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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태양, 빈몸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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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태양, 빈몸의 자유

김민웅의 세상읽기 <96>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날이 계속, 가파른 언덕을 달리지 않았는데도 숨이 차도록 덥기만 하다면 몸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 곤혹스러운 노릇이 되고 말지도 모릅니다. 땀으로 눅눅해진 육신의 허물을 잠시 벗어 우람찬 나무 그늘 밑 서늘한 평상에다 임자 없는 옷처럼 한가하게 펼쳐두고, 투명한 영혼으로만 돌아다니는 자가 되는 것도 한 방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흩날리는 깃털처럼 구름이 이따금 스쳐 지나는 하늘과 맞닿아 경계선을 이룬 능선을, 빈틈없는 녹색으로 뒤덮은 두터운 삼림(森林)이 태양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겨우내 홀로였던 바다가 그 태양의 붉은 알몸으로 인해 더욱 푸른 기색을 띄고, 자신에게 돌진하듯 몰려드는 인파(人波)를 너무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모르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열기 속을 간신히 통과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은, 그 태양을 도저히 반길 수 없는 채로 오지(奧地)에서 버티고 있는 아직은 어린 병사의 낯 설은 처지와 다를 바 없는 듯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병사보다는 적게 또는 많게 늙은 부대원들이 모두 막사에서 하릴없이 편하게인지 아니면 그만 체념이 습관이 된 탓인지 그렇지 않다면 달관(達觀)의 표정으로 졸고 있는 것인지 하는 사이, 사막의 한 허술한 병영(兵營)의 초소를 고독하게 지켜야 하는 외인부대(外人部隊)의 어느 졸병의 훈련되지 못한 힘겨움과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심장을 쿵 하고 울리는 포성이 어디선가 들릴 때마다 불쌍하게 놀라곤 하지만 그건 아마도 전투경험이 부족한 탓이라고 스스로 타이른 뒤에, 다급하게 무장을 갖추고 나서야 하는 비상(非常)은 아닐 거야 하면서 상급자를 굳이 깨우려 들지 않습니다. 그 소리는 자신에게만 크게 들릴 것이라고 자꾸만 스스로를 다독거립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자 이런 정도야 자신도 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며 무표정한 세상을 초조하게 응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에게는, 오래 전부터 식민지 아프리카 사막에 익숙한 날렵하고 빛나는 검은 색 프랑스제 라이플과 독일 롬멜의 탱크부대가 쏘아댄 방해전파를 뚫고 나간 투박한 중량의 영국제 무전기, 그리고 로보캅의 눈을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게 복제한 선글래스 같은 미국제 투시경이 갖추어져 있으니 그다지 염려할 것이 없다고 과학적으로 독백합니다.

세상을 살아보면 누구나 알게 되는 일이지만 현실은 결코 간단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그에 더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여름의 이토록 사정없이 작열하는 햇살로 후덥지근하게 땀만 흘리게 하면서 그 성과에 대한 기대를 혹여 확신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아무런 근심 없이 또다시 막무가내로 백병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를 '야전(野戰)'을 위해 특수 중무장을 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나설 자신을 갖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우칩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이 그 뜨겁게 내리쪼이는 태양이 우리에게, 그렇게 무거운 장비를 모두 몸에 걸치고 살아야 할 필요가 도대체 있는가 하고 묻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빈 몸으로 있다가 도처에서 새롭게 제작되어 끊임없이 공급되는 무장을 하는 순간, 어느새 세상을 저 혼자 낚아챌 듯 쏘아보면서 힘을 과시하는 몸짓과 반사적으로 세뇌된 동작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것을 알기나 하고 있느냐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물음표는 "겉몸에 무엇을 따로 걸칠 이유 없는 자유에 대한 각성"이며 그 자유가 결코 불안하지 않음을, 다른 그 무엇으로 꾸미지 않은 완벽하게 노출된 몸으로 배워가기를 바라는 우주적 섭리의 가르침일 겁니다. 여름의 태양과 가장 정직하게 만난, 용기있는 나무가 가장 알찬 열매를 내고, 눈동자가 착한 황소가 무심히 지나는 길에 나 있는 풀은 더욱 짙푸른 기운을 뿜으며, 산등성이를 오르다 연인(戀人)과 함께 걸터앉은 바위는 뜨겁게 속으로 익어가고, 철교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마침내 은빛 물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원한 장대비라도 작심하고 땅에 내리꽂히듯 올라치면 그동안 견디어 냈던 열기가 오히려 승리의 흔적처럼 기억되기조차 합니다. 이 격렬한 세상과 어떻게든 마주하기 위해 살아 온 세월만큼이나 두꺼운 각질(角質)처럼 덮어씌웠던, 알고 보면 일체의 허무한 옷들을 이제는 모두 훌훌 벗어버리고 "빈 몸의 상쾌함과 얼핏 알지 못할 내공"을 동시에 누리고 기르는 계절의 은총을 서로가 나눌 수 있으면 합니다. 진정한 힘을 가진 자유의 영혼이 필연코 그 안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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