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태규 명리학 <20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201>

포만(飽滿)에 대해서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하고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성공하기가 어렵고 부자가 되긴 어려운 현실이다. 필자는 이를 아주 다행(多幸)한 일이라 여긴다.

한 50년 살다보니 성공한 사람도 많이 보았고 돈을 번 사람도 많이 만났었다. 그리고 운명에 대해 연구하다보니 그런 사람들이 찾아와 마음 편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또 들어주는 시간들도 제법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성공한 사람이나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더 큰 성공과 더 큰 부를 축적하려고 하는 한은 곁에서 보기에 역겹긴 해도 그런대로 아직 인간적인 매력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또한 어느 선에 가서 신물이 나기 시작하면 대단히 위험한 질병에 걸린다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다. 그 질병의 이름은 냉소와 포만 그리고 권태이다. 줄인다면 포만증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증세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거 얼마면 사? 그거 파는 거지, 몇 푼이나 해?" 이런 말이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냉소증에 걸린 것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사물들이 지닌 각각의 매력을 무시하고 오로지 돈의 수량으로 사물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그 대상은 갑자기 매력을 상실해버린다. 나아가서 시장가치(market value)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미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된다. 그만한 시세에 또 살 수 있는 사물이 어떻게 '고유'한 매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냉소증에 걸린 환자는 모든 사물의 가치를 아래로 깎아내림으로써 어떤 냉소적인 만족을 얻는 자이기에 아직은 치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더 발전해서 포만과 권태로까지 발전하면 사실상 치유책이 없어지고 만다.

포만증에 걸린 사람은 대상물 각각이 서로 다르고 그로 인해 고유한 매력을 지닌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버린다. 다시 말해 사물의 특수한 성격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가령, 서점에서 파는 책 한 권이 2만원이고, 동대문 시장에서 파는 여름 신발이 2만원이라 해도 사실 그 물건들의 가치는 사람에게 있어 전혀 다르다. 그 책에 담긴 내용이 소중한 자에게 있어 그 책은 2만원 그 이상의, 어쩌면 무한대의 가치와 효용을 줄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책과 그 신발이 같은 2만원의 시장가가 매겨져 있다고 해서 같은 가치와 효용을 지녔다고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바로 포만증이다.

사람들은 포만을 신물이 날 정도의 향락에서 그 원인을 찾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여러 사물이 모두 돈 몇 푼이라는 동일한 가격으로 매겨져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같은 가치와 매력을 지녔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그 또한 포만이고 권태인 것이다.

권력이나 돈을 쥔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포만 권태증인 것이다. 새콤달콤한 사과와 신선한 향을 가진 키위가 개당 같은 1,000원일 순 있지만 어디 그것이 같은 매력인가 말이다. 만일 그렇다는 여긴다면 그 사람은 시각과 후각, 미각, 청각 모두를 상실해버린 사람이다. 다시 말해 오관(五官)이 마비된 병자이다.

또 사물을 얻고자 할 때, 그 자체의 매력만이 얻고자 하는 동기가 아니다. 때로는 그것을 얻으려고 할 때 드는 노력의 양과 질이 그 매력의 강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어떤 것을 얻으려 할 때의 모든 구체적인 노력과 저항, 이 모든 사연들이 대상을 얻었을 때 고스란히 그 대상에게로 이전되어 그 대상의 독특한 매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여름내 땀 흘린 결과 얻는 가을 곡식의 그 낟알 낟알이 고맙고 신통한 것이지, 마트에 가서 카드로 결제하고 사온 낟알에서 우리는 그리 큰 만족을 얻지는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획득 과정이 기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면 질수록 그 대상은 더더욱 무색하고 무미한 그 무엇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카드를 쓰지 않고 반드시 현금으로 물건을 사거나 지불한다. 최소한 지폐를 통해 대상의 무게를 간접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드는 무게가 없다

돈을 많이 벌면 물론 좋다. 그러나 돈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며 그 배후에 언제나 어떤 대상의 획득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돈이 많아지면 이전에는 매력적이던 사물을 점점 기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얻게 되는 일들이 많아지기에 오관이 마비된 것과 같은 포만 권태의 무서운 질병에 걸려들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매력 있는 물건이란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없을 때 가장 강렬하게 그 향기를 발하는 법이다.

