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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MBC는 책임있는 언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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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MBC는 책임있는 언론인가?

'X파일 보도'와 관련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이학수·홍석현 등 두 '공인'이 이른바 '이상호 X파일'을 방송하려던 MBC를 상대로 낸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해 법원이 내린 결정과 그 이후 MBC의 처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이 가처분신청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왕왕 비슷한 가처분 신청이 과거에도 없진 않았으나, 언론사들이 그 실명을 쓰기를 주저해 마지 않던 테이프의 두 주역은 이 가처분 신청을 통해 자신들의 실명을 스스로 '커밍 아웃'하고 나선 것. 자신들의 이름이 어차피 알려질 것으로 판단한 이들은 '문제의 내용'이라도 보도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몰렸던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그들의 판단'대로 거의 모든 언론이 '이학수'와 '홍석현'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과 그들의 모습을 지면과 화면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었고, 1997년의 대선자금과 관련해 대화를 나눈 테이프의 두 주인공이 바로 삼성 가문을 매개해 관계를 맺은 이들 두 사람임을 만천하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법원은 이들의 기대를 배반했다. 여러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문제의 테이프에 담긴 내용 자체를 보도하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던 것이다. 재판부는 "방송 자체를 금지하기는 곤란하지만 테이프의 불법성이 있으므로 테이프의 원음을 직접 방송하거나 대화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실명을 직접 거론해서는 안 된다"며 "나머지 세부사항은 방송국이 결정할 문제다"라고 결정했던 것.

심지어 주심 판사는 "내용 자체를 방송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담긴 내용의 큰 취지는 밝힐 수 있되 세세한 내용을 밝히지 말라는 취지다"라는 보충설명을 통해 '보도의 자율성'을 최대한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테이프의 원음 방송', '대화내용의 직접 인용', '실명 거론'은 곤란하지만 테이프의 내용을 보도하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충분한 재량권을 허용했던 것이다. 예컨대, 1997년 대선 당시 여와 야에 어느 정도의 돈이 건네졌거나 건네질 예정이며 그에 대한 각각의 반응은 어떠하고 그밖에 명절 떡값으로 전현직 검찰 고위관계자들에게 어떻게 돈이 건네졌는지 등등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만으로도 상당한 내용을 보도할 여지가 열렸던 것이다.

이렇게 삼성측의 기대를 배반한 재판부의 결정 취지를 MBC는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혹은 결정 취지를 살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MBC는 이날 밤 9시의 뉴스데스크에서 관련 기사를 5꼭지나 편성해 보도하면서도 불법도청 테이프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날 아침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날 밤 MBC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비난의 글이 쏟아졌다. '실망했다' '허무하다'는 등의 비판은 외부 시청자들에만 국한되지 않고 결국 MBC 내부의 내홍으로 이어져 올해 2월 출범한 '최문순 체제'의 덫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이렇게 'MBC의 보도 결정→삼성측의 가처분 신청→재판부의 사실상 기각 결정→MBC의 어정쩡한 보도'로 이어지는 21일 하루 동안 벌어진 일련의 소동은 어찌 보면 한 바탕 소극(笑劇)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달리 보면 손아귀에 쥔 자기 권리마저 허무하게 포기하는 전형적인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청자들이 공영방송에 대한 기대를 계속 가져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가처분 심리를 통해 보도내용을 사실상 사전 검열 당하는 수모까지 겪어가며 확보한 자기권리조차 행사하지 못하는 공영방송에게 과연 우리를 대신해 공공의 이익을 수호할 언론의 책무를 맡겨야 하느냐는 얘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번 사건은 단순히 가처분이 받아들여지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건엔 최소한 세 겹의 의미망이 중첩돼 있다.

이 사건의 가장 핵심에 우리 사회의 검은 커넥션이 도사리고 있다. 문제의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검은 돈'을 매개로 정계-재계-검찰-언론이 줄줄이 꿰이는 '위선의 커넥션'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당사자들의 육성을 통해 말이다. 평상시 같으면 수면 하에 철저히 숨어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이 유착 관계가 우연히도 백일하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것이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MBC는 그 의무를 철저히 포기하고 말았다.

두번째 의미망은 국가기구의 불법적인 도청 행위다. 옛 안기부가 저질렀다는 이 불법도청의 실체는 앞으로 국정원이 자체 조사를 통해 진상을 밝힌다고 하니 지켜볼 문제지만 그것은 오늘날도 '휴대전화 불법 도감청'과 같은 형태로 시민 개개인의 생활을 옭죄어 올 수 있다. 불법 도청팀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과거지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가 더욱 확장된 시선으로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의미망이 이 사건의 표면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상의 사생활 보호'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보도 자유'의 상충 문제다. 이 문제 역시 아직은 미완의 현안이다. 가처분 신청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가처분 시청 단계에서 결정될 성격도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이번에 MBC가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했어야 할 대목이다.

자신의 보도 행위에 내포된 적극적인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는 언론은 스스로 존립의 가치를 포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 차제에 지금까지 자신의 언론 행위가 치열한 내적 고민 없이 그저 시류에 따라 편리하게 이뤄져 온 것은 아닌지 스스로 따져보아야 한다.

이제 이러한 몇 가지 관점을 갖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단계에 이르렀다. 문제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MBC의 내부 고민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도 중요한 관찰 포인트다.

언론의 문제에만 국한해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제 사태의 출발점(MBC의 도청 테이프 확보 및 보도 여부 고민)에서 한 바퀴 휘돌아 중간 결산점(MBC의 도청 테이프 내용에 대한 어정쩡한 보도) 쯤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기 책임을 방기하는 언론에 대해 시민들이 해야 할 몫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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