵하는 공범자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우리 자신,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희생자가 된 우리를 유감없이 직시하도록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죽인 자가 있고, 죽은 자가 있는데 기이하게도 죽은 자만 남은 비틀어진 현실의 구차한 변명의 반복을 정면에서 고발하고 있는 금자씨는 그야말로 진실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똑부러지게 친절하고, 세속의 빈틈없이 잘 훈련된 폭력 앞에서도 결코 더 이상 무력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끝에서 낭독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복수와 응징으로 그녀가 영혼의 구원을 얻지는 못했노라고, 그러나 그런 그녀가 인간적으로는 더욱 좋다고 말입니다. 가상의 세계에서나 실현될 법한, 악에 대한 처단의 현실적 갈망을 여기서 읽게 됩니다. 금자씨가 자신의 딸을 안고 하얀 두부처럼 생긴 케이크를 먹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착하게 살고 싶은 우리'를 자꾸만 그악하게 만들고 있는 세력에 대한 필요한 응징을 끝낸 후의 자기성화(自己聖化)와, 악연에 채여 살았던 과거에 대한 작별 의식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보다 희고 순결하기를, 그러면서도 여전히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런 소박한 기원을 여지없이 좌절시키려는 자들은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인가요? 금자씨의 딸이 처했던 운명처럼 악한 시대에 불가항력적으로 유기(遺棄)된 이들 모두에게, 역시 그 딸이 바라던 것처럼 진실로 미안하다고 세 번 이상 거듭 말하는 금자씨. '친절한' 그녀의 출현은, 이 별로 친절하지 않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쓸쓸하고 무력한 혼자에서 벗어나 드디어 하나가 된 우리 모두로 가는 길에 대한, 예기치 않게 주목하게 된 진지한 이정표처럼 다가오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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