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기자들이 이른바 'X파일' 사건에 사주인 홍석현 주미대사가 연루된 것과 관련, 사건발생 보름 만인 5일 대국민 사과성격의 글을 자사 지면에 실은 뒤 재발방지를 다짐하고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중앙일보 기자들은 "과거의 부적절한 관행이 혹 남아 있다면 이를 과감히 끊어버리겠다"며 "이런 노력을 통해 중앙일보는 신뢰받는 정론지로서, 삼성은 일류 기업으로서 각기 제 갈 길을 가야 한다"고 천명했다.
***"공정보도 위한 발걸음 재촉할 터"**
중앙일보 기자들은 5일자 2면 상단에 <중앙일보 기자들은 다짐합니다> 제하의 글을 싣고 "옛 안기부 도청 녹음테이프 내용 중 일부가 중앙일보 대주주인 홍석현 주미대사와 관련된 사안이란 걸 알고 난 뒤 참담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고 밝혔다.
기자들은 먼저, "97년 대선 과정에서 삼성과 정치권의 부적절한 관계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개입한 것은 언론사 책임자로서 있을 수 없는 처사였다"며 "중앙일보 독자와 국민을 실망시킨 이런 과거의 잘못에 대해 당사자인 홍 대사는 물론 우리 기자들도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현재 심경을 토로했다.
기자들은 이어 "중앙일보는 99년 삼성과 완전 분리됐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여전히 중앙일보가 삼성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는 독자와 국민 여러분의 우려가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며 "다시 한번 주위를 꼼꼼히 살펴 과거의 부적절한 관행이 혹 남아 있다면 이를 과감히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기자들은 또 "이번 사태를 통해 언론이 특정 정파나 사주·기업 등의 이해관계에 휘말릴 경우 엄청나게 큰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며 "앞으로 공정보도위원회의 내부감시 활동을 강화하는 등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위한 발걸음을 더욱 재촉할 것을 다짐한다"고 덧붙였다.
***노조, 기자총회 결의 위임받아 회사측 설득**
이번 기자 일동 명의의 글은 이에 앞서 지난 7월 28일 노조 주관으로 열린 기자총회에서 대다수 기자들이 △사주인 홍석현 회장의 반성 △삼성과의 관계 재정립 등을 촉구하는 의견표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결의함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총회에 참석했던 80여명의 기자들은 구체적인 문안 작성을 노조 집행부에 일임했었다.
이에 따라 노조는 별도의 성명서 발표 또는 지면화 등을 놓고 숙의한 끝에 4일 저녁 권영빈 대표이사를 만나 5일자 2면 상단에 기자 일동 명의의 글 게재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회사측 일부 간부들은 "5일 오전 국정원의 대국민 사과성명 발표가 있는 마당에 기자 일동 명의의 대국민 사과 글이 실리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게재일시를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역사의 기록이 필요하다는 게 젊은 기자 대다수의 생각"이라는 노조는 설득으로 결국 기사화가 이뤄지게 됐다는 후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영종 중앙일보 노조위원장은 5일 오전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반드시 반성해야 할 사안을 '방탄지면'으로 무마해서는 안 된다는 게 기자들 대다수의 생각이었다"며 "노조 차원에서는 앞으로 각 부서별로 포진한 20명의 공정보도위원들을 중심으로 지면 감시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2주에 한 번꼴로 열리는 편집위원회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해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중앙일보 기자 일동 명의의 대국민 사과 글 전문이다.
***<중앙일보 기자들은 다짐합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최근 공개된 옛 안기부 도청 녹음테이프 내용 중 일부가 중앙일보 대주주인 홍석현 주미대사와 관련된 사안이란 걸 알고 난 뒤 저희는 참담했습니다. 밤낮없이 현장을 누비며 쌓아온 독자와 국민 여러분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느낌입니다.
저희는 이번 사태로 중앙일보에 대한 독자와 국민 여러분의 실망과 질책이 얼마나 큰지 절감하고 있습니다. 사주의 잘못일 뿐이라고 떠넘기거나 책임을 피하려 하지도 않겠습니다. 일부 핵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거나 그때와 지금의 중앙일보는 달라졌다는 말들도 모두 변명으로 비칠 수밖에 없음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비판과 감시의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언론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도덕성과 규율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삼성과 정치권의 부적절한 관계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개입한 것은 언론사 책임자로서 있을 수 없는 처사였습니다. 중앙일보 독자와 국민을 실망시킨 이런 과거의 잘못에 대해 당사자인 홍석현 대사는 물론 우리 기자들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99년 삼성과 완전 분리됐습니다. 물론 이번 사태가 그 이전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앙일보가 삼성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는 독자와 국민 여러분의 우려가 있음을 저희는 이번 사태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다시 한번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부적절한 관행이 혹 남아 있다면 이를 과감히 끊어버리겠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중앙일보는 신뢰받는 정론지로서, 삼성은 일류 기업으로서 각기 제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중앙일보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스스로를 얽어 넣었던 불행한 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성과 깨달음을 통해 새 출발을 다짐했고, 2002년 대선 보도 등을 통해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저희는 언론이 특정 정파나 사주·기업 등의 이해관계에 휘말릴 경우 엄청나게 큰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저희 기자들은 공정보도위원회의 내부감시 활동을 강화하는 등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위한 발걸음을 더욱 재촉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저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그리고 독자와 국민 여러분께 더 다가가기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겠습니다. 신뢰 회복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믿습니다. 오늘의 고통과 시련이 중앙일보가 보다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 독자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자세로 더 힘차게 뛰겠습니다.
많은 격려와 함께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 주십시오.
2005년 8월 5일 중앙일보 기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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