필자가 예전에 구두를 닦으러 가던 나이든 노인네의 얘기를 하나 하고자 한다.

여름이었는데 그 분은 고물 선풍기를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다. 하나 사시지 그래요 했더니 "아니 이 놈이 그동안 고쳐서 잘 써왔거든요, 그랬더니 정이 들어서 다시 한 번 고쳐 보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중이요"라는 것이었다. 그 구두닦이 노인네의 눈에 그 고장 난 선풍기는 물건이 아니라 마치 귀여운 손주를 보는 듯한 애정이 서려있었다.

물론 처음에 선풍기가 고장 났을 때에는 그냥 기계로만 여겼으리라, 하지만 고치고 또 고치고 그러다 보면 돌아가고 하다보니 그 선풍기는 노인에게 있어 아예 정이 어린 그 무엇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돈이 아쉽다 보니 시작된 노인과 선풍기의 상호교류였지만, 세월 속에서 그것은 어느새 진한 러브 스토리가 되어있었음을 느끼고 필자는 아연 어떤 깨달음을 얻은가 아닌가 싶었다.

돈이 많아지면 이처럼 대상의 독특한 가치를 지워버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고, 그것이 만성화되면 포만권태증에 빠지는 것이니 무에 좋은 일이겠는가 말이다.

필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돈을 벌면 무엇이 좋지요 하는 질문이다. 그러면 열에 다섯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정작 돈이 많아졌을 때 자유로울 수 있는지 또 그 자유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대개의 자유는 어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나날의 쳇바퀴 돌아가는 듯한 먹고사는 일상으로부터 돈이 많으면 자유로울 수 있다. 사실이다. 그 지겹고 단조로운 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푸념에 그치는 것이 좋다.

우리가 목이 마르면 물이 마시고 싶어진다. 그리고 물을 마시면 목마름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이고, 더 이상 물을 마시지는 않는다는 얘기이다. 대개의 자유란 이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회사에 가면 상사가 그리고 조직이 나를 구속한다. 그래서 구속과 지배를 받기 싫으니 돈을 벌어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돈이 많아지면 그 순간 구속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가 된다.

사실에 있어 순수한 자유란 완전히 공허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자유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한 자유란 표면적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모든 지침(指針)과 확고한 내용을 완전히 상실하여 버리게 되며, 모든 우연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충동적인 특징과 공허함과 불안정성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쉽게 말하면, 몇 달 푹 놀고 나면 할 일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심지어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 다시 말해 영생(永生)을 얻은 자가 있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냉소와 권태, 그리고 포만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인기가 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내 사랑, 프란체스카"가 바로 그런 것을 코미디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니 영생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게임은 조건, 특히 시간이라는 제한이 주어져 있기에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는 법이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이런 생각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대단히 창조적인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매 순간 순간을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에 포만 권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창조(創造)란 말은 문자 그대로 없던 상태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기에 보통의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창조적으로 산다는 것이 미쳐 날뛰는 광태(狂態)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다.

그렇기에 순수한 자유를 얻은 자는 인생 자체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 그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보다는 어깨와 등줄기에 실린 무게를 통해 삶의 묵직한 피곤함도 함께 하는 삶이 한결 나은 것이다.

필자를 찾아와서 운명을 물어보는 사람들의 심적 동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압도적이다. 노후가 편안할까요? 돈은 좀 있을까요? 성공할 수 있을까요? 모두들 나이 먹어 고생할까 겁이 나고, 돈이 없어 가난할까 겁을 낸다. 하는 일이 실패할까 또 겁을 내고 있는 것이다. 가난과 지배,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이니 인지상정이라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정작 필자가 운명학에 대해 느끼는 소회는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적성에 맞아서 가장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인지, 또 그 앞길에 어떤 시원한 오아시스와 큰 사막, 또 험난한 고산준령이 있는지를 살펴서 그런 행복과 시련을 통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라도 주는 것이 운명학의 큰 대의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하고자 했던 운명학은 필자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필자가 진심으로 원하는 손님은 이런 손님이다.'제 인생길 앞에는 어떤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을까요'하고 묻는 손님 말이다.

그 길에서 만나는 프로그램들이 다소 터프하고 험난하다 해도 기꺼이 삶을 즐기는 여유를 지닌 손님 말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